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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May 27. 2017

동서양의 접점 '말라카'를 가다

말레이시아 여행 에세이-말라카

말라카 박물관 앞. 옛 시가지의 중심. 인력거를 모는 인부들로 즐비하다. (다른 사진들은 뒷부분에...)


런던에서 두바이를 거쳐 날아오면서, 장장 16시간여의 비행동안 거의 잠을 못 붙인것 같다. 공중에서의 잠은 여의치 않아서 일까. 쿠알라룸푸르의 호텔에 이르자 겨우 잠좀 자보나 했는데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잠많은 내가 잠을 제대로 못자다니? 그러면서 짜증이 슬슬 올라오고 있었다. 사실 잠이 오지 않는다기보다 머리가 빙 공중에 뜬 기분이었고 제대로 안정이 안되었다. 12시가 넘자 겨우 잠이오나 했는데 쨍쨍 스마트폰이 울렸다. 여긴 런던이 아니고 쿠알라룸푸르다. 정확히 새벽 2시였다. 런던의 병원 호출용 스마트 폰은 응급용이라 링톤(Ring Tone)’을 다르게, 볼륨도 최대로 해놓았기에 쩡쩡 잘도 울렸다. 뭔일이야 이 먼곳까지? 짜증나서 무시할까 하다가 혹시나 하고 내키지 않는 ‘헬로’를 했다. 병원 스위치보드 교환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지구 반대편에서 저쪽에서 들려왔다. 위급한 환자가 있다며 금방 올 수 있느냐고 했다. 아, 병원에서 해방될 날은 언제일까? 이곳 말레이시아에서 영국으로? 농담으로 지금 갈테니 비행기를 곧 보낼 수 있느냐고 했다. 그제사 교환원이 ‘퍼뜩’ 눈치를 챘다. 오늘 원목담당이 누군지 다시한번 로타( Rota)를 살펴보라고 했다. 교환원의 미안하단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다시 잠을 청했지만 잠은 안타깝게 나를 찾아 오질 않았다. 공중 높이 뜬 비행기안의 백그라운드 소음이 빙빙 계속 울렸고 머리도 개운치 않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도 내리누르고 있었다. 혹시 늦게 일어나 순례기간 내내 신자들의 놀림(?)을 받기도 싫었다. 소중한 세시간은 그렇게 흘렀고 열대의 첫날밤은 찜찜하게 지나갔다. 아침을 끄적끄적 먹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제사 카페인의 도움으로 머리가 맑아졌다. 오늘 일정을 그리니 소풍가는 초등생처럼 마음도 설렜다.

오늘은 3-4시간을 달려 ‘말라카(Malacca)’로 성지순례를 간다. 그동안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이렇게 순례까지 올 줄 몰랐다. 야자수 가로수가 운치있게 늘어선 도로를 달리는 코치(coach)의 맨 뒷자리에 앉아 이제 막 부산하게 깨어나 움직이는 쿠알라룸푸르의 아침을 내다 보았다. 단정한 모스크가 현대적 빌딩 사이 곳곳에 서 있었다. 과연 무슬림 국가이구나를 느꼈다.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익히 들었던 모스크의 웅장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독특한 톤의 이슬람 새벽기도소리는 이곳에선 못들었다. 말라카로 가는 도로는 잘 정비되었다. 간간이 멀리 보이는 곳에 우리나라 아파트 단지같은 흉물들이 우두커니 서 있는게 경관을 헤쳤다. 처음 와보는 말레이시아가 겉보기엔 기대보다 훨씬 깨끗했고, 자주 가본 필리핀이나 캄보디아, 또는 이웃 태국보다 더 잘 정리정돈 되어있었다. 처음보는 풍경에 빠졌다가 문득 지금 달려 가는 말라카를 생각했다. ‘프란치스코 사베리오(St Francis Saviour) 성인’이 몇번을 머물러 계셨던 곳, 중국 광동성 샹춘 해안에서 돌아가신 뒤, 가셨던 그 뱃길로 다시 죽음이 되어 돌아 오셨던 그 곳. 그때 사람들은 성인의 유해를 말라카에 약 9개월을 안치했다가 성인의 원대로 더 멀리 인도의 서쪽 해안 고아(Goa)로 옮겨 안치했다고 했다.

말라카는 중국과 인도의 중간구실을 하였다. 붙어있는 두 대륙의 지름길인 육로가 아닌 해로로, 이 거대한 두 문명을 이어주는 구실을 하였다. 당나라 법사 현장이 걸어가던 그 실크로드가 아닌 바다의 실크로드라 불리는 길에 말라카는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말라카는 이질적인 문명이 지나치는 곳,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의 정든 주막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말라카는 고비 사막의 모래에 묻힌 신비한 옛 고대 도시가 아닌 아직도 번창하는 도시였다. 사베리오 성인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도, 수많은 유럽의 선원들과 상선들도 여길 지나쳤을 것이다. 런던에서 만난  고아(Goa)출신 신자들은 항상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을 얘기했다. 고아와 사베리오 성인과는 뗄레야 뗄수도 없는 관계였다. 그리고 그들 말끝마다  빠지지 않았던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고아의 바실리카(Bom Jesus) 이야기가 되살아 났다. 500여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걸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쓰시던 그 십자가도 거기 성당에 있다고 전설처럼 얘기했다. 그 십자가에서 조금씩 신자들이 조각들을 떼내어가 이젠 유리로 보호해 두었다고 했다. 왜 성인은 돌아가신 그 자리, 즉 선교의 최종 목적지인 중국도 아니고, 지나는 이곳 말라카도 아닌, 그 멀리 고아에 묻히길 원하셨을까? 특별한 애정을 이 광대한 인도 대륙 한쪽 콩알만큼 조그만 포르투갈 식민지에 가졌을까? 성인은 스페인 북쪽 나바로-바스크 지방 사람이었음에도 당시 스페인과 더불어 강대국이었던 포르투갈 주둔지를 항상 다니셨다. 이제 막 설립한 예수회에 대한 포르투갈 왕의 특별 간청이기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가는 이 말라카도 포르투갈 사람들이 맨 먼저 도착했다. 지금은 유럽의 변방, 정치도 경제도 모두 쇠락해 늙은 제국으로 북유럽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 관광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이 소국이 어떻게 500년전에는 이 세상 끝까지 왔을까?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아프리카 곳곳에 발자취를 남겼다. 사베리오 성인도 포르투갈 식민지 모잠비크에 머물다 포르투갈령 고아로, 또 이곳 말라카로 오셨다. 아시아에선 이곳 말라카와 고아 외에도, 동 티모르, 인도네시아 암본, 중국 땅 마카오도, 이 소국 탐험가들은 그들의 흔적을 족족 남겼다. 대만은 아예, 포르투갈 말로 향기를 뜻하는 “포모사”란 향기로운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렸다. 김대건 성인도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던가. 일본의 덴뿌라니 빵이니 하는 말도 포르투갈 말이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도 ‘빠옹’이란 포르투갈 말을 ‘빵’으로 발음하며 그대로 쓰니...

말라카 시내로 막 들어가는 코치안의 일행 대부분은 달콤한 아침잠을 자고 있었다. 가끔은 아늑한 호텔 침대보다 코치안에서 더 쉽게 잠이 든다. 그런 우리를 깨우며 가이드는 창밖을 내다 보라고 소리쳤다. 낮게 지어진 보통의 집들이 열대식물 사이사이 서있었다. 옛날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집을 항상 1미터 가량 높게 지었다고 했다.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원래부터 살아온 말레이 주민들은 이 바다와 뗄레야 뗄수없는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바다를 보면서 저 바다 넘어 유럽이란 또다른 대륙의 존재를 상상했을까? 그들 삶의 터전인 바다로부터 건너온 외세의 영향을 받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말라카 시내로 들어서자 코치는 속도를 서서히 줄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나는 시내 풍경과 건물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혜민 스님은 은유로 ‘멈춰야 비로소 보인다’고 하셨을까?  천천히 보이는 거리의 풍경이 뭔가 보통 동아시아의 도시와 달랐다. 우선 유럽식 건물들이 많았다. 건물 색깔도 눈부신 햇살과 더불어 한층 밝고 화사한 원색을 사용하였다.

말라카는 500년에서 6년을 더 보탠 1511년에 포르투갈의 상선이 도착하면서 말라카와 유럽 교류의 시작을 알렸다. 사실 동등한 교류라기 보단 일방적인 관계였다. 당시 주민들이 보기엔 이 포르투갈 범선은 엄청 큰 배였을 것이다. 중국과 인도 두 문명의 바닷길 요충지인 이곳 말라카가 포르투갈 이후에도 여러 서구 열강들의 다툼의 현장이 되었다. 사실 구글 지도를 찾아보면 말레이 반도의 끝자락 싱가포르가  요충지이지만 그때는 어쩐일인지 그보다 북쪽에 있는 이곳을 유럽인들은 선호했다. 아마 지형과 바다가 깊어 항구로 적당 했을지 모를 일이다.오래전 ‘카리브의 해적’ 몇번째 영화에서 홍콩배우 '윤발'씨가 등장한 것도 이곳과 싱가포르를 아우르는 배경이었을 것이다. 먼저 포르투갈이 도착했고 약 150년 뒤엔 역시 나라 사이즈로 봐선 소국인 네덜란드가 들어왔다. 네덜란드는 이보다 더 큰 가까운 인도네시아를 삼키며 거기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그 뒤엔 영국이 들어왔고 일본도 빠질세라 2차대전때 이곳을 점령했다. 육로의 시대는 가고 해로의 시대에 해양강국들 모두 활개를 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많은 외세의 영향으로 말리카는 그 이름마저도 스펠링을 다르게 사용했다. 처음 발견한 자바의 왕자는 Melaka로 포르투갈인은 Malaca로 네들란드인은 Malakka로 표기했으며 마지막으로 영국인이 Malacca로 표기했다. 스펠링이 다른 만큼 그들 흔적도 다양하게 남겨 놓았다. 그러나 스펠링은 다르지만 말라카는 말라카다.

아이러니하게 말라카의 외세영향은 유럽인이 처음은 아니었다. 첫 유럽인인 포르투갈인 보다도 먼저 이곳은 원주민인 말레이인들뿐 아니라 타밀인(인도 남부와 스리랑카 일부),  태국인, 구자라트인, 아랍 상인들이 있었고 또한 중국인 상인과 이민자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의  문화와 종교의 영향력은 유럽인 도착전부터 이곳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가끔씩 논쟁이 되는 말레이시아의 원(?) 주민은 누구냐하는 말레이계와 중국계의 해묵은 논쟁은 이렇게 몇백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이주민들은 전쟁과 기아를 피해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나 무역을 위해 이곳에 거주하며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이었다. 정치경제적 목적으로 들어 온 유럽인들과는 구별이 된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처음 들어온 포르투갈인들은 힌두교인들과 중국인들은 그대로 놔두고 이슬람을 믿는 말레이인들을 많이 죽였다고 하였다.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의 통치를 몇 백년 받은 포르투갈의 악몽이 남아서 일까?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이 완전히 물러간 것이 아메리카 대륙발견의 해인 1492년 경이었으니 포르투갈인이 말라카에 도착한 1511년과는 별 차이가 없고 이슬람지배의 기억은 그들에게 생생했을 것이다. 이렇게 기억은 행동을 유발시킨다.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말라카의 시내에서 멀지 않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당’에 도착했다. 제의실 담당자가 정답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날씨는 찜통같았고 그 찜통열기는 큰 성당안에도 마찬가지였다. 난 거기에다 미사를 위해 ‘장백의’에다 ‘차수블(Chasuble)’까지 겹쳐 입으니 마치 온탕도 아닌 열탕에 들어 온 기분이었다. 벽에 조르륵 붙여놓은 옛날 선풍기 소리가 비행기 안의 소음처럼 들려 가뜩이나 혼미한 정신에 혼란만 가중시켰다. 그 와중에도 이곳 성당에서 만나기로 한 말레이시아 수녀님이 오셨나 걱정되어 성당안을 수시로 내려보았다. 그러나 수녀님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런던에서 오래 전부터 알게 된 수녀님은 이 곳 말라카에 부임하셔서 가톨릭 학교를 운영하셨다. 런던은 수녀님의 동생이 일하고 있어 가끔 다니러 오셨고 그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것도 거의 10년이 다되었다. 걱정이 됐다. 혹시 나의 이멜을 못보셨는지, 혹시 시간을 내가 잘못 말했는지. 이곳까지 와서 수녀님을 못만난다면 낭패일성 싶었다. 다행히 미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고개들어 보니 성당 맨 끝에 수녀님이 미소지며 앉아 계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미사시간을 10시 미사가 아닌 10시 30분이라고 성당관계자가 얘기 하는 바람에 그 시각에 맞춰 오신 것이었다. 하여튼 수녀님을 뵈니 반가웠다.

우리는 시내 가운데, 바다 가까운 언덕위, ‘세인트 폴의 언덕(St Paul’s Hill)’이라 불리는 곳에 서 있는, 옛 네덜란드 통치시절 관사였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 곳으로 갔다. 꼭 베이징의 자금성같은 붉은 색을 입힌 유럽식 건물안에 말라카의 역사를 모아 두었다. 대부분이 이곳을 지배한 통치자들의 유물들이었고 심지어 각국의 군인복장을 실물처럼 복도에 전시해 두었다. 한가지만 뺀다면 중국 이민자와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이것저것 수집해 온 중국자기들이 많았다. 영국의 박물관에서 자주 볼수있는 백색 자기에다 청색 그림을 그린 자기들이었다. 중국의 자기는 이렇게 동서양 박물관에서 빠지지 않았다. 별로 크지 않은 건물 중앙에 첫 유럽인이었던  포르투갈시대때 판 네모진 우물이 중앙에 놓여 있었다. 시간 지체할 이유가 별로 없는 박물관을 슬쩍 슬쩍 훑어보고 박물관 뒷문에 난 길로 사베리오 성인이 묻혔던 성당으로 올라갔다. 성당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아래로 시내가 훤히 보였고 그 너머로 바다도 보였다. 그래서 이 풍수에 꼭 맞는 명당에 관사도 짓고 성당도 지었음을 알수 있었다. 식민자들이나 선교사들은 땅보는 눈은 대단했다는 어느 신부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요지에 성당을 지은 건 한국이나 말라카나 마찬가지였다. 바람 한점 없는 푹푹찌는 날씨였다. 숨이 턱턱 막히는 땅에서 희망은 저 아래 보이는 시원한 바다였다. 그 바다를 통해 사람들은 물자를 교환했고 종교와 사상은 소통되었다. 토템부족 신앙에서 힌두교가 왔고, 중국인을 통해서 불교와 도교가 아랍인을 통해선 이슬람이 전해 왔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을 통해 가톨릭이, 네덜란드인을 통해 프로테스탄트가 그리고 영국인을 통해선 성공회가 들어왔다. 각양각색의 종교만큼 말라카는 인종도 다양하였다.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 그리고 소수지만 ‘유레이시안(Eurasian)’이라 불리는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혼혈인들이 서로 이웃하며 살고 있다 한다. 사실 거리에선 머리에 베일을 쓴 단정한 이슬람 여학생들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이 말레이 남자들인 관광객을 위한 인력거(릭쇼) 운전수들이 이 언덕 아래 박물관 앞 로터리 옆에 진을 치고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록달록 원색을 입힌 인력거 운전석에 비스듬히 누운 말레이 운전자, 그리고 인력거 곳곳에 붙인 앙증맞은 헬로 키티가 웃음짓게 만들었다.

별로 높지 않은 언덕 위 성당으로 올라 가는데 숨이 턱턱 차올랐다. 검은색 사제복을 입은지라 열기를 막바로 흡수하며 날 괴롭혔다. 흰색 사제복을 준비해올 걸 하고 내심 후회하며 나의 게으름을 탓했다. 게으르면 고생한다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겨우 성당 앞에 다다르니 성인의 동상이 바다를 내려다 보며 서 있었다. 저 바다를 통해 산세 험한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서 이역만리 이곳 열대지방까지 온 사베리오 성인을 기억했다. 그것도 거의 500년 전인 1545년이라고 시간을 가늠해 보니 갑자기 이 이역까지 그분을 오시게 만든 신앙이 무엇인지 신비스러웠다. 사베리오 성인은 8월에 이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4월에 인도의 고아 항을 떠났으니 거의 4개월 만에 이곳에 도착하신 것이다.  4개월... 갑자기 4개월과 16시간의 비행시간을 비교했다. 그것도 인도가 아닌 서유럽의 끝, 성인이 출발하신 ‘리스본’ 항보다 더 서쪽, 런던에서 16시간만에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잠도 제대로 못잤는데 그 먼길로 범선을 타고 오신 성인은 과연 어떤 여행이었을까?

성당은 이제 폐허로 남아 있었다. 성당 지붕은 아예 없었고 유럽식 아치형 창과 네모진 입구만은 오롯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문을 통과해 성당안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지붕없는 성당, 이 성당에서 지난 500년 동안 수많은 선교사들이 미사를 올리고 새로운 선교지역으로 떠났을 것이다. 성당은 이제 훌훌 털어버리고 하늘로 향해 속을 다 내보이고 있었다. 선교사의 마음처럼. 그러기에 이 폐허 성당의 이름은 첫 선교사이자 선교사의 모델인 바오로 성인을 따라 ‘세인트 폴 성당(St. Paul’s Church)’이었다. 폐허가 된 성당 제대 뒤편에 철조망 덮개가 보였다. 수녀님 말씀이, 바로 그곳이 사베리오 성인의 유해가 9개월 동안 안장돼 있던 곳이라고 했다. 촘촘한 철조망 사이로 아래를 내려 보았지만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텅빈 무덤안에 뭐가 있을까? 그러나 부활의 희망을 지닌다면 이 텅빈 무덤은 그 분 말씀으로 또 삶의 지혜로 꽉차 있을 것이다.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들으라고 하셨지 않았나? 그러나 500년의 시간은 그렇게 컴컴하게 나와 성인 사이를 막고 있었다. 누군가 던진 동전들이 반짝이며 어둠속에서나마 어렴풋이 보였다. 이곳 사람들은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뜻대로 된다는 아리송한 그러나 그럴듯한 얘기가 전해 내려 온다고 들었다. 사실 동전을 이 무덤에 던지며 소원을 바라는 건, 혹시 뇌물이 아닐까? 만약에 그게 감사의 표시가 아니라면 뇌물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소원들어 달라고 하는, 슬쩍 손에 쥐여주는 뇌물말이다. 뜬금없이 최순실이 떠올랐다. ‘세상은 주고받는 거야.’ ‘돈도 능력이야’. 잠시 머리가 어질했다. 이렇게 혼란의 악마는 언제든지 찾아 온다. 오라고 청해도 오지 않던 잠과는 달리 악마는 초청해야만 온다. 스멀거리는 악을 이겨낼수 있을까? 그러나 이내 생각의 고리를 끊었다.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꼬치꼬치 철학의 논리로 해부한다면, 그래서 던지는 동전마저 미신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너무 자만이고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믿음은 신뢰에서 싹트고, 이런 소원성취는 신뢰를 기초로 한 ‘감사’의 표현이 아닐까? 논리로 어설프게 해석하려는 어리석은 태도는 여기에서도 드러났다. 성인이 나를 깨우치신 것일까?  복음서의 가난한 과부가 수줍게 내민 한닢의 동전은 이 옛 무덤에 떨어진 동전과 뭐가 다를까? 지폐를 동전대신 던진다고 소원성취가 빨리 실현될까? 결국은 이것저것 다 감사의 마음표현 아닐까? 그 복음서의 가난한 과부처럼… 나도 얼마의 가치가 되는지도 모를 말레이시아 링깃 동전을 던졌다. 그것도 두개나. 소원을 빌면서...

성당의 오른편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그늘에 몰려 있었다. 수녀님이 수녀원의 지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보여주셨다. 시간땜에 수녀원 방문을 못하는게 아쉬웠다. 훗날을 기약하며 다시 지름길로 해서 시내로 내려왔다. 옛 부두였는지, 바다에 면해 있는 조그만 강이 보였다. 옛날에는 유럽선원들로 북적했을 터였다. 그리고 성벽이 폐허로 남아있는 그 강변공원을 걸었다. 강 건너편엔 레스토랑과 펍이 밀집해 있었다. 조금 더 가니 검은색 옛 포르투갈 범선이 보였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전시 오픈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배는 당시의 배는 아니었고 모형이었다. 런던 그리니치의 '커티 사악'보다 조금 더 높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사실 배의 바로 밑둥에서 올려다 보기에 배의 갑판 높이에서 본 커티 사악에 비해 높아보이지 사실은 비슷한 규모였다. 잠시 몇 백년전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 황금을 찾아 온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들을 생각했다. 내가 던진 동정 두닢을 생각했다. 아까웠다.

하루에 이 오래된 도시,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도시를 구경한다는게 무리였다. 열대의 열기에 몸은 쉽게 지치고 피곤했다. 나이 탓만도 아니었다. 에너지를 보충하는게 급선무였다. 런던에 살면서 만난 많은 중국계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추천한 첸돌(Chendol)은 꼭 먹어보려했다. 첸돌은 여기 말라카에서  유명하다고 했다. 수녀님께 간청했다. ‘첸돌 집에 데려다 주세요, 제발.’ 햇빛에 붉게 달아 오른 얼굴에다 힘없는 소리로 애원(?)했다. 수녀님이 가까운 거리의 강에 면해있는 노점상으로 나를 데려갔다. 생각보다 양이 적은 첸돌을 먹었다. 하나로 양이 차진 않았다. 하나 더 먹었다. 첸돌은 우리나라 팥빙수와 비슷하였다. 다르다면 이것저것 많이 들어갔다. 찬 음식이 별 맞지않는 나였지만 이 더운 날씨엔 따지고 뭐고 할것 없었다. 필리핀의 '할로 할로(Halo Halo)'보다는 양이나 질에서 부족했지만 시원한 얼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값은 충분히 했다. 런던에서 먹었던 말레이시아 팥빙수, ‘아이스 까창(Ice Kachang)’과 비슷했다. 첸돌 두개로, 얼음배를 채우다보니 정신이 제대로 돌아왔다. 수녀님이 깔깔대며 웃으셨다. 거리 사진도 몇장 더 찍었다.  말라카는 이렇게 시원하게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계속)


옛 네덜란드 관공서.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네덜란드 풍 건물.
박물관 내부. 이곳에 온 나라 군인들의 모형이 많았다. 일본군까지.
유럽인들의 말라카 생활상을 전시.
박물관 뜰. 옛 인력거와 포르투갈 인들이 파놓은 우물도 있었다.
언덕위의 성당.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이 머물렀고 그의 유해가 여기 묻혔다.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 동상. 이곳에서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폐허가 된 옛 성당.
사베리오 성인의 유해를 9개월간 묻었던 곳.
성당 외부 통로.
성당 밖.
바다와 가까운 쉴수 있는 음료매장.
네덜란드 식 풍차가 보인다.
바다에 면한 작은 공원.
인력거가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유럽인 최초로 말라카에 들어온 포르투갈인들의 범선. 모형이다. 내부는 전시실로 만들어 놓았다.
인력거들. 색깔이?그리고 헬로 키티 장식을?
말라카의 여러 성당 중 한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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