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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Jul 02.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2

@Khaosan Road, Bangkok, Thailand.

어제 잠을 좀 설쳤다. 몸이 바로 적응한 줄 알았더니 아닌가 보다. 2시간이지만 시차의 차이를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방에 와이파이가 터진다는 것도 숙면에 절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7시쯤 일어나서 간단히 세수를 한다. 뭐 여행 와서 제대로 세수할 거 있나. 그냥 물만 살짝 끼얹는다. 여자친구가 로션과 선크림 등등을 챙겨줬지만 이거 쓸릴 이 있을까. 넣을 때는 나도 이번에는 제대로 바르고  다녀봐야지,라는 다짐을 했었지만 역시 현장에 도착하니 그 생각은 마음 깊숙한 금고에 들어간지 오래다.

여기 조식이 유명하다는 얘기를 들은 듯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1층으로 내려간다. 예전에 꼬창에서 머물렀던 리조트에 비하면 택도 없을 정도지만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해 보인다. (꼬창은 비쌌다...)

그런데 1인석으로 되어 있지 않은지라 자리가 없다. 모두 한 명씩 앉아서 먹고 있다. 여행에서의 첫 번째 합석이 필요한 순간. 스윽 스캔해보니 혼자 먹고 있는 서양형님 하나와 누님 하나가 눈에 띈다.


바람피지 말라는 여친의 고함이 귀에 맴돌며 형님 책상으로 간다. 보고 있나 노여사! 의리를 지키는 이 멋진 모습을! 앉아도 되냐고 물어보니 앉으라고 한다. 사실 앉지 말라고 하면 이상한 거긴 하다. 4명 자리에 혼자 앉아있는 거니.


빵을 토스트기에 넣고, 계란, 밥, 닭수프, 야채 샐러드 그리고 커피를 그릇에 담고 자리에 앉는다. 뒤늦게 토스트가 생각나서 후다닥 튕겨나가서 자리로 가지고 온다. 왠지 남자 둘이 먹는데 인사라도 해야 할거 같아서 용기 내서 말을 걸어본다.



"Good morning."


"Good morning."


"..."



이 아저씨 나한테 관심 없구나. 한국의 여자 여행자들은 그리 인기가 많다는 데 역시 동양 남자는 어디 내놔도 아무도 안 데려간다. 여친의 걱정이 얼마나 부질없었던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내가 좋아하고 여친이 갖다 버리라고 그리  닦달하던 옆구리 터진 후드티를 입어서 그런가? 에이 모르겠다. 나도 귀찮은데 잘됐다.


음식은 사실 엄청 맛있다고는 못하겠다. 개인적으로는 여행 다닐 때는 그 나라의 향이 깊이 스며있는 음식을 선호한다. 인도에서는 소가 핥고 지나간 반죽으로 만든 짜빠티를 즐겼었고 베트남에서도 길거리에서 파는 고수 듬뿍 들어간 쌀국수가 가장 맛있었다. 여기는 서양인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 그런지 뭔가 아메리칸틱 하다. 근데 사실 서양인 중에 미국인은 없어 보이고 다 북유럽 느낌이 나는 훈남 훈녀들이다. 그러니 말 걸고  팽당했지...


어제 굶은 것을 만회하듯 게걸스럽게 먹는데 옆에 형님이 일어나더니 시리얼을 타 온다. 헐. 시리얼을 놓치다니. 후딱 가서 나도 한 그릇 타서 가지고 온다. 근데 한 숫갈 떠서 입에 넣으니 이미 배가 불러온다. 그래도 다 먹을 수 있다. 공짜 밥은 언제나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쑤셔 넣어야 한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좀 즐기다가 오늘 밤 숙소 예약이 안되어 있다는 것을 급 깨닫는다. (이걸 급 깨닫다니...) 아고다에 들어가서 이 숙소를 찾아보니 450바트로 나온다. 어제는 350바트였던거 같은데. 잘못 본 건지 오른 건지 모르겠다. 이왕 줄 거면 커미션 떼고 그러느니 그냥 현금으로 주면서 네고도 할겸 프런트에 한번 물어본다.



"550 바트, 죽어도 못 깎아요."



뭐지? 조금 미안하지만 아고다를 보여주며 그러면 난 여기로 예약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해본다. 그랬더니 거기는 뭐 안 들어간 게 있다며 원하면 그러라고 한다. 이거 진상 고객 되긴 싫지만 사실 눈 앞에 이리 차이 나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나. 그래서 양해를 구하고 그쪽 결제로 들어가본다.

막상 결제를 하러 들어가니 수수료, 세금이 붙어서 528바트가 된다. 에잇, 그러면 그렇지. 근데 이틀 예약으로 해보니 하루에 400바트다. 아 그냥 어제 이틀 예약을 했어야 했다. 뭐 여기서 돌아다니면서 숙소를 찾을 거라고 욕심을 부렸는지, 다 부질없다. 사실 여기 가격이 도미토리에 비해서 비싸긴 하지만 꽤나 괜찮다.


일단 생각을 좀 해보기로 하고 방으로 올라간다. 아 5층... 뭐 금방이다. 사실 배에 신호도 살살 와서 처리를 해야 해서 자리를 떠야 하기도 했다. 여행 다닐 때 오전에 해우소에서 근심을 털어버리고 하루를 시작하면 얼마나 상쾌한지 다녀본 사람들은 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 이 세가지만 잘되면 여행은 행복하다.


거울을 보니 수염이 좀 자랐다. 이번 여행에서의 숨은 미션은 수염 기르기이다. 깔끔함을 유지해야 하는 서울에서는 한번도 수염을 제대로 길러본 적이 없다. 사실 그리고 기르면 뭔가 '내시  수염'처럼 안 예쁘게  자라기도한다. 하지만! 여행지니 한 달을 한번 내버려두어 보려고 한다. 차이기는 싫으니까 상황 봐서 한국 가기 전에는 당연히 정리를 해야겠지만.


밥 먹고 올라와서 좀 쉬다가 고민을 해본다. 오늘 하루를 여기 더 있을까, 카오산으로 갈서 잘까, 아님 근처 숙소를 좀 돌아볼까. 한동안 누워서 밍그적 거리다가 일단 12시 체크아웃 전에 근처를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어제 들어왔던  골목부터 한번 스윽 다녀본다. 어제는 으슥해서 조금 무서웠던 골목이 사실 낮에 보니 그냥 사람 사는 곳이다. 생각해보면 서울에도 이 정도의 으슥하고 무서운 곳은 많다. 오죽하면 지하철에서 여지들을 집까지 안내하는 공무원도 있을까 싶다. 그늘은 그래도 조금 시원한데 벗어나면 참 덥다.


좀 다녀보니 지도가 이제 완전히 이해가 된다. 삼센 큰 도로가 있고 그 가지로 삼센소이라고 해서 여러 도로가 나와있다.  그중에 난 6번 길에 있는 숙소를 찾아간 거다. 그러고 보면 지번주소보다 길을 기반으로 하는 주소가 직관적이긴 하다. 아파트 단위로 움직이는 한국에서는 정말 이해하기 쉽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두개 게스트하우스를 발견한다. 지금 있는 숙소와는 다르게 바깥에 히피스러운 사람들이 앉아서 낮잠도 자고 책도 보고 차도 마시고 있다. 사실 이런 느낌을 원했었다. 두개가 붙어있는 거 보니 일종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어 있나 보다.

오른쪽에 있는 3HOWw 호스텔을 먼저 들어가본다. 근데 이름이 이게 뭐지. 발음은 어찌 하는겨. 혼성 도미토리 가격을 물어보니 350바트란다. 오, 지금 있는 숙소에서 200바트가 세이브된다. 방은 지금 청소 중이라 못 보고 옆에 Bewel 호스텔을 가본다.

여긴 370바트다. 근데 뭔가 시설이 조금 더 아늑하다. 2층에는 서양 언니들이 범벡(?)에 기대 잠들어 있다. 20바트가 비싼 만큼 값어치가 있는 듯하기도 하다. 근데 사실 오늘 저녁만 자고 내일 오전에 공항으로 가서 치앙마이로 떠나야 하는 입장인지라 뭐가 중요하나 싶다. 저녁에 테라스에서 맥주 한 잔 먹기에는 좋아 보인다.


두 군데 다 아고다 검색을 해보니 현장 구매가 가격이 동일하거나 더 싸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지금 있는 곳과는 다르게 현저하게 여행자 느낌이 난다. 그래, 옮기자. 방에 그냥 있지 않고 나오길 잘했다.

우리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길 한복판에 커다란 이구아나와 마주친다. 무슨 길고양이도 아니고 길이구아나인가? 얘네도 음식물 쓰레기를 파헤쳐서 먹나? 건너편에 서양아저씨랑 동시에 카메라를 꺼내다가 눈이 마주치며 서로 살짝 웃어준다. 물론 대화는 하지 않고 눈인사를 나누며 그대로 헤어진다. 이 정도 인연이면 전생에 소개팅 정도 한 사이 일려나.

숙소로 돌아오니 방을 청소하고 있으시다. 이런, 바로 나갈 건데. 왠지 미안해져서 신발도 벗고 들어오고 침대에도 눕지 않는다. 서비스업을 하면서 느낀 거지만 사람들은 돈을 내면  서비스하는 사람들을 자기들이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 가치관에서 어쩔 수 없겠지만, 손님이 온 게 고마워서 서비스를 제공해준 거고, 서비스를 받은 게 고마워서 가치를 지불했다고 생각하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다.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서비스를 받는 것도 분명 교육이 필요하다.

다시 짐을 싼다. 뭐 짐 싼다고 해봤자 슬리퍼를 신고 운동화를 꺼내는 거 말고는 없다. 아 그리고 여친님이 하사하신 뿌리는 선크림을 얼굴에 분사해준다. 로션도 안 발랐지만 뭐 괜찮겠지. 저 운동화는 언제 다시 세상의 빛을 보려나. 둘 중 한군대에 짐을 맡기고 카오산로드로 향할 예정이다. 근데 어느 쪽으로 가지? Bewel은 뭔가 서양 히피들의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신에 그럴만한 자유로움이 있고, 3HOWw는 둘 중에서는 조금 더 안전한 선택으로 보인다. 게다가 미세하지만 20바트가 싸기도 하다. 일단 그 앞에까지 간 다음에 결정해야겠다.

가서 생각해보니 게하에서 멍 때릴 것도 아니고 그냥 싼데 하자 싶어서 3HOWw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여긴 디파짓이 있어서 350+300 바트를 주고 가방을 맡긴다. 근데 서양분 가방이랑 비교하니 애기 가방 같다. 저런 거 들고 어떻게 다니지.

체크인은 2시부터 가능하고 이곳에서 볼일은 더 이상 없기에 카오산으로 슬슬 걸어가본다. 삼센 거리도 은근히 카페와 식당들이 많고 그 안에서 멍 때리는 여행객도 몇 명 보인다. 화창한 햇살에 머리에 느껴지는 열기와 함께 알려준 길로 한발 한발 내디뎌본다.

중간에 엄청 핫한 여성분이 지나간다. 서양분 들은 확실히 몸매를 들어내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나 보다. 순간 태국 현지 남자, 서양 아저씨, 그리고 나까지 3명의 눈이 돌아간다. 여자가 지나간 다음에는 서로를 조금 의식하고 계면적어하며 돌아선다. 역시 남자는 어디든 똑같다.


방콕 거리의  첫인상은 역시 10년 전 영등포 굴다리가 떠오른다. 지금 더울 때라 그런가? 사람들 얼굴에서는 뭔가 활기가 느껴지지 않고, 여행자들은 피곤해 보인다. 인도에서 기운찬 현지인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솔직히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다.

카오산로드는 은근 찾기 쉽다. 그냥 쭉 가다 보면 나온다. 한 15분 걸었나? 카오산길이라는 이정표가 나오며 외국인들이 눈에 띄게 많아진다. 여자친구가 예전에 일주일 머물며 그리 좋았다는 카오산 로드. 배낭여행객의 성소라는 그곳. 기대를 품고 한번 들어가본다.

흠, 그냥 길이군. 양 옆에 각종 노점상들이 즐비하고 외국인 상대로 하는 식당들이 즐비하긴 한데, 솔직히 이곳만의 매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낮 10시에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홍대의 화려한 밤거리를 생각하고 낮에 일요일 낮에 방문해보면 젊은이들이 전날 거리에 열심히 부친 전들만 가득한 것을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리라. 론리플래닛에서 '카오산은 더 이상 lonely하지  않다.'라고 쓰고 거의 다루지 않은 이유도 왠지 알거 같다.

그래도 난 미션이 있다. 현지인들은 '뭐지?' 싶지만 여행자들은 '아 여행자군!' 하는 복장으로 변신하기. 일단 시세를 알고 분위기를 몸에 체득하기 위하여 가격을 물으며 거리를 두어번 왕복한다.



"하우 머치?"


"350. 디스카운트? 250. 파이널 220."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자기가 알아서 할인을 해준다. 당황스럽다. 그럼에도 높은 가격부터 부르는 건 할인한 가격으로 맞추기 위한 마케팅 전략임이 뻔하지만 일단 대략 시세를 알아본다.


결국 가방 하나, 바지 하나, 그리고 티셔츠를 산다. 잘 깎아서 샀다고 생각했는데 다 합해보니 800 바트다. 숙소가 350 바트인 걸 생각해보면 과한 지출이다. 물론 한 달 동안 입을 옷이긴 하지만 이거 잘한 건가 싶다. 나름 흥정 잘했다고 웃으며 돌아섰지만 파는 사람들에게는 국제적 호구가 된 것은 아닐까? 국제 미아는 벗어났지만 국제 호구는 피하기가 쉽지 않다.


'여행옷 mk1'에서 '여행옷 mk2'로 변신하고 싶은데 난 아이언맨이 아니기 때문에 길 한복판에서는 할 수가 없다. 헌데 공중 화장실이 없다. 고민하다 또 거리를 한바퀴 돌고 슬슬 더위를 먹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이 곳에서 점심을 먹고 싶지는 않다. 예전에 카투사 시절 미군들이 서울 오면 맨날 이태원만 가는 걸 보면서 "거긴 서울이 아니야. 너희는 서울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닌 거야."라고 하던 그 말이 지금 나를 향한다고 해도 다를 바가 없다. 노여사... 내 스타일을 알면서 강추하다니. 넌 나에게 똥을 줬어! (물론 성향 맞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거고 개인적인 의견이다. 요즘은 말 조심해야지...)


결국 타협하여 화장실 있는 곳에서 음료 한 잔 먹고 변신을 꾀하기로 한다. 아늑해 보이는 곳 아무 곳이나 들어간다. 바로 화장실로 직행하여 변신! 아 이제 좀 뭔가 여행자스럽다. (혼자만의 생각일 확률 82.3%) 머리만 좀 어떻게 하고 싶은데, 모자를 쓰긴 싫고 고민이다.

자리로 와서 내 사랑 망고 쉐이크를 주문한다. 50바트... 역시 여기는 어서 벗어나야 하나보다. 옷도 괜히 이쪽에서 샀나 싶기도 하다. 일단 자리를 잡고 글을 좀 쓰고, 론리플래닛을 펼쳐서 낮을 어디서 보낼까 고민해본다. 그래도 이따 저녁에 한번 돌아와서 카오산의 저녁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긴 하다. 노여사님이 그리  강추했던데는 이유가 있겠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하면 노여사 구박하는 재미도 생길 테고.


일단 팟쑤멘 요새 쪽으로 가기로 마음 먹는다. 뭐하는 곳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지금이 12시 반, 도저히 카오산의 비싼 밥을 먹지는 못하겠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 있으면 그냥 들어가봐야겠다. 어차피 내 여행 스타일이 관광은 아니고 발 닿는 데로 가는 것이니...


팟쑤멘으로 향하면서 여행사마다 들려서 내일 공항으로 가는 차편을 구해본다. 150바트 정가에 모두 데려가길래 괜찮은 딜이어서 타기로 마음 먹었는데 문제는 숙소가 좀 떨어져서 올려는 사람이 없다. 그러다 한 곳에서 버림받은 나를 구해준다.

여행사 여성분과 대화를 나누는데 나보고 어디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싸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나도 모르게 "닉쿤"이라고 첨언도 한다. 뭔가 한국에 굉장히 호의적인 듯, 표정이 환해진다. 자기 보스도 한국 사람이라고 15분 있다가 온단다. 그래서 난 그 전에 도망가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더한다.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 사람인 줄 알았어요!"


심증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다. 그래, 난 역시 동남아삘이었어. 어쩐지 지나다니는 한국 사람들도 날 전혀 신경 안 쓰더라. 그렇다고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신경 써주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건가.


그까 이것. 아랑곳하지 않고 가는 길에 끼니를 해결한다. 먼저 달구지(?)를 몰고 다니는 할아버지에게 현지인들이 하드를 사길래 꼽사리 껴서 10바트를 주고 사서 먹으면서 걷는다. 좀 걷다 보니 닭볶음밥을 파는 곳이 있길래 35바트를 주고 사 먹는다. 이거 은근히 맛있었다. 약 1200원인데 은근히 양도 많고 매콤한 것이 입맛에 딱이다. 공원에 도착해서는 연유 커피를 20바트에 팔길래 역시 아이스로 한 잔 뽑아서 자리를 잡는다.



여기 마음에 든다. 조용하고, 새의 지저김도 들리고, 그늘은 앞에 강 때문인지 시원하다. 근데 그러고 보면 산정호수랑 다른 건 무엇인가 싶기도 하다. 확실히 여행은 장소의 변화가 아닌 마음가짐의 변화를 뜻한다. 이곳에서 해 떨어질 때까지 커피 마시면서 책이나 좀 봐야겠다.

옆에 어떤 남성분도 나와 같이 한동안 멍하니 있다 간다. 저분은 어떤 사연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은 또 어디 있을까.

한동안 나를 괴롭혔던 것은 살면서 처음으로 나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세상 일이 늘 그렇듯 열심히 했지만 결과가 안 좋은 일은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나름 완전무결하다 생각했기에 이 경험은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욕심이다. '미움 받을 용기'라는 말이 떠오른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겠다는 것은 진정한 과욕이다. 내 양심이 떳떳하다면 좀 더 당당해져도 되는 것 아닐까.


조금 다르지만 최근에 실패를 경험한 친한 친구 하나가 나에게 해준 얘기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왔던 길의 방향을 돌리거나, 오히려 그 벽을 깨고 한번 더 앞을 향해 가거나. 나는 어느 쪽일까?


친한 친구 중에 20대에 결혼하여 지금 애를 셋 키우고 있는 놈이 있다. 어릴 때는 그런 평범한 모습보다는 뭔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내가 더 멋있다고 생각하였고 주변에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심지어 꿈을 가지라는 연설을 하며 감화시키려고 했다. 철 없는 짓이다. 어떤 길을 가냐가 중요하다기 보다 어떻게 가냐가 중요한데 말이다. 세상에 '평범'하게 사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뭔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내 자신에 대해 최대한 솔직해질 필요성을 느낀다. 먼저 나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나는 엘리트임을 자부하다가 사업에 실패한 30대 후반의 젊은이'이다.


앞으로의 한 달은 최대한 가감 없이 솔직하게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여행이고 싶다. 여기서부터 다시 한번 내 자신을 만들어나가보자.


앉아있는데 뭔가 눈물이 난다. 추하게시리. 에잇 너무 과하게 감상적이 된 거 같다. 이 정도는 아닌데. 뭐 여행을 눈물로 시작해서 웃음으로 끝낸다면 내가 원하던 여행이 되리라. 

아놔. 다시 책이나 볼까 했더니 코보가 먹통이다. 갑자기 생뚱 맞게 얘는 왜 이러지. 여기서는 똥꼬를 찌를 바늘도 없단 말이다. 일단 발 닿는 데로 한번 걸어가봐야겠다. 아직 2시 반밖에 안돼서 카오산의 밤을 겪어보려면 4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그래도 이 공원, 뭔가 작은 깨달음을 나에게 선물해줬다는 느낌이다. 깝쿤깝.

발길이 닿는 데로 다녀본다. 강을 따라 간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다 보니 공장도 나오고 막다른 길도 나와서 뒤돌아도 나온다. 여긴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길을 잃을 것 같진 않다.


가다가 여행사 창에 붙어 있는 문구 하나에 발이 멈춘다.

그래, 모든 건 마음 먹기 나름. 인생은 어차피 내가 만들어 가는 것. 좋은 일이 있으면 즐거워하고 나쁜 일이 있으면 경험으로 삼고 더 앞으로 나가면 되겠지.


무작정 걷다 보니 익숙한 광경이 나온다. 흠... 아까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이군. 제주도에서도 한번 이런 적 있는데 뭔가 내 안에 회귀본능이 있는 걸까?


날씨도 장난 아니게 더운데 잘됐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침대 자리도 잡고 잠시 쉬다가 다시 나가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이런 날씨에 낮에 돌아다니는 거는 자살행위다. 이제 한 달 여행에서 하루가 지난 것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숙소로 돌아와서 침대를 잡고 (2층이다. 2층 싫은데...) 가방에서 바늘을 꺼내 코보를 리셋시킨다. (당연히) 혼숙 도미토리라 이런저런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만 한국사람은 안 보인다. 만나도 한국 사람 아닌 척 해볼까나. 굳이 내가 먼저 얘기 안 하면 날 한국 사람으로 알지도 않을 듯하다.


로비로 나와서 앉는다. 에어컨이 나와서 좀 살거 같다. 여기서 땀 좀 말리고(?) 낮잠을 좀 잘까 싶기도 하다. 지금 그냥 자기에는 너무 찝찝하고, 샤워는 자고로 저녁에만 하는거라 지금 할 수는 없다.


앉아서 내일 갈 치앙마이를 좀 찾아보는데 스탭들이 옆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한다. 나보고 좀 권하길래 괜찮다고 대답하고, 바로 후회했다. 생각해보니 오늘 점심을 닭볶음밥 하나만 먹었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 테이블에 초록색 과일이 있길래 뭐냐고 물어보니 망고란다. 먹어보니 좀 시큼하다. 이런 망고도 있군.

내가 처량해 보였나? 옆에 쿠키도 있다고 먹으라고 권하신다. 여기 매니저분 (혹은 사장님) 처음에는 좀 무뚝뚝해 보였는데 굉장히 친절하시다. 권하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쿠키도 먹고 망고도 먹고 오렌지 주스도 먹으면서 배를 조금 채워본다.

여행 초반인데 몸이 좋지 않다. 커피도 너무 마신 듯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은 거 같다. 일단 방에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가서 내 침대 자리로 올라간다. 잠은 오지 않고 누워서 인터넷도 하고 앞으로 일정을 어찌 할까 고민해본다.


누가 댓글로 '방콕은  쏨땀이지'라고 써놨다. 쏨땀이 뭐지? 그러고 보면 난 참 조사도 안 하고 다닌다. 건강의 회복을 위해서 저녁은 좀 제대로 먹고 싶다. 카오산에 쏨땀 맛집을 검색하니 '쏨땀 욕크록'이라고 하나 나온다. 맛집 찾아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긴 한데 한번 저녁에 가봐야겠다. 그리고 카오산으로 가서 첫 맥주를 한 잔 해볼까 한다.


발바닥이 벗겨지기 시작한다. 6년 전에 인도에서 산 슬리퍼는 여행 때마다 나와 함께 했는데 항상 내 발바닥에 상처를 가져왔다. 이제 바꿀 때가 된 건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만큼 뭔가 애정이 많이 가지만 이따 카오산에서 한번 봐야겠다. 머리도 걸리적 거리 는데 이 기회에 평생 못해본 반삭도 해볼까 싶다. 어차피 잘 보일 사람도 없고!


나가기 전에 로비에서 노여사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이 사람도 이번 주에 경주로 혼자 여행을 간단다. 경주도 좋을 거 같다. 이번 여행 끝나면 나도 경주나 한번 가볼까?

앉아있는데 현지 여인분 하나가 옆에서 컴퓨터 하시는 서양오라버니에게 꾳을 전달해준다. 뭐지? 나는 순식간에 투명인간 처리되어 버렸다. 아 이 외모지상주의. 나도 10년 전에는 좀 날렸...었던 것 같은데. 여완얼인가보다.


그래 머리를 잘라야겠다. 갑자기 삘이 왔다. 스태프한테 물어보니 큰 길 왼쪽에 100바트에 잘라주고 깔끔하다고 추천해준다. 마음 생겼을 때 바로 가야 하는 법. 짐을 싸가지고 나간다.


이발소에 들어가니 이발사분도 뭔가 당황하는 눈빛이다. 가격을 물어보니 150바트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100바트  추천받고 왔다니까 바로 알았다고 하며 자리에 앉으라고 한다.


짧게 잘라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스포츠 머리를 얘기하는 듯해서 바리캉으로 그냥 싹 다 밀어달라고 한다. 바리캉으로 종류를 보여주는데 하나를 고르니까 그걸 끼고 머리를 밀기 시작한다.


머리를 미는 모습은 뭔가 아저씨의 원빈스러운데, 얼굴은 원빈이 아니다. 이거 꽤나 당황스럽다. 이렇게 확 밀어도 될까?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괜히 불안하다. 그런데 자르는 걸 보니 또 너무 긴 거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다. 이왕 자르는 거 팍 밀어야지! 더 짧게 잘라달라니까 알았다고 하면서 마음 먹으신 듯 짧은 놈으로 갈아 낀다.


이제 좀 뭔가 맞는 거 같다. 근데 뭔가 자르면 자를수록 스님의 분위기가... 잘하는 거겠지? 뭐 한 달이면 어차피 자랄 테니  상관없겠지. 나름 기분이 좋다. 웃음이 나면서 막혀있던 응어리가 하나 뚫리는 느낌이다.


근데 헤어라인을 자꾸 이상하게 자른다. 양 귀 옆을 'ㄴ' 모양으로 각을 낸다. 이거 원래 이런 건가? 내가 반삭을 해본 적이 있어야 알지. 뭔가 이상해서 잘라달라고 하니까 질색하시면서 그러면 아니라고 손을 휘저으신다. 전문가 말을 믿어볼까? 뭐 또 아니면 어때. 태국 유행 인가 보지.


다 자르고 100바트를 내고 나간다. 머리 하나 잘랐는데 아까부터 우울했던 기분이 확 풀린다. 이거 뭐 조울증인가? 걸어가면서 노트4로 셀카를 몇 장 찍는다. 찬양하라 삼성 셀카뷰티 모드! 뭔가 멋있어진 기분에 웃음이 나면서 들뜬다. (근데 솔직히 멋있어진 건지는....)

아까까지 몸도 좀 안 좋았는데 이제는 괜찮아진다. 역시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법. 이제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서 체력을 좀 회복해야겠다. 아까 봐 뒀던 '쏨땀 욕크락'을 찾아간다. 이곳에 얼마 안 있었는데 이제 지리는 익숙해졌다. 사실 한두 번 걸어가보면 그게 그거다.


큰 기대를 품고 가게를 찾았는데... 오늘 영업 종료란다. 안도와주는구먼. 그래도 기분이 다운되지는 않는다. 일단 그냥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본다. 뭔가 나오겠지 뭐.

생각 없이 가는데 왼편에 외국인은 거의 없고 현지인들은 바글바글한 식당이 보인다. 오 뭔가 촉이 오는 게 내가 좋아할 스타일 같아서 무작정 들어가본다. 들어가서 자리에 앉으니 종업원이 오는데 숫자도 영어로 못하는 게 관광객을 많이 안받았나 보다. 메뉴도 영어로 되어 있는 게 없어서 당황하는데, 종업원도 당황하더니 그냥 알아서 뭔가를 적더니 52바트라고 하고 간다. 경험상 이런데서는 사기는 거의 없고 그냥 제일 잘 나가는 걸 준비해주려나보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니 닭국수 같은 게 나온다. 그러고 보니 태사랑 지도에서 즉석에서 만드는 닭국수집이라는 걸 본 기억이 나는 거 같은데, 이곳이 그곳인지는 나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른다. 뭐 굳이 찾아볼 생각도 없다. 나만의 보물장소라 생각하면 더 좋은 거지. 여행은 정신승리가 중요하다.

한입 떠먹어보니 맛은 있는데 안 매워서 옆에 매운 가루를 '조금' 넣는다. 고추가루 같은 건데, 진짜 조금 넣었다. 이 깊은 매운맛을 어찌 할까. '조조금' 넣었어야 하나보다. 그래도 뭔가 얼큰한 게 맛이 괜찮아서 국물까지 싹 비운다.


배를 채우고 나니 여유가 생겨서 좀 달아보니 현지인들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희한하게 다 'ㄴ' 모양의 헤어라인을 지니고 있다. 이거 태국 유행 맞나 보다. 심지어 광고모델도 그 헤어라인이다. 붙어있는 광고모델 사진을 찍으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근데 태국 유행인건 좋은데, 난 일주일이면 미얀마로 가는데... 동남아 유행이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자 밥을 먹었으니 카오산로드로 다시 한번 가봐야겠다. 낮과 밤이 많이 다르다니 한번쯤은 가봐야 할 듯하다. 낮져밤이인 건가...? 또 무작정 걸어가다 보니 표지판 등이 보이고 따라 가본다. 으슥한 곳을 자꾸 들어가는데 뭐 사실 무서운 건 없다. 근데 여성 여행자 혼자면 조금 조심해야 할 듯 하긴 하다. 나야 뭐, 사람들이 날 보고 피하는 듯한 기분 마저 든다.

원래 여행 다닐 때는 지나가다 눈이 마주치면 꼭 눈웃음을 해주는 편이다. 어떤 현지인 아저씨가 있길래 눈웃음을 줬더니 내가 지나간 다음에 지긋하게 나를 부른다. 뭐지...? 그리고 어깨에 손을 얹길래 솔직히 살짝 놀랬다. 0.5초 안에 주위를 둘러보니 주변에 아무도 없긴 한데 한쪽으로 튀면 괜찮을 거 같긴 하다. 아저씨가 부르더니 잠시만 얘기를 하자고 한다. 문득 태사랑 지도에서 이쪽에 사기꾼 출몰한다고 쓰여있었던 걸 본듯하다. 쿨하게 씩 웃어주고 무시하고 간다. 따라오면 어쩌지 했는데 안 따라온다. 아직 현지화가 덜된 건가... 그나저나 진짜 태사랑 지도 하나면 따로 검색도 필요 없이 다닐 수 있을 거 같다. 이런 거 만드는 사람은 상줘야 한다.

한번의 위기를 넘기고 카오산에 입성한다. 호~ 진짜 카오산은 낮져밤이이다! 아까 왔던 곳이랑 같은 곳인가 싶다. (그리고 가격도 같은 곳인가 싶다.) 뭔가 잠들어 있던 거리가 살아난 느낌이다. 길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부부 (유모차 두개를 한 사람씩 끄는 한국 부부도 목격. 힘들겠다...), 딱 봐도 신혼부부인듯한 복장과 화장을 한 커플, 할아버지 할머니, 남자들끼리 온 여행객, 서양, 동양, 동남아 정말 melting pot은 이런 곳에서 써야 하는 표현이다. 게다가 업소들도 다양한 나라의 음식점과 마사지샵, 타투샵 모두 성황이다.

나가서 쫄이를 새로 사려다가 돌아보니 결국 다 비슷비슷한 게 어차피 같은 결과가 나올 거 같아서 만다. 결국 내 발바닥이 문제인 거다. 이미 정들어버린 이놈, 한 달간은 이렇든 저렇든 같이 지내보자구나.

근데 가격이 안착하다. 창맥주 하나 큰 게 50바트인 걸로 아는데 120바트에 판매한다. 그냥 작은 거 하나 먹고 돌아가야겠다고 마음 먹고 돌아다니다가 아까 낮에 왔던 운 좋은 맥주, Lucky Beer를 온다. 뭐 어차피 그게 그거 같은데 이왕이면 편한 곳이 좋지.

여기에 앉아서 글을 좀 쓰는데 이 맥주집은 앞에서 언니들이 야한 옷을 입고 호객행위를 한다. 그럼에도 손님은 거의 테라스에만 있다. 건너편에는 바글바글한데, 안타깝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나처럼 하루 있다 가는 사람이 파악할 수 있는 상권(?)은 아닌 듯 싶다.


여기 매우 안습인 게 호객 행위를 하려고 언니들이 앞에서 춤도 추는데 건너편 가게의 사람들이 공연 관람하듯이 보고 있다. 사장님, 이건 아니지요... 근데 진짜 도대체 왜 건너편은 바글바글 인 거야?


노여사한테 머리 자른 사진을 보여줬더니 충격 먹었나 보다. 난 잘생긴 거 같은데... 역시 사람은 자기한테 관대한가 보다. 뭐 나는 만족한다. 그리고 한 달이면 다시 기르니까.......


기분은 많이 풀렸지만 오늘은 뭔가 피곤한 게 일단 숙소에서 좀 쉬는 게 나을 거 같다. 게다가 내일 오전에 치앙마이로 떠난다. 근데 빠이를 가나 마나... 원래 노여사가 빠이를 추천해줘서 일단 치앙마이행을 끊은 건데 아직도 갈지 말지 고민이다. 오늘 결정하려고 했는데 보아하니 내일 도착해야 결정이 될 것 같다.


근데 문득 의문이 드는 게 카오산에서는 중국 사람을 거의 못 봤다. 공항에서도 엄청 보았고, 빠이도 중국 사람이 판을 친다고 해서 갈까 말까 고민하는 건데 왜 카오산에는 없지?


창 작은 거 한 병을 마셨는데 기분 좋게 취한다. 충분하다. 서울에서 친구랑 마실 때는 부어라 마셔라 최소 소주 각 2병씩은 먹고 혼자 마셔도 맥주 1000 이상은 꼭 먹는 편인데, 한 병이면 다음 병 생각이 안 난다. 평소에 술을 먹고 싶었다기 보다는 취해서 현실을 잊고 내 자신을 버리고 싶었나 보다. 내 자신을 찾아가는 지금, 굳이 과음이 필요 없는 이유겠지. 하지만 또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틀림없이 부어라 마셔라 할 거다.


맥주도 다 마셨고 이만 가야 하는데 혼자 앉아서 음악을 듣는 이 기분이 좋아서 일어나기가 싫다. 내가 카오산에 대해서 좀 오판을 한 거 같기도 하다. 낮의 카오산이 신봉선이라면 밤은 아이유다. 그럼 한지민은? 새벽의 카오산인가? 난 안타깝게도 한지민까지는 못 보고 가야 할 듯 싶다.


그래 이제 슬슬 일어나자. 맥주도 다 마셨고 분위기도 많이 취했다. 일어나서 숙소를 찾아가는데 지도를 꺼내지 않는다. 뭐, 대충 알고 같기도 하지만 못 찾아도 뭔가 다른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도 생긴다.


안타깝게도(?) 길은 제대로 찾은 듯하다. 가다가 조금 출출해서 꼬치 파는 곳에서 서성인다. 닭꼬치를 10바트에 파는데 하나를 집어 드니까 그거 말고 옆에 걸 먹으라고 한다. 왜냐고 물어보니 "Chicken bottom!" 이라며 먹지 말란다. 이 사람들이 한국인 무시하나. 닭똥집은 우리의 베스트 메뉴인 걸. 당당히 집어서 우리나라도 이거 잘 먹는다고 하고 맛있게 섭취한다.


숙소로 넘어오는 길에 큰 강이 있어서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한다. 그 다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이웅이웅'하는 소리가 들린다. 뭐지, 하고 보니 고양이다. 사진이나 한 장 찍을까 하고 봤는데... 얘가 완전 말라깽이다. 게다가 사람 손을 탔는지 하는 행동이 완전 우리 둘째 같다.


나도 모르게 근처 편의점으로 간다. 정신 차려 보니 20바트짜리 어묵을 사서 먹이로 주고 있다. 하... 이거 잘하는 짓일까? 어차피 난 내일이면 가는데... 그리고 사실 개였다면 이리 행동하지 않았을 거다. 왜 고양이는 되고 바퀴벌레는 안될까...

사실 고민해봤자 의미 없다. 왜냐하면 똑같은 상황이 100번 와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사람이 이성으로만 살아간다면 사람이 아니겠지. 경계하면서 먹는 듯해서 주고 돌아선다. 얘는 앞으로 다시 못 보겠지만, 그리고 오래 살진 못할 거 같지만, 사는 날까지는 행복했으면 좋겠다.


숙소로 오니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한국 사람들도 몇 명 보이는데 진짜 나를 한국인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 미션 성공? 일단 오늘은 너무 땀을 많이 흘려서 속옷도 갈아입고 좀 씻어야겠다. 빨래도 좀 하고 싶은데 내일 일찍 떠나니 그냥 걔는 이동해서 해야겠다.


샤워실을 갔더니 샴푸와 바디로션 표기가 안되어 있다. 흠... 슈레딩거의 샴푸인가. 고민하다 그냥 하나로 다 해버린다. 하나로 다 하면 맞을 확률 1/2, 머리와 몸을 구분해서 하면 맞을 확률 1/2 * 1. 어라? 둘다 50%네? 뭐 뭐든 씻기만 하면 됐지.


도미토리 내 침대 바로 앞에 서양언니들 침대이다. 남자 여자를 구분해서 해놓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 뭐 어쩌다 는 건 아니고 그냥... 오늘은 10인 도미토리라 아마 분명히 코골이의 오케스트라가 예상된다. 진작 포기하고 이어폰을 끼고 자야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 오전에 일찍 치앙마이로 가고, (아마도) 빠이로 넘어갈 테니 책 보다 일찍 자야겠다. 사실 오늘 글은 너무 개인적이라 올릴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번 여행은 기존 5년간 쌓인 나의 겉모습과 허영을 벗겨내고 앞으로의 10년을 이끌어갈 내 참모습을 찾아내기 위함이고, 글을 쓰는 것은 내 자신에게 당당해지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다. 사실 아무도 안 봐도 상관없는 글... 나를 위한 글. 근데 또 사람들이 봐줘야 여행 다니는 재미도 생기니 아이러니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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