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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May 28. 2017

쿠알라룸푸르의 차이나타운...

말레이시아 여행 에세이-쿠알라룸푸르


중국인들은 세상 어디에고 있었다. 선사시대때도, 신라시대때도, 또 빅토리아 시대때도... 유럽 곳곳, 아시아 곳곳에도, 중남미의 소국 코스타리카에도 차이나타운은 있었다. 나이지리아 신부님은 나이지리아에도 중국인이 많다고 하였고 우간다 신부님은 우간다에도 있다고 하였다. 쿠바에서도 중국인 이민자들 얘기를 전해 들었고 아프리카 대륙 동쪽의 콩알만한 섬나라 모리셔스에서 영국으로 온 중국계들을 심심치 않게 런던에서 만날 수 있었다. 어떻게 그 먼곳까지 갔을까? 말레이시아에선 이웃 필리핀과 같이 중국인 이민의 역사는 길다고 들었다.


쿠알라룸푸르의 차이나타운인 ‘잘란 페탈링( 페탈링 거리. Jalan Petaling)’이라 쓰여진 큰 중국식 붉은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난 런던의 차이나타운(Chinatown) 붉은 개선문을 기억했다. 곧 마닐라의 '끼아뽀(Quiapo)' 구역 차이나타운도 기억났다. 키아뽀만큼 무질서하고 비위생적이고 냄새 독하고 복잡한 동네가 세상 어디있을까? 정신사나왔던 끼아뽀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면서 부산 자갈치 건어물 시장의 마른 생선 냄새도 났다. 그러나 이곳 쿠알라룸푸르의 차이나타운은 외양부터 달라 보였다. 가이드가 일러준 말, 즉 이곳 물건은 거의 100%가 가짜라고 한말을 다시 떠올렸다. 남대문 시장의 어지러운 분위기가 기억났다. 여기선 구찌도 오메가도 살수 있다고 했다. 가격흥정은 기본이라고 일러주었다. 살 물건이 없는 나로선 흥미가 떨어졌다. 거리는 한산했다. 그러나 곧 오늘이 일요일 아침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차이나타운은 차이나타운 이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자 서서히 복잡해지고 어질해지기 시작했다. 먹음직한 중국 음식을 파는 간이 식당이며 길거리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중국인 아침의 필수인 백숙같은 ‘콩지(Cong-gee)’를 가족과 단란하게 먹는 사람들도 보였다. 길거리의 노점상들도 이것저것 많은 걸 팔고있었다. 미관상으론 좋지 않지만 편하고 정겨웠다. 호떡같은 걸 팔기도 하고 아예 웍(Wok)을 길거리에 내놓고 튀김을 튀기는 곳도 있었다. 이렇게 차이나타운은 내 모든 시장(market)의 기억들을 끌어오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인구중 약 25%를 차지하는 중국계들은 말레이시아의 경제적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역사가 긴 중국 이민자들은 외국에 살아 신상이 항상 불안하고 언제 그 나라의 정치상황이나 사회상황이 바뀔지 몰라 그들은 현금과 귀금속만 선호했다는 이야기는 말레이시아에서도 낭설이 아니라고 가이드는 말 했다. 사실 그들은 이민자가 아닌 말레이시아 시민들이다. 그것도 약 25%를 차지하니 싱가포르를 뺀 다른 동남아 국가에 비해 그 비율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항상 외국인으로 살아야 하는 그들의 살아남는 방편은 언제 무슨일이 일어나면 급히 돈되는 것만 챙겨 도망가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현금과 귀금속을 선호할 뿐이라고, 어느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한 말이 문득 기억났다. 구약성서에서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때 선 채로 쓴 음식을 먹었던 사실을 기념하는 ‘빠스카’ 축제가 상황도 의미도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가? 세계 역사에서 유대인 이민과 상술 그리고 중국인 이민과 상술을 비교하는 책도 많았다. 그들은 베게속에 현금을 다발로 감추어 놓는다는 속설도 기억났다. 결코 ‘Settle Down’못하는 이민생활이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중국인들 ‘테이크어웨이(Takeaway)’도 거의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다. 카드 안 받느냐고 하면 친절하게 ATM기계를 소개해준다. 무례하기로 손꼽히는 런던 차이나타운의 ‘왕케이’ 레스토랑도 항상 '현금'만 받는다. 레스토랑 바깥벽에 큼지막하게 그리고 메뉴에 또렷하게 손글씨로 ‘Cash Only’라고 써있었다. 현금 좋아하는 중국인들이란 수식어가 붙을 만도 했다. 혹자는 세금회피를 언지시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 말레이시아 중국인들과 같이 몇백년을 살아도 아직 중국계로 불려야하고, 이것저것 차별의 생활을 견뎌야 하는 그들이었기에 그들은 더 강해지지 않았을까? 한번은 중국계 말레이시아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은 중국인으로 불리길 원하느냐? 아님 말레이시아인으로 불리길 원하느냐? 대답은 ‘예스’와 ‘노’로 돌아오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소개되고 다르게 불려지기에 그들의 정체성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동서남북 네 갈래로 나있는 차이나타운의 중앙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중국인들은 별로 없고 다른 아시아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붐비고 있었다. 복잡한 이곳에서 상술을 익히고 부자가 된 중국인들은 이곳을 떠나 부촌으로 옮기거나 호주나 뉴질랜드 심지어 영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오른쪽 골목을 뒤집고 들어가자 갑자기 웅성웅성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겠구나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이드가 한 말대로 거기엔 중국인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네팔인, 파키스탄인, 인도네시아인, 인도인 등등... 말레이시아는 우리보다 소득은 낮아도 이런 다민족 사회구성은 우리보다 훨씬 오래부터 있었다. 사실 지금은 더할 것이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관광청의 광고 문구도 ‘진짜 아시아(Truly Asia)’라고 선전했을까? 그러나 여기 대부분의 노점상들은 불법이라고 누군가가 속삭였다. 소득높은 우리보다 외국인들은 더 많았다. 사실 유럽인이나 미국인들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눈에 띄었다. 그 좁은 골목엔 없는게 없었다. 어찌보면 남대문시장 같기도 했다. 대부분 다 노점상들이었다. 혹시 우리나라처럼 ‘자리세’가 있을까 궁금했다. 구식 핸드폰을 모아서 파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기들 옷을 파는 노점상도 있었다. 관광객들이 많아 가방을 모아놓고 파는 곳도 보였다. 거의 반정도 노점상은 중고물품 이었다. 오래된 삼성 핸드폰도 있었다. 여기엔 사람과 사람이 부딪혀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 거기에다 온갖 언어들이 난무했다. 여기가 무너진 바벨탑 뒤 생긴 언어의 혼란지로 여겨졌다. 갑자기 이런곳에 많이 잠복해 있는 소매치기가 걱정되어 뒤에 맨 가방을 슬며시 앞으로 옮겼다. 하기야 뒤에 진 가방을 다 뺏기더라도 걱정될건 없었다. 여권과 티켓은 안전하게 코치안에 있었고 지갑에 든 돈도 딱 용돈만큼만 있었다. 다시 가방을 뒤에 매고 다른 골목을 들어섰다. 거기엔 온통 먹자판이었다. 옛 신림동 떡볶기 골목처럼 옹기종기 작은 노점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비가 내려 바닥은 질퍽질퍽했다. 정비되기 전의 자갈치 시장과 같았다. 결코 위생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여기엔 중국인들이 보다 많았다. 물국수가 먹고 싶었지만 아침먹은지 얼마되지 않아 참기로 했다.

먹고싶은 것은 여기에 다 있는 것같았다. 일요일 아침에 여기 온걸 원망했다. ‘호키엔 국수(Hokkien mee. 중국 복건성 국수),’ 바베큐 생선인 ‘이켄 바카르(Ikan bakar),’ 아삼 락사(asam laksa)와 카레 국수(curry noodles)도 지천에 널려 있었다. 심지어 족발같은 것도 조그만 유리전시장에 담아서 길거리에서 직접 팔고 있었다. 자갈치 시장 할매들이 바닥에 앉아 생선을 파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주인장은 도끼보다도 더 넓은 중국식 주방용 칼을 가볍게 휘두르며 손님이 주문한 고기를 잘게 썰고 있었다. 갑자기 옛날 3류 홍콩영화 소림사 주방장이 기억났다. 크고 무거운 칼을 잘도 사용하였다. 일본 스시를 날카로운 사시미 칼로 떠내는 장인들을 소개하지만 중국인들의 네모난 칼질도 장인으로 소개되었으면 하고 들여다 보는데 고기를 주문한 중년의 중국인이 날보고 어디에서 왔느냐고 대뜸 물었다. 한국이라하자 곧 서울에 가봤다고 하고 휴전선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얘기와 김정남 독살 얘기가 절로 나왔다. 아침부터 찜찜했지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번호까지 주면서 연락하라고 까지 했다. 참으로 화통하고 직설적이었다. 런던에 살면서 중국계를 만나면 어딘가 한국과 일본을 형제 아님 사촌으로 여기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김정남 얘기를 아침부터… 겨우 빠져나왔지만 옷에 베인 음식냄새는 한동안 빠지질 않았다. 그러나 결코 싫지 않았다. 거리 한 구석에 우리 일행 몇몇이 모여 웅성이고 있었다. 어느 노점상 앞이었다. 뭐하나 봤더니 노점상 유리전시장 앞에 닥터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수상이 이 노점상에 들러 특별 주스를 마시고 갔다는 신문기사 쪽을 오려 붙여 전시해 놓고 있었다. 유명하구나. 사먹어보자. 나도 솔깃하고 일행도 솔깃했다.상술은 어디에고 똑같았다.


이곳 말레이시아의 중국계(25%)는 말레이계(55% 이상)다음으로 인구 수에서 많다. 말레이 원주민 부족이 약 12%니 그들과 합하면 비율은 더 올라간다. 중국계가 다른 동남아 국가에 비해 높고 상권도 쥐고있어 말레이계의 견제와 질투도 심하다고 했다. 이 복잡한 차이나타운에서 살아남아 성공한 중국계는 더 큰 곳에 투자하고 말레이시아의 경제를 휘어 잡았다고 한다. 이는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별 다르지 않다. 문제는 중국계의 비율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 말레이시아는 영국 식민정부의 교묘한 정책도 인종간 알력을 부채질 했다는 ‘뒷이야기’도 무시할 수 없다.


영국인이 아닌, 영국에 사는 과거 영국 식민지였던 영연방 국가 사람들을 만나면 받게 되는, 두가지 상반된 인상이 있다. 첫째는 영국 식민지 였다는 걸 무슨 자랑(?)으로 여기고 또 영어를 쓴다는 자부심이었다. 영어 못하는 한국인 일본인을 아주 불쌍하게 보기도 한다. 우리식 멘탈리티(mentality)론 전혀 이해가 안되지만 이는 인도인에게도 나이지리아인에게도 들었다, 두번째는 그와 상반된 'Divide and Rule(분열과 지배)' 이라는 두단어로 요약되는 영국식민정책을 그들은 얘기했다. 얼마나 효과적이고 영리하게 영국인들이 통치했는지 이 두 단어로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 식민주의자는 식민지에서 서로 다른 두 민족끼리의 알력과 경쟁을 먼저 파악한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이용해 뒤에서 조종하며 계속 서로 이간질시키며 싸우게 만든다. 한쪽이 약해지면 그쪽을 살짝 몰래 도와준다. 서로 싸우다 보면 자연히 힘을 소모하게되며 그때 적시에 '지배'를 하면 효과적이고 별 힘들이지 않고 통치할 수 있으며 또한 통치의 ‘이유와 적법성’도 확인시킨다. ‘너희들은 계속 싸우고 위험하니 너희는 안돼. 우리의 통치가 너희들은 필요해…’ 그래서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말레이계와 중국계의 알력을 이용하고 서로 피나게 싸우게 했다. 뒤로는 상술에 밝은 중국인들을 도와 비즈네스를 하고 인구수에서 월등한 말레이계에겐 정치적 파워를 알게 모르게 이전시켰다. 이는 식민지 시절 뿐 아니라 아직까지 해결 못하는 말레이시아의 문제다. 이런 ‘분열과 지배’는 남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고 인도와 파키스탄도 마찬가지며, 이스라엘과 아랍 각국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남북한이 싸우면 힘이 약해지고 누가 그 이득을 챙길까? 한번 생각해 봄직하다.) 하여튼, 닥터 마하티르(인도인의 피가 흐른다고 한다.)는 이를 개선하려고 특히 교육과 비즈네스에 아주 약한 말레이계 무슬림에게는 엄청난 혜택을 주었다. 영국의 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외국인 학생수에서 말레이시아는 두번째였다. 첫째는 그리스 학생들이었는데 그들은 유럽연합 학생들이라 거의 무료로 공부했지만(그래서 빈둥빈둥하는 걸 많이 봤다.) 말레이시아는 외국인으로 비싼 등록금을 내야했다. 그럼에도 일본이나 한국 심지어는 홍콩보다도 학생숫자는 더 많았다. 그때가 20년도 전이다. 문제는 말레이계 학생들은 영국  유학을 정부의 장학금으로 온다는 것이었고 중국계는 자기 사비로 비싼 영국의 대학 등록금을 댄다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중국계 학생이 말레이계 학생보다 유학 온 숫자가 많다고 내가 만난 말레이시안 유학생은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경제적 격차가 말레이계와 중국계 사이에 차이가 나는지 알수 있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정부는 공공기관뿐 아니라 일반 회사에도 말레이계를 꼭 채용하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또(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대기업의 임원수에도 일정비율의 말레이계가 꼭 포함되어야 함을 명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계의 비율이 점차 정치 경제사회 요직에서 줄어든다고 우려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허울 좋게 평등의 원칙을 강조하지만 중국계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사회 경제적으로 소수로 내모는 명백한 차별 정책이었다. 런던에서 만난 많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은 말레이시아에는 '희망'이 없다고 하였다. 한국과 비교해서도 한때는 비슷한 소득의 국가였는데 차차 떨어져 지금은 두배 이상의 격차가 벌어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중국계는 자녀들을 서구의 대학으로 보내 거기에 정착하도록 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계 인구는 점차 줄어든다고 하며 이는 말레이시아의 미래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하였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나라임에도 속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 가이드는 이런 사실을 곧이 곧대로 자세히 들려 주었다. 그녀가 첫번째로 우리를 만나 공항에서 호텔로 오는 중에 한 말이 어느 인종분류에 자기가 속할 것 같냐고 물은 것이었다. 그녀의 이마 중앙에 새빨간 점을 찍은 걸 봐서 힌두교인이라 여겨 졌으며 또 인도인처럼 보여다. 그러나 피부는 밝은 중국계로 보였다. 영국에선 이런 자세한 신체묘사는 무례하지만 여기선 가이드 자신이 문제를 내고 우리에게 알아맞춰보라고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중국계이지만 아버지는 인도 남쪽 타밀(Tamil)계라 종교와 문화 모두 아버지를 따른다고 했다. 그래서 인도 타밀식 문화와 언어(타밀어)를 영어와 함께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며 또 남편도 인도 타밀계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중국계이지만 중국문화와 영향은 없다고 말하며 그녀의 어머니 개인사를 덧붙여 들려주었다. 그녀 어머니의 시대(1940-50년대?) 말레이시아  중국인들은 우리나라처럼 남아선호 사상이 강해서 여자아이를 여럿이 낳으면 몰래 죽인다(?)는 것이었다. 믿기 어렵지만 남존여비 사상의 옛날 우리나라를 떠올렸다. 그녀 어머니는 딸만 넷인 가정에서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안타깝게도 죽을 운명이었다. 다행히 그 병원 간호사인 인도인 여자분이 이왕 죽일 거면 자기가 데려다 키우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 중국인 여자아기는 인도인 간호사 엄마의 가정에서 타밀어를 모어로 배우며 힌두교인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인도 타밀계 남편을 중매로 만나 결혼해 자녀들을 낳았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얼마나 자기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헌신했는지를 가이드는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지금은 자기 아버지와는 말도 안하는 사이가 됐다고 자기의 개인이야기를 속속들이 다 해주었다. 우리 일행은 왜 그런지 꼭 텔레비젼 연속극 다음회를 기대하듯 궁금해했다. 더...더. 다음이 어떻게 될까? 밖으로 지나가는 말레이시아의 풍경 대신에 가이드의 가족사에 열중했다. 가이드가 자기 아버지와  연락을 끊은 것은 중국인 어머니가 열심히 해서 모은 재산을 펑펑쓰며 새로 만난 여자와 자녀들 상의도 않고 결혼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기억이 뚜렷한 자녀들에게 계모와의 관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그것이려니와 이 계모가 재산을 탐내고 있다고 가이드는 대뜸 의심했다. 갑자기 뺑덕어미가 생각났다. 그렇구나. 가족이든 사회든 항상 돈과 연관이 되었다. 경제력없는 인도계 아버지를 대신해 중국계 어머니가 열심히 해서 모은 재산을 아버지가 계모와 펑펑 써 대는 걸,... 더구나 나중에 자녀들이 유산을 적게 물려받을 걸 이들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가이드 가족의 예가 잘 보여주듯,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국가이다. 어디가도 여러 인종을 볼수 있었다. 호텔에도 말레이계, 인도계, 중국계가 다 섞여 일하고 있었고 또 새로 이민 온 인도네시아나 무슬림인 민다나오 출신 필리핀 사람들도 엄청 많았다. 가이드는 쿠알라룸푸르의 약 20%는 불법이민자 일거라고 했다. 다민족 말레이시아라 음식도 퓨전이고 런던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는 이 퓨젼 음식은 여기 본고장에서 제대로 구경하고 맛볼수 있었다. ‘사테이’는 물론이고 ‘락사’도 맛있었다. 말레이시아는 이런 면에서 정말 퓨전 국가였다. 난 말레이시아가 이 퓨젼임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이는 말레이시아의 과거였고 미래여야만 한다고 믿는다. 몇년전에 발생한 무슬림 말레이시아 정부에서 무슬림외에는 신(God)을 ‘알라’로 부를 수 없다는 말도 안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해서 말썽이 되었다. 이런 전근대적인 일은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서 적법성을 가장하고 나온다. 쿠알라룸푸르의 시내를 통과하는데 보이는 현대적인 모스크들은 말레이시아가 이슬람 국가로만 이미지를 가꾸는 것같은 인상이었다. 가이드는 덧붙여 모든 말레이 무슬림은 사우디의 메카로 성지순례를 가면 일정한 금액의 정부 보조금을 지급받는다고 한다. 영국으로 유학도 보내고 성지순례가는데 보조금도 정부에서 지급하니 참으로 좋은 나라일성 싶었다. 하지만 무슬림이 아닌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오랜 전통을 가진 다인종, 다문화의 말레이시아가 그 전통을 발전못시키고 있는 것같아 걱정스러웠다. 그 이유는 이웃 소국 싱가포르를 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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