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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n 12. 2017

'푸켓'에서 흘러간 시간과 마주하다.

태국 푸켓 여행 에세이-


‘꼽쿤’.

그 신학생은 날 만나면 항상 이렇게 인사했다. 두손도 앞에 공손하게 모으고 머리도 숙였다. '감사'란 태국말, ‘꼽쿤(kòp kun. 뒤에 Krap이 붙어 '꼽쿤깝'.)’이 무슨 소린지 몰랐다. 영국의 신학교에 들어가서 얼마가 지나 신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겨우 익힐 즈음 이 에섹스 출신의 신학생이 왜 날 만나면 항상 ‘꼽쿤’하며 두손을 정중히 모으며 인사하는 지 알았다. 이름이 ‘브렛’인 그 신학생은 자기가 한 말을 내가 알아듣는다고 여겼다.


‘아, 그게 너의 나라 말 아니냐?’


고 물었을 때 아무리 꿰어 맞추려해도 도무지 ‘꼽쿤’하고 비슷하게 들리는 말은 경주의 왕릉을 지칭하는 ‘고분’밖엔 없었다. 좀 강하게 발음해서  ‘꼬뿐’하면 그럴듯도 했다. 건데 웬 꼬뿐? 아니라고 했더니 태국말과 한국말이 비슷하지 않느냐고 했다. 웬걸... 또… 하면서 태국어와 한국어는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영국에 살면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 했었다. 많이는 중국어를 쓴다고 믿었고 적어도 비슷하다고 단정지어버렸다. 브렛은 태국을 좋아하였다. 거의 일년에 한번꼴로 태국으로 휴가를 갔던 브렛은 말끝마다 얼마나 태국이 아름다운지, 태국 사람들이 얼마나 친절한지 얘기했다. 내가 한국인임을 알면서도 태국인이냥 대했다. 특히 태국중에도 푸켓(Phuket)을 항상 얘기했다. 무슨 신학생이 그렇게 여유가 있어 태국까지 몇 주씩 휴가를 다 가는지 이해가 안갔다. 빚을 내서라도 휴가가는 많은 영국인들이지만 신학생은 좀 다를 거라고, 또 달라야 한다고 은근히 심통도 났다. 처음 신학교에 갔을 때 놀란건 거의 모든 신학생이 차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긴 자동차야 대다수가 보유하는 필수품이지만 일주일에 딱 하루 쓸수있는 가톨릭 신학생이 자기 차를  보유하고 있다는게, 그리고 신학교가 허락하는 것도 이상했다. 신학교 뒷 교정에 신학생들의 차가 주르르 일렬로 주차되어 있었다. 그 중에 옛 ‘대우’ 차도 있었다. 가끔 그 대우 차를 타고서 밖을 보면 유리창 끝에 동그란 KS마크가 붙어 있는 것도 보였다. 그러면 창원의 어느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을 가끔 생각했다. 차를 가진 학생들은 일주일 중 하루 외출이 허용되는 토요일에 자기 차를 몰고 횡하니 집에 갔다 오거나 바람쇠러 바깥 나들이를 하곤 했다. 그들과 반대로 난 지역 버스시간표를 방에 모셔두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멀리 태국까지 휴가를 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금수저 신학생일까? 부모가 꽤나 사나보다 생각했다. 하여튼, 그 신학생은 예절 바르고 착했다. 두손 모으며 ‘꼽쿤’하는 것도 날 짖궂게 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인은 나 혼자라 특히 관심을 갖고 친하게 대하려는 착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그 다음 학기에 담당 청소구역으로 신학생전용의 자그마한 부엌과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있는 다이닝 룸을 배정 받았다. 그곳은 교수 신부님은 금지구역이었다. 신학생 자유가 그렇게 주어졌었다. 담당이란 그저 항상 점검하고 깨끗이 해놓아 언제든지 쓸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수시로 정리정돈이 되었나 살펴보고 ‘정석’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청소를 해서 깨끗하게 유지시켜 놓는 것이 나의 책임이었다. 그곳은 브렛이 그동안 담당하였었고 그에게서 청소구역을  물려받은 것이다. 작은 부엌이지만 가끔 신학생들은 자기가 직접 쿠킹하기도 하였고 가끔은 어지럽혀 놓을때도 있었다. 나도 밤기도가 끝나 출출하면 런던에서 사온 라면을 거기서 끓여 먹었다. 가끔 브렛이 라면먹는 날 보았다. 당시의 라면만큼 맛있는 라면은 먹어보지 못했다. 김치 한쪽, 단무지 한쪽없이 먹었던 라면이지만 신학교 뒷숲 어둠을 내다보며 먹었던 라면이었다. 난 브렛에게서 깨끗하게 부엌을 유지하는 법을 거의 한시간 가량 친절하게 전수 받았는데 태국이야기가 거의 반을 차지했다. 왜 나만 보면 태국이 생각나는지 그땐 도무지 이해가 안됐다. 내가 태국인처럼 생겼나, 거울을 보기도 했다.


오전 두 시간의 강의가 끝나면 ‘티 타임(Tea Time)’이 있어 신학생들과 교수님들은 강당에서 차나 커피를 마셨다. 서너명씩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하는데 브렛은  누가 조크라도 하면 깔깔대며 잘도 웃었다. 천성적으로 선한 품성이었던 것 같았다. 에섹스는 대도시 런던의 동쪽 지역이며 북해의 바람으로 사시사철 춥다고 늘 말했다. 그래서 날씨 더운 태국을 좋아했는지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도 그럴것이 마치 한폭의 풍경화를 상상하듯 푸른 바다며, 뜨거운 날씨며, 지천으로 깔려있는 열대의 과일이며, 또 친절한 태국인들의 미소를 덧붙였다. 나는 그게 그렇게 즐겁지만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듣기만했다. 해변가에 드러누워 햇빛을 쬐거나 수영을 하는 휴가는 시간낭비라 여겼다. 한편으론 그저 그렇게 영국인들은 나와 다르구나 느꼈을 뿐이었다.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크루즈 갑판에서 멀리 푸켓이 멀리 보일 때쯤 옛 이야기속의 푸켓이 기억에서 되살아 났다. 저기가 푸켓이구나! 갑자기 착한 브렛이 떠올랐다. 그의 친절이 떠오르고 깔깔대던 선한 성품이 그리고 지천으로 널린 열대의 과일과 금빛 모래사장을 떠올렸다. 바로 저기, 저기가 얘기로만 들었던 푸켓이었다. 크루즈가 완전히 푸켓만으로 들어서자 기억은 더 선명해졌다. 불완전한 발음의  ‘꼽쿤’이란  감사의 말을 태국인들에게 이참에 써볼까? 정말 오랜만이다. 십년도 넘게 브렛을 만나지 못했다. 시간은 그렇게 바쁘게 흘러가 버렸다. 브렛은 지금 에섹스의 어느 성당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늘상 얘기했던 푸켓에 십년도 훨씬 지난 뒤에 내가 이렇게 오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건성으로 들었던 푸켓 이야기가 떠오르다니... 푸켓 사람들은 얼마나 친절할까? 얼마나 친절했기에 그렇게 브렛이 마음에 들어 했을까? 열대과일은 얼마나 맛있을까? 얼마나 맛있었길래 브렛이 영국 수퍼의 과일은 과일도 아니라고 얘기했을까? 그리곤 너희 나라에도 그런 싱싱한 과일도 많지? 하며 순박하게 묻곤 했다. 브렛은 한국의 겨울이 영국보다 더 춥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순진한 브렛은 그렇게 뜨거운 날씨와 열대과일 그리고 쪽빛 바닷가 해변땜에 여름휴가가는 날을 그렇게 손꼽아 기다렸겠지? 날 보며 태국을 바로 기억했던 착한 브렛이 생각나 슬슬 웃음도 스며나왔다. 멀리 보이는 아침햇살의 푸켓은 그리 크지도 높지도 않은 산아래 펼쳐져 있었다. 방콕처럼 높은 빌딩도 가지지도 않았다. 단, 중앙에 우뚝 솟은 보기 흉한 흰 빌딩이 거의 산높이로 서 있었다.


푸켓은 ‘말라카(Malacca)’나 ‘싱가포르’와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가보지 않은 말레이시아의 ‘페낭(Penang)’과도 비슷하다고 했다. ‘멜팅 폿(Melting Pot)’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항상 여러 문화, 여러 종교 그리고 여러 인종들이 몰려 살았다고 한다. 태국인은 불교, 중국인은 불교와 도교, 또 거의 20%를 차이하는 말레이인은 이슬람 교도들이다. 유럽인들 중에는 말라카처럼 포르투갈인들이 맨 먼저 들어왔다고 했다. 중국인들은 말라카처럼 떼지어 살고 있고 심지어 이곳엔 중국어가 직접 영향을 끼친 지역언어인 페라나카(Peranaka)어가 쓰인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중국인들은 말레이시아 중국인들처럼 주석(Tin)광산의 부흥으로 몰려 온 이민후손들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말라카처럼 여기도 좋은 말로 다문화의 지역이지만 사실은 외래의 침략과 영향은 엇비슷했다. 말레이 반도의 서안 ‘안다만’해에 면해있는 푸켓은 유럽의 정치경제 주도권에 따라 푸켓의 주도권도 바뀌었다. 포르투갈인이 먼저 들어왔고, 다음은 네덜란드인들이 그 다음은 영국인들이 밀려 왔다. 프랑스인들도 들어왔는데 우리나라의 병인양요 6년전인 1860년에 프랑스는 이곳 푸켓지역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이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영향을 줄이고자 하는 태국왕 나라이(Narai)의 책략도 가미되었다고 한다. 동남아 이웃 나라들과 다르게 한번도 식민지의 경험을 가지지 않은 자존심의 나라 태국도 이렇게 알게 모르게 서구의 영향은 그들 역사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곳 푸켓의 특이한 점은 이 영민한 태국왕의 정책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파리외방전교회(the Société des Missions Etrangères)’ 회원인 ‘르네 샤르본노(René Charbonneau) 수사를 푸켓의 총독(governor)으로 임명했고 1865년까지 그는 푸켓의 총독으로 재직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썼을 바로 그 당시 이 태국왕은 비슷하지만 다른 정책을 취했다. 이런 지렛대 외교책략이 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걸 막았을까? 아님 교과서에 나온대로 인도와 버마쪽에서 몰려오는 영국 세력과 인도차이나의 프랑스세력 중간지역인 태국은 완충지로 놔두자는 강대국의 밀약 때문이었을까? 동남아의 역사를 모르는 난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하여튼, 선교사들도 상인, 정치인, 또 군인들을 따라 이동하면서 정치경제에도 좋든 싫든 깊숙히 관여했음을 이곳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산같은 크루즈 선에서 유람선 크기의 작은 배로 갈아타야 했다. 크루즈 선이 들어설 바다의 수심이 얕았기 때문이었다. 승객수가 3천명이 넘었기에 정원 50명정도의 작은 배를 타고 푸켓선착장으로 가는 시간도 단체별로 정해졌다. 선착장은 바로 앞 푸켓 해변의 오른쪽에 있었다. 멀리 바다에서도 보였던 중앙에 하얗고 높은 빌딩이 푸켓의 풍경을 망치고 있었다. 긴 선착장을 걸어 지나가 해변가에 도착했다. 선착장 입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택시 택시'를 외치는 사이에 우리 그룹의 이름 팻말을 들고 있는 네명의 가이드가 뜨거운 햇살아래 부채를 연신부치며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갓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었다. 거기서 인원점검을 한 후 우리는 코치(coach) 한 대와 미니 밴(van) 한 대로 나눠 탔다. 코치라고 해야 겨우 35명을 태울 수 있었기에 42명중 나머지는 밴에 올랐다. 가이드는 일정대로 우선 성당으로 향했다. 시내 성당예약하기가 힘들어 푸켓 외곽의 성당으로 예약한 것이다. 길은 멀었다. 성당엔 필리핀 신부님이 일하고 계셨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오자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럼에도 우리 일행을 배웅하려 밖에 나온 신부님이 고마웠다. 단 한시간도 못되게 머물렀는데도 오랜 친구가 떠나듯 아쉬워 했다. 참으로 정도 많은 듯했다. 어색했지만 기념사진을 찍었다. 차를 타고 시내로 다시 들어왔고 오가는 길에 푸켓의 경치를 거의 다 감상할 수 있었다. 해변가 건물엔 전기줄이 무질서하게 치렁치렁 걸려있었다. 들었던대로 외국인들이 어디에고 보였다. 더운 날씨에도 헬멧을 푹 눌러 쓴 모터사이클을 타는 유럽인들도 도로에 많이 보였다.


런던의 여행사 사무실을 지나면 항상 밖에 걸려있던 푸켓 여행상품 광고가 기억났다. 푸켓은 그만큼 인기있는 여행지였고 젊은이들에겐 환상적인 베낭여행지로 꼭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주변에 ‘코(Koh)’라고 접두사처럼  붙인 32개의 아름다운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고 했다. 멀지 않은 곳엔 007 영화 촬영지로 유명하고 거꾸로 세운듯한 '007 (본드) 바위'도 있다고 했다. 많은 리조트와 호텔, 그리고 금빛 모래사장들이 많아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유명 관광지 푸켓은 2004년 ‘복싱데이(The Boxing Day. 12월 26일)’에 일어난 쓰나미로 대부분 시내가 아수라장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였다. 서양인들이 많았기에 그만큼 서구의 뉴스도 이 푸켓에 비중을 많이 뒀다. 이 주변지역에서만 5,300여명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공식 수치상이지 이곳 관광지에서 일하는 불법 노동자들, 특히 버마,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온 서류상 흔적이 없는 이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한참을 더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했다. 그러나 해변가에도, 시내 곳곳에도, 쓰나미 광풍의 흔적은 어디에고 없었다. 외적인 광풍은 말끔히 지워졌지만 이곳 사람들의 가슴에는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특히 가족을 잃은 사람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곳에서 사망한 배우겸 감독인 ‘아텐보로 경(Lord Attenborough)’의 딸과 손주도 기억이 났다.


시내를 둘러보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로 예약된 레스토랑으로 갔다. 부페식이었는데 예상대로 먹고 싶었던 ‘톰얌(Tom Yum)’ 수프와 ‘그린 커리(Green Curry)’도 있었다. 정문에 큰 코끼리 동상이 관광객을 맞이하는 이 레스토랑은 주로 단체 관광객을 상대로 했고 레스토랑 뒤에 보이는 수영장이 딸린 멋진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레스토랑이 아니라 꼭 조용한 수도원 피정집 같았다. 더구나 가꾸지 않은 깊지 않은 계곡이 그 아래에 펼쳐져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서라면 몇일이고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점심뒤엔 시내에서 가까운 불교사원으로 향했다. 수도 방콕에 있는 왕실 사원과는 사이즈로봐서도, 화려함을 비교해서도, 훨씬 못했지만 볼만은 했다. 금색으로 치장한 사원 건물 몇 동이 뜨거운 햇빛을 재반사하며 서 있었다. 거리에는 리어카를 개조해 음료와 기념품 그리고 시원한 코코넛을 파는 곳도 여러군데 있었다. 대낮의 뜨거운  열기에 지쳤는지 사람이 앉아야할 나무 그늘아래 벤치에는 개들이 덜렁 누워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차마 그들과 동석할 수 없어 사진만 몰래 찍었다. 곤히 잠자는 개들을 깨웠다가 무슨 불상사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여기도 길거리에서 자유분방하게 어슬렁거리는 개들과 고양이들은 어디에고 있었다. 곤한 낮잠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했는데 갑자기 귀청이 찢어질 듯 ‘타다닥’하는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연속적으로 들렸다. 모두들 소리나는 쪽을 쳐다봤다. 사원 건물 사이에 폭죽-화약을  집어넣어 터뜨리는, 꼭 피자굽는 가마나 도자기 굽는 가마처럼 생긴 구조물이 있었고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화’와 ‘악’을 내쫒는 의식이라 하였다. 귀신쫒으려는 의식인데 귀신사나웠다. 그런 시끄러운 소리에도 만성이 되었는지 낮잠자는 개들은 벤치에서 눈하나 깜짝않고 잘만 자고 있었다. 귀신은 아닌가 보았다. 몰래 사진 찍었던게 머쓱해졌다. 이 폭죽 의식은 아마 중국인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그들은 마귀를 쫒아낸다고 음력 설날만 되면 밤이고 낮이고 사정없이 폭죽을 터뜨렸다. 귀신 도망가라고... 가는 해의 묵은 귀신들이 다 사라지고 새해의 평화와 안위를 비는 의미의 폭죽소리는 한 두 시간도 아닌 밤새도록 울렸던 이 시끄러운 폭죽의식은 필리핀에서도 경험했고 캄보디아에서도 경험했다. 이제는 중국인들만이 아닌 지역 사람들이 더 많이 폭죽을 터뜨린다고 했다. 사고도 많이 난다고 들었다. 그러나 불교 사원에서 민간 도교와 미신이 섞인 이런 풍습을 아예 폭죽집을 만들어 놓고 소원을 빌며 툭툭 터뜨린다는게 신기했다. 우리나라에서 절에서 연등을 켜듯이, 성당에서 촛불을 켜듯이 이렇게 폭죽을 쾅쾅 터뜨리며 그들은 소원도 통크게 빌었다. 그런 소원의 얘기를 들으며 다시 브렛이 기억났다. 분명 그는 이곳 푸켓의 사원에도 왔으리라. 그리고 이런 장면을 보고 나처럼 신기해 하며 쳐다 보았을 것이다. 정신사나웠음에도 잠시 그가 사제의 직무를 충실히 그리고 행복하게 수행하기를 기원했다. 기원하는 마음이야 어디가 됐던 한마음일 것이다.


겨우 7-8시간의 짧은 푸켓 구경이어서 아쉬움도 많았다. 단체 여행이라 두군데의 필수코스를 들렀는데 하나는 캐슈넛공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석공장겸 기념품 매장이었다. 캐슈넛 공장에선 맛보기용 캐슈넛과 건어물 맛만보고 나왔고 보석매장에선 소파에 앉아 쉬면서 일정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리곤 밤 7까지 크루즈 선안에 들어가야 하기에 혹시 배를 놓칠까 노심초사하며 그것도 약 2시간 전에 그 선착장이 있는 해변가로 미리 왔다. 선착장이 바로 보이는 곳에서 안심하며 두시간의 자유를 만끽하였다. 영국 할배와 나는 커피가 고파서 곧장 해변가의 술집겸 레스토랑에 가서 커피를 주문했다. 더운 날씨라 아이스 커피를 난 주문했는데, 할배는 더위도 아랑곳 않고 뜨거운 홍차를 시켰다. 이 곳 해변은 광안리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점도 많았다. 해변도로를 개방해 차가 붐벼 차소리 나는 것도 비슷하였다. 저 멀리 바다엔 우리가 타고온 크루즈 선이 정박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스 커피를 마시니 속부터 시원해지며 폭죽소리에 정신사나웠던 정신이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커피를 다 마신뒤 커피와 홍차값을 계산하는데 먼저 내겠다고 할배와 실랑이를 하였다. 그런데 지갑을 여니 태국 돈인지, 말레이시아 돈인지, 아님 싱가포르 달러인지, 미국 달러인지 지갑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4박 5일의 크루즈 여행기간 크루즈 안에는 미국 달러가 쓰였고, 하루를 보냈던 말레이시아에선 말레이시아 링깃을 사용했고, 오늘 하루 온 푸켓에선 태국 화폐를, 마지막으로 싱가포르로 돌아가서는 싱가포르 달러를 사용해야 했기에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정리정돈 못하는 내탓이었다. 내 손과 눈이 지갑속에서 혼란을 겪는 사이 할배가 태국 돈을 지불해 버렸다. 항상 정리정돈된 상태로 신학생 부엌을 유지해 놓아 누구든 와서 커피를 마시든 홍차를 마시든 쓸수 있도록 해놓아야 하는 그때 그 당시의 마음자세를 난 잊은 걸까? 브렛에게서 전수받은 청소의 요령과 청결유지의 본령을 잊은 걸일까? 슬며시 다시 그때 그 기억이 스멀거리며 기어나왔다. 대신에 오늘 저녁은 할배와 함께 와인을 마시자. 푸켓만에 어스럼이 내렸다. 해변가를 잠시 걸었다. 기세 등등하던 열기도 서서히 식어 걷기엔 최상의 기분이었다. 나이가 든 것일까? 잠시 생각했다. 십년도 넘는 시간 동안 뭐가 변했을까? 지갑속에 뒤죽박죽 섞여있는 각 나라 지폐들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아직도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선착장 가까운 곳에는 조그만 통통배를 손질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갑자기 모든게 평화스러웠다. 겨우 7-8시간을, 그것도 바쁘게 보낸게 고작인 푸켓에서 평화를 경험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브렛은 혹시 여기서 이런 평화를 경험한 건 아닐까? 그래서 모든게 좋아보이는... 그런 평화의 마음을 여기서 얻었을까? 점심먹었던 그 레스토랑 뒷 정원의 수영장 잔물결처럼 고요한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안다만'으로 해는 지고 있었다.


'꼽쿤'

혼자서 중얼거렸다. 한번도 여기서 이 말을 사용못했다. 그러나 평화가 밀려오자 저절로 이 말이 나왔다. 십년전의 친절도 감사했고 푸켓에 올 수있는 것도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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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켓에서 바라본 바다. 멀리 타고 온 크루즈 선이 보인다.
포구에 나란히 선 배들.
거리는 한가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날씨가 더워 시원한 코코넛 주스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항상 들었다.
몇 개를 오늘 팔았을까?
태국의 사원. 그 옆에 화약을 터뜨리는 아궁이가 있는 작은 건물이 있었다.
미신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었다. 열대의 나무에 원색의 천을 둘러놓아 금방 눈에 띄었다.
거리엔 개들의 천국이었다. 곤히 낮잠자는데 깨울까 노심초사하였다.
캐슈넛 공장 견학. 직접 손으로 일일이 까고 있었다.
아, 맛있는...
육식보다 훨씬 좋은...
레스토랑 뒷편의 수영장.
수영장 아래엔 가파른 계곡이 있었다.
전기줄이 정신 사나웠다. 해변가 건물들.
해변도로는 항상 붐볐다.
선착장.
우릴 기다리던 크루즈 선.
푸켓에 석양이 지고 있었다. 성스러운 하루를 또 마감...
푸켓의 야경. 홍콩이나 싱가폴처럼 화려하지 않아서 좋았다.
크루즈 선을 향해 사진을 찍어대는 관광객들. 무슨 유명인사가 온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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