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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May 31. 2017

싱가포르의 정체성

인공적인, 너무나 인공적인, 그렇지만...

거대한 인공 돔으로 덮고 그 안에 인공폭포을 만들고 식물들을 심었다.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며 돔 안의 식물들을 키우고 있었다. 싱가포르다운 발상이었다.

싱가포르는 갈때마다 계속 달랐다. 계속해서 빌딩은 많아지고, 또 끝도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거리는 계속 깨끗하게 유지시켰다. 영국 사람들이 가끔 빈정대듯 말하는 'Nanny State(이것해라 저것해라 국민을 유아처럼 취급하는)'는 여전하였다. 그러나 범죄율 낮고 교육수준 높은 깨끗한 사회환경을 유지하는데 뭐가 도대체 문제일까? 사실 영국은 여러면에서 배워야 할 것아닌가? 하지만 국가에서 이래라 저래라하면 더 안할려하고 개인 프러이버시 침해라 인식하는 영국에선 힘들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이것때문에 성공했다고 난 본다. 가끔 싱가포르를 보면 생각나는게 옛날옛적에 나왔던 '국가개조'란 말이다. 국가개조는 국민성 개조와 상통한다. 우린 자주 들었다. '조선사람 국민성을 개조해야돼'. '저러니 안돼지, 일본 좀봐...' 어떤면에서 싱가포르는 이 국가개조를 확실하게 했고 또 성공했다. 리콴유의 국가개조 플랜은 엄청 성공을 한 것이다. 하긴 인구 3백만명에서 시작한 국가개조는 성공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인 싱가포르라면? 거기에서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의 모범이 될수 있다. 리콴유는 어째보면 박정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는 런던정경대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서구형 지식을 어릴때부터 익혔다. 싱가포르 중국인으로 다문화인들과 접촉도 많았을 것이다. 그럼 박정희는? 일본 만주사관학교와 일본군인 그리고 독립된 한국의 군인이었다. 그리고 리콴유가 캠브리지에서 배운 법, 즉 논쟁으로 설득하며 독립을 쟁취하였을 때 박정희는 군인으로 혁명을 일으켰다. ‘문과 무’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하여튼, 그들의 머리속에 뭐가 들었는지는 대강 가늠해 볼수있다. 리콴유는 다민족, 중국인과 말레이인 그리고 타밀인까지 아우르는 정책, 즉 '싱가포르인'이라는 자긍심과 정체성을 심어줬다. 겨우 1965년 독립한 도시국가가 이룬 이 정체성은 높이 솟아오른 마천루보다 더 싱가포르를 싱가포르답게 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각 국민이 여유를 가지며 풍요로울수록 싱가포르인이란 정체성은 자라고 자라 깊이 뿌리내렸다. 리콴유는 이를 꿰뚫고 있었다. 이는 이웃 말레이시아와 판이하게 다르다. 먹고 살만하고 '부유'하면 굳이 내가 중국인이니 말레이인이니 따질 필요성은 점차 줄어든다. 그렇다고 중국인 자손이니 인도인 자손이니 하는 생물학적 정체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 창조되고 확립된 싱가포르인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자긍심은 이 '경제적 여유'가 필수적으로 가져다 주는 비가시적 부수효과였다. 이제 중국계 싱가포르인을 만나 정체성을 물으면 '난 싱가포르인입니다'이지 중국인이  아니다. 인도계 싱가포르인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싱가포르인이라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 우리가 말레이시아로부터 피해 온, 육로 출입국을 가보면 이는 금방 들어난다고 어느 싱가포르인이 말했다. 거기엔 싱가포르에 일하러 들어오는 수많은 말레이시아인들로 진을 치고 있다고 하였다. 믿을 수가 없지만 약 5백 5십만 싱가포르 인구에다 또 약 1백 5십만명이라는 외국인 거주자가 있음은 얼마나 이 도시국가의 경제활동이 활발한지 통계로 잘 보여준다. 우리가 갔던 '주롱 조류 공원(Jurong Bird Park)'에는 서양인이 트램(Tram)을 운전하고 있었고 마리나 베이에는 세상의 온 인종들의 집합이었다. 조용한 어촌이었던 싱가포르를 오늘날의 싱가포르로 만든 리콴유가 일으킨 기적이었다.

그러나 이 기적도 잘 살펴보면 그들만의 고난의 역사는 있었다. 분리독립의 염원이 크던 1964년에 일어난 사이 좋지 않은 중국계와 말레이계 간의 유혈충돌은 사망 36여명 부상자 500여명을 내었다. 요즘도 몇 나라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유혈충돌과 사망자 수를 비교하면 별 것아니라고 생각되겠지만, 당시 3백만명의 인구수를 감안하면 분명히 큰 사건이었고 또 인종간 폭동이라 그 분열의 상처는 더 심했을 것이다.

그보다 앞서 2차대전중 일제의 싱가포르 함락은 어떠한가. 영국 런던 주교좌 대성당앞에 있는 '제국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에도 상세히 이 싱가포르 함락에 대한 전시를 해놓고 있다. 난공불락 영국해군기지가 있던 싱가포르가 함락 당하다니... 영국으로선 뼈아픈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무엇보다 친일 시인 노천명의 '싱가포르 함락'이란 시가 생각났다. 그렇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로 읇어대던 '사슴'의 시인이자 안타깝게도 일제를 찬양했으며 이후 형무소 수감생활을 해야했던 그 여류시인... 그 시인의 일제찬양 '싱가포르 함락'이란 시는 싱가포르에 있는 동안 내내 떠올랐다. 그 시에 적힌 '영미 제국주의자'에 대한 시뻘건 분노와 그 압제에 시달리는 큰 눈의 순수한 남양인(동남아인)은 아마 말레이인을 지칭했으리라.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 영미 제국주의자가 무슨 신사냐 라며 시인은 은유도 없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영미 제국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는 동남아인만 보고 왜 일제 압제에 시달리는 자기 동포는 몰라 봤을까? 거기에다, 왜 새파란 동포청년들을 일제의 군인으로 정든 고향 부모를 떠나 이곳 먼 열대까지 가라고 앞장서 선동했을까? 어서 가서 이 검은 피부(시인의 말에 따르면)의 남양인을 해방시키라고? 영미 제국주의에 시달리던 동남아인의 해방을 일제가 해방시켜주리라 희망을 가졌을까? 압제에 시달리던 등잔 아래 동포들의 신음엔 귀를 막았으면서 해방은, 그녀는 도대체 무슨 해방을 노래했을까?


노천명이 그렇게 선동하는 사이, 질풍노도같은 국제정세를 경험하며 세심히 지켜보던 한 똑똑한 중국인 청년은 또다른 생각을 했다. 같은 황인종인 일본이 최고라고 여겼던 영미를 이기다니? 총명한 청년 리콴유에게도 일제의 침략은 충격이었다고 그의 전기에 적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리콴유는 일제의 총칼과 다른 방법으로 제국의 수도로 날아가 그 핵심에서 노우하우(know how)를 배웠다. 그리고 지금의 싱가포르를 이루었다. 진정한 해방은 결코 총칼이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을까? 아님, 당시 영국유학까지 갈 정도의 신분과 경제적 여유(형제들도 캠브리지에서 공부했다)로 영국의 도움까지 받으며 손쉽게 싱가포르를 이끌 수 있었을까? 또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를 전장으로 내몬 노천명은 하늘을 찌를 듯한 현대 싱가포르의 마천루를 보면, 또 키가 커서 슬픈 싱가포르라고 읇을까? 역사는 해석되기 나름이다.


생생한 그 역사를 싱가포르는 박물관 안에 복제해 두고 있었다. 천지개벽한 풍경에, 빌딩숲으로 덮어버린 싱가포르의 몇 안되는 역사적 현장 중에 우리가 내린 '창이(Changi)' 공항도 포함된다. 이 공항 가까운 곳에 일제의 악명 높은 '포로 수용소'가 있었고 지금은 역사교육현장으로서 박물관이 되었다. 우리가 들른 '싱가포르 국립 박물관'에도 일제의 역사는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사진과 비디오로 또 그 당시 음악으로 분위기를 삼엄하게 만들었다. 잠시 우리 위안부 할매들과 청년학도병으로 끌려온 조선청년들, 그리고 징용으로 탄광에서 죽도록 일해야 했던 징용자들을 기억했다. 그리고 노천명도 기억했다. 어찌 그리 미래를 보는 눈이 그리고 사람을 보는 눈이 그렇게도 없었을까? 잠시 울분이 치고 올라왔다. 역사는 그렇게 처참했다. 그러나 역사를 가끔은 끄집어 내어 환기할 필요성은 있다. 더 이상의 비극을 피하려면 말이다. 그래서 역사는 박물관에만 있어야 하는게 아니다. 깨끗한 양복을 입은 젊은 리콴유가 싱가포르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눈물어린 논쟁과 연설도 끊임없이 박물관의 텔레비젼 수상기를 통해 반복되고 있었다. 역사는 돌고 돌며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것이다.

바다와 지정학적 요충지란 이점을 재외하곤 아무것도 없는 싱가포르에선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항상 필요했다. 물까지 이웃 나라에서 끌여와야 하는 싱가포르는 '새로운 창조적 아이디어'를 최고로 친다. 박물관에서 보여준 초창기 경공업국가에서 재빨리 금융과 관광 그리고 교환무역으로 전환한 것도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 안목이 싱가포르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리라. 박물관의 가이드는 일본이 싫었지만 꾹 참고 용서하는 댓가로 차관을 빌렸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전환은 싱가포르의 성공이었다. 지금은 일본보다 훨씬 더 높은 소득을 자랑하고 있고 식민종주국 영국보다도 훨씬 높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는 것같았다. 싱가포르 가이드는 몇번이고 세계에 내놓을 싱가포르의 두 대학교를 선전하였다. 싱가포르 국립대와 난양공대였다. 심지어 영국의 타임즈지나 QS에서 매년 발표하는 세계대학 랭킹을 자랑삼아 얘기하기도 했고 이제는 싱가포르에 세계학생들이 공부하러 온다고 자랑하였다. 웬 싱가포르 관광에 대학교 이름이냐고 생각했지만 이유는 많았다. 이 인구 5백만명이 조금 넘는 나라에서 두개의 대학을 세계상위권에 올려놓는 것도 대단하지만 각종 수치에서 홍콩과 함께 항상 상위권에 오르는 싱가포르의 국가 경쟁력은 얼마나 싱가포르가 앞서가는 나라인지 잘 보여준다. 이런 성공은 성공한 교육정책에서 기인한다. 전에 있던 우리 성당 부속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싱가포르에 직접 견학하러 왔었다. 그만큼 앞서간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만큼, 싱가포르는 싱가포르답게 아이디어를 잘 내는 것같았다. 빌딩도 그냥 높이 지은 빌딩이 아니었다. 특색있는 빌딩이 많았다. 땅의 여유가 없는 싱가포르에서 주거도 우리나라처럼 아파트이다. 그러나 보통 강남이나 잠실에서 보이는 그런 지루한 아파트가 아니었다. 가끔식 왜 저런 지루한 아파트에 비싼돈을 얹어주며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는 아니지만 일률적인 우리나라 아파트완 다르게 많은 싱가포르 아파트는 특색이 있었다. 디자인도 다르고 또 열대지방이라 금방 자라는 나무들과 화초들로 가꾸어 놓아 뭔가 달라 보였다.

싱가포르의 특색있는 아이디어는 시내 곳곳에서도 보였다. 공항길의 분재같은 가로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멋있었고 자랑하는 오키드 가든은 영국인들이 남겨 놓은 곳에다 싱가포르인들은 경쟁하듯 더 잘 만들어 놓았다. 이 가든 중앙 한곳엔 세계 저명인사들의 난초도 푯말과 함께 있었다. 오바마 난초도 있었고 아웅산 수키 여사의 난초도 있었다. 안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난초도 있었고 반기문 전 UN 총장의 난초도 그의 부인 이름과 함께 있었다. 다이애나 공주의 난초도 함께 애처롭게 서있었다. 사실, 이것도 이목을 끌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인공적으로 자연을 꾸며 놓은 '주롱 새 공원(Ju Rong Bird Park)'도 좋았다. 약 2킬로 평방미터의 터에 각종 새들을 모아 놓았다. 그보다 더, 인공적인 곳은 시내 가까운 곳, 'Garden by the Bay'에 있는, 영국의 '이든 프로젝트(Eden Project)'같은, 실내 식물원이었다. 처음 싱가포르에 갔을땐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든 프로젝트'보다 규모는 작은것 같았지만 이 시설이 시내 한복판에 있다는게 신기했고 그래서 그 가치는 더 높았다. 꼭 우주선이 착륙하는 듯한 하늘길(Skyway) 돔은 꼭 거대한 실내 가습기를 장치한듯 습기를 계속해서 뿜어대고 있었다. 거기에다 세계 최고(?) 높이라는 인공폭포가 거대한 양의 물을 콸콸 잘도 토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난리였다. 인공적인 너무나 인공적인 싱가포르였다. 그러나 관광객들 모두 신기해하며 이 인공조형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인공적이지만 싱가포르답게 만들어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현대예술에 뒤지지 않겠다는 야심으로 이 공원엔 영국 예술가 마크 퀸(Marc Quinn. 자기 피를 뽑아 두상을 만든 엽기적인 예술가)'의 10미터 길이의 거대한 아기 조각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 거대하고 육중한 아기가 공중에 떠있는 모습이지만 사실은 앞 팔로 바치고 있는게 신기했다. 제목은 또 거창하게 '행성(Planet)'이었다. 위태로운 행성, 밸런스를 못맞추면 곧 멸망하는 우리 지구에 대한 경종을 알려주는 메시지가 담겼다. 그래서 싱가포르는 이 공원을 생태환경 공원으로 만들었다. 꼭 공항의 관제탑 같은 여러개의 나무 형상의 콘크리트 건축물은 담쟁이 덩굴로 차차 입혀지고 있었다. 또다른 생태환경의 실제상황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 뒤로 이제 싱가포르의 대표적 건축물이 된 '마리나 베이 산즈(Marina Bay Sands) 호텔’이 큰 배를 이고 있었다. 그 배위의 갑판에 공중의 수영장이 있다고 했다. 사진에서도 본 것같았다. 공중에 뜬 아기와 노아의 방주처럼 높은 빌딩 위에 걸린 배는 싱가포르를 시사하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선 보름달마저 마천루 사이에 떠 있었다.

https://brunch.co.kr/@london/8

https://brunch.co.kr/@london/13

https://brunch.co.kr/@london/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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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한 일본작가의 작품이 싱가포르 국립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었다. 독특하고 원색을 사용한데다 비디오 작품이라 관람자들을 환상의 세계로 몰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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