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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19. 2017

'詩'-런던

런던 에세이-1 파운드에 산 '시(poem)'를 읽으며

2015년 산티아고 도보순례를 갔다 온뒤 내 생활에서 몇가지가 달라졌다. 그중에서도 ‘걷는 행위’를 ‘거룩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순례가기 전에도 이리저리 혼자서 걷기는 사실 좋아했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 덜컥 믿은체 기본적 체력보강도 않고 800 km 산티아고 순례를 ‘무대뽀’로 시행했다가 고생을 좀 했다. 이 단순한 행위인 ‘걷기’를 산티아고 ‘전과 후’로 만약 비교한다면, 순례 후엔 걷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다. 무작정이 아니라  머리속 ‘청소’도 말끔하게 하고 분위기나 때에 따라 ‘걷는 묵상’도 할수 있다. 중요한 건 걷는다는 이 행위가 이젠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하나의 ‘전례행위(Ritual)’처럼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어떤 도보순례자처럼 ‘예술’이 되진 못했다. 소란하고 복잡한 시내에 나가 사람들과 만나거나 식사하고 난뒤에도 시간이 나면 나는 걷는다. 사람많은 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쳐가며, 달리는 차도 걱정하며, 걷는다는게 무리일수 있지만, 복잡한 시내도 나만 아는(?), 아니 내가 좋아하는, 비교적 한적하게 즐기며 걸을 수 있는 코스가 있기 때문이다.


출발점은 런던시내, ‘차링 크로스(Charing Cross)’역이다. 이 역은 ‘아가다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열차 살인사건’의 출발역이다. 좀 무섭다. 하지만 나의 런던도보순례는 내 안의 ‘이기심’을 죽이기 위한 출발점임을 상기시킨다. 거기에서 테임즈 강을 가로지르는, 보통으로 걸어도 퉁퉁 소리가 들리는, 인도교를 건너 60년대 건물로 들어찬(Ugly한) 사우스 방크(South Bank) 예술 지구에 다다른다. 거기로부터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미술관까지는 차도없고 소음도 적어 강변을 따라 걷기엔 참으로 좋다. 단, 대낮엔, 또 여름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거기엔 가끔씩 쉴 수 있는 벤치도 놓여있다. 강변의 바람도 맞을 수있고 멀리 타워 브리지(Tower Bridge)나 카나리 워프(Canary Wharf)의 높은 빌딩도 볼 수 있다. 세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앞이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앞에서 노만 포스터(Norman Foster)가 설계한 흔들리는 밀레니엄(Millennium) 다리(그래서 별명이 Wobbly Bridge이다)를 거쳐 세인트 폴(St. Paul)대성당에 다다르면 미니 도보순례도 끝이 난다. 이때면 내안의 ‘이기심’도 ‘약간’ 죽었다.


이 영국 성공회 대성당(다이애나와 찰스가 결혼한 성당)은 낮에도 좋지만 성당을 감싸안은 듯 은은한 조명으로 비춰지는 밤에보면 더좋다. 아울러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거대한 돔을 이고있는 십자형 성당은 주위의 초현대식 빌딩에도 기죽지 않고 아직도 런던 스카이 라인을 장식한다. 대신, 낮이면 상황은 정반대다. 지척에 있는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을 중심으로 세계적 금융 중심가인 이곳이 자본의 전투복을 넥타이로 꽉 조여맨 사람들이 쉴새없이 왔다갔다 한다. 정신사납다. 성당이 있는 이 지역이 바로 하루에 수천억을 거래하는 국제 금융의 중심지인 런던의 ‘더 시티(The City)’이다. 그래서 머리가 빙빙 도는 느낌이다. 어떻게 이 맘몬(Mammon)의 중심에 성당이 어엿하게 서 있을까? 한편으론, 여러대의 컴퓨터 앞에 로봇처럼 앉아 끝도없이 나열된 아라비아 숫자와 빨갛거나 푸른색으로 쉴새없이 변하는 네모 스크린속 숫자를 안구를 고정시키고 색깔에 따라 표정이 변하는 자본주의 전사들외에도, 성당 계단에 앉아 점심을 먹는 한가한 사람들,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잡담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밀려오는 관광객들로 이 성당앞은 항상 만원이 된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오후 5시경 이후면 이 주변은 그런대로 고적하며 사람들도 덜 붐빈다. 이 대성당에 다다르면 성당 바깥을 한번 빙 두르고 다시 가까운 역으로 가서 집으로 돌아오는게 나의 산책 프로그램의 전부이다.


지난 주(2016년 어느날)도 마찬가지였다. 차이나 타운에서 아는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중에 둘이 나의 ‘걷는 취미’에 동참했다. 우리가 세인트 폴 대성당에 다다랐을 땐 밤 8시 정도였다. 정문 계단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성당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성당 주위를 으레 그렇듯이 둘러 보려고 했다. 그런데 성당의 왼쪽문 가까이 다다랐을 때 한 젊은이가 ‘시(poem)’를 팔고 있었다. 그렇다. ‘진달래 꽃’이나 ‘황무지’같은 시 말이다. 이런 ‘시'를 노점상에서 파는 호떡처럼 그렇게 한 수씩 그는 팔고 있었다. 그 젊은 시인은 성당밖의 어릿한 불빛아래에서 “시 한편에 일 파운드(a poem for one pound!)”를 반복하며 외쳤다. 가만! 시를 다 팔다니… 지나치려다 발걸음을 다시 돌렸다. 그리고 시 한편을 단돈 1파운드를 주고 샀다. 사지않으면 후회할것 같았다. 몇년 전 파리에 갔을때도 퐁피두 센터 옆 공터에서 시를 파는 사람이 있었던 걸 기억했다. 온갖 희한한 것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파리에선 이상하다고 못 느꼈던 ‘시 판매’를 런던에서 느꼈다. 그것도 예술지구도 아닌 금융의 중심지에서...


우선 재미있었다. 그 젊은이는 자기가 직접 지은 시를 하얀 종이에 프린트해 가위로 엉성하게 오린 다음 다시 빳빳한 검은 종이위(아래 사진 참조)에 풀칠해 붙여서 팔고 있었다. 정성을 드렸다고나 할까. 관광지에서 흔히 볼수있는 작은 수채화 그림과 비슷한 사이즈였고 다르다면 그림대신에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시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했지만 나는 직접 시인이 골라 달라고 했다. 하루에 수천억 파운드(pound)을 빨아들이고 내밷기를 반복하는 이곳 ‘맘몬(Mammon)’의  입구에서 ‘시’가 단돈 1파운드 헐값에 팔리고 있었다. 한편, 노숙인인 이 젊은이가 이 시들을 팔아 삶을 꾸린다는게 초현실적(Surreal)이었다. 특히나 ‘반-자본주의’ 데모가 성당 앞 광장에서 가끔 벌어지는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이곳에서 말이다. 몇년전엔 ‘가이 폭스(Guy Fawkes)’가면을 쓴 데모대들도 아예 성당 앞에 텐트를 치고 몇달을 노숙했었다. 그때는 이 성당이 우리나라 명동성당과 같은 풍경과 상황이었다.

그 거리의 시인이 내게 골라준 시는 아래와 같다.

“한푼 줍쇼?”

혹시 실례되지 않는다면 잠깐만요
허기진 배를 위해 한푼 주실 수 있는지요
마약도 않고 양아치도 아닌 평범한 놈이에요
다만 기분도 안좋고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어요

동전도 괜찮지만 잔돈을 원해요
불공평하고 부당하고 약간은 이상하죠
경찰이 나만 잡으려하는데
이 도시의 사기꾼들은 자기들 관할이 아닌가요
필사는 범죄취급당하고 탐욕은 유지되지요

어떻게 제 정신이 나아지겠어요
부유한 이의 텅빈 건물 바깥에서 잠을 자는데요
지배층이 범죄자인 건 세상이 다 알고, 숨길필요도 없죠
건데 짭새들이 왜 나를 포함해 노숙자만 괴롭히죠

퇴직 군인들이 왜 거리에서 잠을 자야만 되죠
권력의 식탁에 외국의 독재자들에겐 자리를 내주면서요
경찰은 몽둥이를 휘두르지만 화이트 칼라 범죄엔 침묵하죠
코카인에 절은 금융가들과 권력자들은 자기만 위하지요

혹시 실례되지 않는다면 잠깐만요
허기진 배를 위해 한푼 주실 수 있는지요
마약도 않고 양아치도 아닌 평범한 놈이에요
기분도 안좋고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어요

“Spare Change?”

Excuse me I don’t want to be rude
But could you spare me some change for a little food
Not a junkie or criminal, just a normal dude
Who suffers from depression and a low mood

The coins are needed but I desire change
It seems unfair, unjust and a little strange
That the police pick on me but the city fraudsters are out of their range
Desperation is criminalised whilst greed is maintained

How should I improve my mental health
Sleeping outside buildings kept empty for others wealth
The elite are openly criminal, no need for stealth
As the cops bother the homeless including myself

So why should ex-soldiers sleep on the street
While at the table of power foreign dictators are offered a seat
The police ignore white collar crime while on their beat
As coke head bankers and lords line themselves a little treat

Excuse me I don’t want to be rude
But could you spare me some change for a little food
Not a junkie or criminal, just a normal dude
Who suffers from depression and a low mood

제목은 ‘Spare Change?” 난 ‘남은 잔돈?’이란 말 대신에 보통 길거리의 영국인 노숙인들이 ‘Spare change, please.’라고 하기에 ‘한푼 줍쇼’로 번역했다. 그러나 재목뒤에 붙은 물음표 “?”는 많은 걸 뜻한다고 본다. 끝없이 경쟁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러 이유로 경쟁에 뒤쳐진 이들 약자들은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호주머니안에 쩔렁이는 ‘남은 잔돈’같은 인생이나 다름아니다. 상류층 권력자와 부유한 이들의 ‘거스름 돈’으로 취급되는 이 약자들의 ‘인간 존엄성(Human Dignity)’을 되묻기 위해 이 거리의 시인은 ‘남은 잔돈’에다 ‘물음표’를 집어넣으며 ‘우리가 잔돈인생이냐?’하며 되묻는것 같다. 소리없는 저항이다. 꼭 성서에서 나오는 ‘떨어진 빵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그 이야기와 닮았다. 그들이 왜 남은 ‘잔돈 인생’이 된것인지는 사회의 불공평에서 발생한다고 나름대로의 논거도 제시한다. 경찰은 지배층(특히 금융가 CEO들)의 비리엔 모른체 눈감아주며 왜 살려고 발버둥치는(desperate), 끝내 길거리로 내몰린 노숙인들만 거리의 쓰레기 취급을 하는지 항의한다. 이런 불평등한 시스템이 이 거리의 시인인 노숙인을 ‘우울증(depression)’으로 몰아갔으며 그의 정신건강이 이런 노숙의 상태에선 회복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부유한 이들의 텅텅 비워진 빌딩밖에서 잠자야하는 ‘아이러니’를 이 시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동전(coin)보다는 좀더 많은 잔돈(change)을 원하는 이들의 절박한 심정도 들어있다. 그래서 시도 예술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먹고 살기위해 단돈 1파운드에 달랑 팔아야만 하지 않은가. 그래서, 남은 잔돈을 쨍그렁 던지는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과연 이들이 ‘남은 잔돈 인생’일까?


사람과 사람, 사회와 사회, 그리고 나라와 나라간의 ‘벽’을 무너뜨릴 평화의 기적이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나길 빈다. 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에서 거대한 자본이란 넘지 못할 높은 담을 바깥에서 바라보며 왜 이 거리의 시인이 우울증에 걸렸는지 이해한다. 그가 쓴, 그리고 나에게 팔려온, 시에서처럼 가진자들이(꼭 물질만 뜻하는게 아닌) 담을 쌓아 기득권 지키기에 열중하면 할수록 이 보이지 않는 담을 낮추고 또 헐기위해 노력하는 자들도 많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 이 벽을 무너뜨리는 참뜻에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평화와 정의가 가득한 사회를 원한다면 말이다.


이 대성당안에는 ‘윌리암 홀만 헌트(William Holman Hunt)’의 유명한 그림,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 걸려있다. 이 그림에서 등불을 들고 서계시는 예수앞의 문은 ‘문고리(Handle)’가 없다. 안에서 열지 않는다면 바깥에서 열고 들어갈 수 없도록 화가는 문고리를 일부러 그리지 않았다. 그 안에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나오길 기다리는 것이다. 부활절에 예수님이 그 무덤동굴 입구를 가로막던 거대한 돌을 “안”으로부터 굴려 낸것처럼 진정한 부활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란 걸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닫힌 문이 열릴  희망은 언제든 있다. 문은 열고 닫으라고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희망때문에 걷기를 계속할 것이다. 혹시 그 거리의 시인을 다시 본다면 시를 하나 더 사고 싶다. 혹시 이 ‘시’가 닫혀진 내 마음의 문을 밖으로 열수있는 문고리 구실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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