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RI Jul 04. 2015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3

Bangkok, Thailand to Pai, Thailand



이번 여행에서 도미토리에서의 첫 저녁이다. 사실 그다지 좋은 밤은 아니었다. 10인 도미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코를 고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나 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먼저 침대가 삐그덕 거려서 아래층에 있는 사람이 너무 신경 쓰였고, 둘째로 에어컨은 너무 빠방하고 이불은 너무 얇았다. 전기세는 나가면서 고객들도 피해를 보는 모두가 손해를 보는 혁신적인 시스템! 락카에서 패딩을 빼오고 싶었지만 사람들 깨울까 봐 꺼려져서 말았다. 이제 도미에서는 무조건 패딩은 여분으로 가지고 자야겠다. 결국  한서너 시간은 잤는지 모르겠다. 괜한 잡생각과 고민에 빠져있다 보니 진동으로 해놓은 7시 알람이 울렸다.

다른 사람들도 잠을 설쳤는지 7시인데도 아무도 일어나지를 않는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어제 옆에 벗어놓은 티셔츠와 바지로 갈아입는다. 어제 서양누님들이 내 앞에서 훌러덩 벗으면서 윗옷, 아래옷 다 갈아입는걸 목격한지라(...) 나도 거리낌 없이 비루한 몸뚱이를 노출시켰다. 뭐 다들 자는지라 어차피 아무도 안 봤을거다.

최대한 조용하려 노력했지만 침대 계단을 밟는 순간, "삐삐끄덕덕", 결국 모두를 깨우고 말았다. 뭐 이건 내 잘못은 아니다.

나와서 간단히 세수만 하고 (머리 감는 것도 세수에 포함) 조식을 먹으러 로비로 나온다. 잊기 전에 수건과 열쇠를 반납하고 어제 맡겨놓은 300밧 디파짓을 돌려받고 셀프 조식대로 향한다. 어제 먹었던 루프뷰의 아침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사실 조식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계란이 좀 아쉽긴 하지만 시리얼과 빵, 커피로 배를 채운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가 많이 시원해졌다. 앉아있는데 어제 그 친절했던 스태프(혹은 사장님)가 나타났다. 이발소 추천을 해준 분이다. 날 보더니 빵 터지면서 머리를 왜 그리 확 밀었냐고 묻는다. 웃음코드는 만국 공통인가 보다. 더워서 밀어버렸다고 하니까 오늘은 안 더운데 어쩌냐고 하신다. 이런 건 웃음으로 무마!

조금 앉아있으니 어제 예약한 미니버스가 도착해서 날 부른다. 배에 신호가 살살 오고 있었지만 일단 버스에 올라탄다. 공항 가서 해결해야겠다. 스태프분이 통화 중이어서 뭔가 급하게 인사를 하고 나온다.

3HOWw, 이름은 괴랄하고 (이름 뜻을 물어본다는 걸 잊었다...) 첫인상도 그저 그랬지만 친절한 스태프분 한 명 때문에 매우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쌈센 거리가 카오산에서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고 나름의 운치도 있어서 의외로 지내기에 괜찮았다. 앞으로 방콕을 두 번 더 올 텐데, 카오산은 사실 다시 안 올 듯해서 이곳 또한 안 오게 될듯 하지만 만약 오게 된다면 다시 한번 여기에 둥지를 트는 것도 괜찮겠다.

나를 태운 미니버스는 이곳 저곳을 돌며 총 5명을 태운다. 내 옆에는 정신 매우 불안한 말레이시아에서 온듯한 분이 앉았다. 다리를 떠는 게 차원이 다르다. 다리를 떨 때마다 차가 덜컹덜컹, 이것도 능력이다.

5명이 아니다. 계속 돌더니 결국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을 때까지 태운다. 총 9명이다. 이제는 더 못 탈 거 같다. 보아하니 공항으로 드디어 향하는 듯 싶다.

버스 기사님은 가는 내내 스피커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신다. 배경에 애기 소리도 들리고 가끔 할머니 소리도 들린다. 부인이랑 통화하는 걸가? 하긴 여행자들이 태국어를 거의 못 알아들을 테니 개인적인 통화를 크게 못할 것도 없을 거다. 하지만 뭔가 내용이 궁금하다. 막상 알고 보면 한국에서처럼,


"오늘 저녁 친구들하고 한 잔 하고 갈게. 한번만 봐줘."
"응. 그래. 맛있게 먹고 쭈욱 그 좋은 친구네 가서 살아~"


뭐 이런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알 길은 없다. 근데 진짜 가는 내내 한 시간 이상 통화를 하신다. 금슬도 좋으셔.

생각보다 금방 도착한다. 도착하니 9시, 어제 어떤 여행사에서 일찍 가야 한다며 6시 차를 타야 한다고 했는데 거절하기 정말 잘했다. 자칫하면 공항에서 소중한 3시간을 보낼뻔했다. 지금은 1시간 40분 정도 남았으니 해우소에서 근심도 털어내고 재정비 하기에 딱 적당한 시간이다.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2년 전 꼬창 갔을 때가 떠오른다. 여긴  공항이라기보다는 번잡한 버스 터미널의 느낌이다. 사람들이 바글바글, 아주  정신없다. 여행 막판에 캄보디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이곳에서 국내선으로 한 시간 반만에 환승해야 하는데 시간이 충분할지 걱정이다.

이거 줄을 언제 서서 들어가나... 하며 돌아보는데 셀프체크인 KIOSK가 보인다. 흠 한번 가볼까? 가까이 가보니 들고 타는 가방은 7키로가 제한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고, 옆에 저울까지 있다. 내 가방을 재보니... 아싸, 6.5키로이다! 역시 출발할 때 인생의 무게를 적게 한 덕을 보고 있다.

아! 세컨백을 잊었다! 이런... 가방은 하나만 가지고 탈 수 있다. 그런 연유로 세컨백을 메인 가방에 쑤셔 넣는다. 공간은 충분한데 무게가 걱정이다. 합체된 가방을 재보니 7.5키로이다. 이제부터 게임이 시작인 건가. 어떤 물건을 살리고 어떤 걸 버릴지, 머리 속에서 계산이 시작된다. 입고 온 추리한 바지를 버릴까, 잠옷으로 입는 노여사가 질색하며 싫어하는 옆구리 뚫린 후드티를 버릴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내 자식들인데 조금 무리해서라도 가지고 가보자는 생각을 한다. 들어가다 걸리면 그때 버려도 늦지 않을거다.

셀프 체크인은 의외로 매우 간단하다. 그냥 예약번호를 넣으면 알아서 항공권이 나오고 가방 부칠 게 있는 경우 버튼을 누르면 가방에 붙이는 스티커도 같이 나온다. 난 실수로 가방 부치는 것까지 뽑긴 했지만 그냥 주머니에 슬그머니 숨겨버린다.

무게를 줄여야 하나 고민하면서 체크인으로 향한다. 검사대에 전부 다 넣고 두근거리면서 지켜본다. 걱정한 게 무색하게 그냥 무사통과다. 이거 너무 간단한데? 근데 이거 불법 아니야? 뭔가 걱정이 되지만 일단 넘어간다. 다음 비행기를 타기 전에는 물건 몇 개를 버리고 정리 좀 해야겠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 들고 온 홈매트 본체와 리필 30개가 참 의미 없다. 다른 건 다 빼면서 걔는 왜 아득바득 가지고 왔는지 모르겠다. 도미토리에서 그걸 킬 수도 없거니와 에어컨을 하도 춥게 틀어서 모기가 날아다닐 환경이 아니다.

저번 인천공항의 교훈을 잊지 않고 이번에는 해우소를 게이트 근처에서 가기로 한다. 표를 보니 78번 게이트라 해서 두리번 거리며 찾아본다. 헌데 78번 게이트는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게이트다. 마지막 게이트가 77번 게이트이다. 이거 해리포터에서의 기차처럼 마법학교로 가는 초청장인건가? 77번 게이트 옆의 벽을 사람들이 안 볼 때 스윽 통과하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망상을 해본다.

쓸데 없는 생각 말고 정신 차리고 전광판을 보며 비행기 노선을 맞춰보니 75번 게이트라고 나온다. 아 시스템 엉망이구먼. 사람이 끊는 것도 아니고 KIOSK에서 뽑은 건데 어떻게 이런 오류가 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KIOSK와 전광판이 서로 다른 DB를 참조한다는 건가? 왜죠? 뭐 프로그래밍은 내 분야가 아니니 이유가 있겠지 하며 넘긴다.

75번을 찾아가는데 걸어가고, 걸어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간다. 아 참을 수 없다. 인천에서야 대한항공과의 차별을 이해했지만 여기는 모두 에어아시아인데, 같은 레벨끼리 차별하는 이유가 있나. 생각해보니 에어아시아 국내선 중에서도 저렴한 놈으로 선택된 거 같기도 하다. 저가항공에서의 저가노선이라니. '저가' 딱지는 언제쯤 땔 수 있을까.

가면서 보는데 해우소가 어느 순간 안 보인다. 없으면 어떻게 하지? 이 먼길을 다시 돌아 원래 있던 곳으로 걸어와야 하는 걸가? 그래도 일단 가보자. 삼국지에 나오는 고사 중에서 유비가 어떤 노인을 업고 강을 건너는데 중간까지 가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간 이유가 '포기하면 시작하지 아니함  못하다'라고 했던가. 사실 연관성이 그다지 없는 내용 같지만 문득 생각이 난다.

조용한 통로를 지나가니 넓은 도떼기 시장 같은 곳이 나타나며 해우소도 같이 나타난다. 만세! 일단 자리를 잡고 앉아본다. 아직은 때가 덜 무르익었다. 항공편을 기다리면서, 신호를 기다리면서 키보드를 편다. 이제는 그냥 아무데서나 피고 글을 쓰는 것이 익숙해졌다. 사람들이 이 키보드가 탐나나 보다. 이것만 열면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진다. 하긴 왠 승려 같은 놈이 이러고 있으면 나같아도 신기하겠다.

에헴. 이제 한번 해우소에 가볼까나. 들어서니... 핫. 경쟁이 치열하다. 역시 사람은 모두 비슷한가 보다. 문득 내려오면서 계단 위에 한 곳을 본 기억이 난다. 계단 하나만 올라가면 되는지라 한번 가보니 역시 여유롭다. 사람은 이래서 머리를 써야 몸이 편안한 법이다. 근심을 말끔히 이곳에 쏟아 붇고 나온다.

그래도 오늘 하루 시작이 나쁘지 않다. 비록 잘 자지는 못했지만 잘 먹고 잘 쌌다. 3개 중 2개면 뭐 그래도 선방한거다. 여행 다닐 때는 동행들과 변 얘기를 후딱 터야 편해진다. 인도에서 여친 만났을 때도 하루 만에 텄던 걸로 기억한다.

돌아와보니 보딩이 시작되었다. 근데 아까 봤던 7키로 저울이 여기 다시금 모습을 나타냈다. 아 왜 0.5키로 때문에 이리 마음을 졸여야 하는 건지... 나름 법 없이 살던 나인데 마음에 안 든다. 진짜 이번이 지나면 몇 가지 물품하고 이별을 고해야겠다.

다행히 무사통과한다. 버스로 이동해야 해서 타고 바닥에 그냥 털썩 주저앉는다. 뭔가 머리를 자른 후에 행동에서 남의 눈치를 보는 게 무척 줄어들었다. 외형이 내면을 지배하고 또 내면이 외형을 지배하는 법이다.

비행기에 올라탄다. 뭐 그다지 특별할게 없는 비행기이다. 손을 모으고 '사왓디깝'을 하며 인사하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자리를 찾아 앉는다. 이번에도 창가 자리다. 왜 항상 창가 자리가 날 찾아오는 거지?


비행기가 이륙하면 난 항상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확률적으로 자동차가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은 물론 알고 있지만 역시 사람은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는 법, 시각적인 공포감을 이성이 극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6년 전, 인도에서 미래를 사는 남자와 현재를 사는 여자가 만났었다. 남자에게는 현재를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여자가 너무 매력적이었고 유혹 아닌 유혹을 통해서 인연을 만들었다. 남자가 그때 여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죽음이 무섭지 않아? 모든 것이 사라지는 건데."

여자는 대답했다.

"글쎄, 지금이 만족스럽다면, 행복하다면 꼭 죽음이 무서운 것은 아니라고 봐."

"그건 네가 생각을 못해서 그래. 만족스럽다, 행복하다, 무섭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거잖아. 존재 자체가 지워진다는 게 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 있어."

"난 모르겠네. 그냥 난 그래."

여자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설명을 못한다. 그게 어쩌면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의 행동을 보면서 6년간 현재를 사는 방법을 배워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죽게 된다면 어떨까? 여전히 죽음이 무섭지만 예전만큼 격렬한 반발심이 생기지는 않는다. 나도 조금은 현재를 살 수 있게 된 걸까?

김영하의 '보다'에 이런 내용이 있다. 'Carpe Diem'과 'Memento Mori', 둘다를 기억하라.  현재를 살 줄 알고 죽음을 잊지 않는 것. 인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한 마법의 주문이 아닐까?

치앙마이에서 내리면 어디로 향할까? 사실 어제부터 이 고민을 계속 했는데, 고민을 하는 과정에서 내 방식의 정답이 나왔다. 나는 또 양갈래에서 의미 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키보드를 가지고 갈까, 어디를 갈까, 무엇을 할까, 다 미래를 사는 방식이다. 그것 보다는 어떻게 할지, 왜 하는지, 이런 고민들이 오히려 현재에 충실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냥 '빠이'를 가기로 했다. 중국인이 많고, 분위기가 변했고, 이런 것은 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뿐, 내 이야기가 아니다. 제주도에서 고산리가 가장 좋았던 것이 경치가 아주 훌륭하거나 관광거리가 많아서가 절대 아니었다. 그냥 거기서 만든 나의 '이야기'가 좋았었다. 이번에도 내 이야기를 만들어보자.

돌이켜보건대, 이야기를 만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은 수줍은 아이라 머무는 사람에게 절대 자신을 한번에 드러내지 않는다. 하루를 머무는 것과 일주일 이상을 머무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처음에 여행을 결정했을 때는 전체 일정을 보름만 가려고 했는데, 여자친구의 조언으로 한 달로 연장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에어아시아의 아세안패스의 영향도 컸다. 160달러에 아세안 국가를 다닐 수 있는 항공권 10장을 준다니! 이건 안지를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런데 결제 후에 계획을 짜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 패스의 조건은 한 달 안에 사용할 것, 그리고 보름 전에 예약할 것, 두 가지이다. 두 가지 다 내 여행 방식에 걸린다. 첫째로 한 달에 10번 돌아가니게 되면 한군데서 머무는 절대적인 기간이 줄어들고, 둘째로 보름 전에 예약을 강제함으로써 몸따라 마음따라 흘러가는 즉흥적인 여행을 할 수가 없어진다.

치앙마이까지 예약한 상황에서 에어아시아에 연락을 취했다. 전부 환불하고 그냥 미얀마에서 한 달을 지내는 것으로 심적인 결정을 내린 후였다. 취소가 안된단다. 잘못 들은 듯해서 다시 물어봤다. 위약금은 다 내겠다, 취소를 하려면 어찌 해야 하느냐. 역시 취소가 안된단다. 이게 가능한건가? 혹시 싶어 약관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쓰여 있다. "취소 안됨." 망했다.

극악무도, 공공의 적, 빌어먹을  에어아시아!라고 울부짖었지만 사실 약관을 안 본 내 잘못이지 누굴 탓하겠는가. 그래서 그냥 떠나기로 했다. 뭐 이 안에서 또 하나의 여행 방식이 나오겠지. 그런데 또 하나 문제가 모든 항공은 방콕으로 이어진다는 거. 그래 그래 뭐 그러라고 해. 그래서 총 4번을 방콕에 오게 되고 3번은 하루 이상을 머물게 되는 괴랄한 스케줄이 잡혔다. 그나마 한 곳에서 최소한 4박 5일은 있을 수 있도록 배치했다. 나에게 가장 큰 자유가 주어진 곳은 보름을 머무는 미얀마 뿐이다.

오늘 치앙마이에 내리게 되면 27일에 방콕으로 다시 돌아가니 딱 4박 5일이 있다. 어찌 보면 짧지 않을 수 있지만... 짧다. 일단 내리자마자 빠이로 가자. 그리고 향후 일정은 그곳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으로 하자.

확실히 여행 중 이동할 때 생각이 가장 많은 거 같다. 할 일이 없어서 그렇겠지. 멍 때리는 것이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뭐 뜨자마자 착륙한단다. 한 시간도 안 온 거 같은데 정말 가깝다. 여하튼 드디어 이번 여행의 두 번째 장소에 도착! 일출, 일몰을 못 보는 방콕 따위는 잊어버려!

근데 배고프군. 빠이 가는 방법도 좀 알아봐야 하는데 시간이 벌써 늦었다. 일단 버스터미널까지 어떻게든 가서 식사를 해결해야겠다. 근데 버스터미널까지는 어떻게 가지? 뭐 내려서 보면 되겠지. 그다지 걱정은 안된다. 까짓거, 못 가면 여기 눌러앉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급할 것도 없어서 다른 사람 나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마지막으로 나온다. 방콕에서와는 다르게 걸음도 더 느려졌다. 천천히 바깥으로 나와본다.

나름 국제공항이라 갖출 건 다 갖춘 듯하다. 미터 택시라고 쓰여 있는 것도 있는데 경험상 아무리 그래도 공항에서 바로 타는 건 비쌌던 것 같아서 거리로 나선다. 미니버스라고 해야 하나? 뒤에 앉는 자리 많은 차가 나를 보더니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본다. 버스터미널이라고 얘기하니 100바트라고 타란다. 이거 비싼 거야 싼 거야. 감이 없다. 일단 비싸다고 가정하고 한대는 그냥 보낸다.

바로 이어서 뚝뚝이가 온다. 똑같이 물어보니 200바트를 달란다. 내가 어이없어하니까 얼마를 줄 수 있나고 되묻는다. 아까 시설(?)이 더 좋은 놈이 100바트였으니 80바트를 한번 슬쩍 불러본다. 이번에는 운전수가 어이없어하며 떠나간다.

아 이 정도 선인가보다. 처음 봤던 기사님이 양심적인 분이었나? 조금 기다리니 처음 봤던 차와 같은 종류가 또 온다. 100바트란다. 흥정할까 하다가 대략 이 정도 가격이 적당선인듯해서 그냥 탄다. 근데 만약 미터택시를 타고 가면 얼마일지 궁금하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거니 그냥 잊자.

사진 찍기 놀이하며 한참을 달리니 중간에 잠시 멈춰 서 다른 사람을 태우려고 한다. 하긴 그러니 뒤에 자리가 많은 거일거다. 그리고 그래서 뚝뚝보다 더 싼가 보다. 일종의 맞춤형, 플렉시블 버스라고 해야 할까? 이 버스 이름 알았는데 기억이 영 안 난다.

독일 중년 남녀 4명이 탄다. 외국인들은 중년이 돼도 배낭여행을 잘 다니는데 왜 우리는 안되는지 모르겠다. 휴

가 기간의 차이 일려나? 저번에 어머니 모시고 배낭여행 함 가자고 했더니 질색을 하시더라. 그리고 어제는 카톡으로 왠 게임 초대나 보내시고... 스티커, 그거 얼마 한다고 사라고 그냥 말씀드려도 꼭 게임 설치하고 카톡 초대까지 하면서 무료로 받으신다. 우리나라에서 콘텐츠 사업은 이래서 어렵다.

옆의 아저씨 갑자기 반대편 아주머니 치마 사이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아주머니는 그냥 치마를 오므리고 만다. 내가 방금 뭘 본거지?! 금슬이 좋다고 해야 하나?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서도 성적인 자극이 서로에게 있다는 것은 좋아 보인다. 물론 부부라는 가정하에 말이다.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무사히 도착한다. 이 정도 거리면 100바트가 적당한가? 아 집착을 놓치 못하는구나. 독일 분들에게 "Have a nice trip"이라고 인사하며 내린다.

일단 버스 시간표를 보니 빠이로 가는 버스는 매시간마다 있다. 가격을 물어보러 가는데 옆에 있던 아저씨가 갑자기 호객 행위를 하면서 뒤편으로 가보란다. 호객 행위는 일단 경계 대상! 그래도 한번 물어보니 150바트이고 미니버스란다. 여기서 사는 건 큰 버스이고 가격은 물어보니 같은 150바트이다. 아 도대체 미니버스가 좋은가요, 큰 버스가 좋은가요. 선택의 연속이구먼. 알 길이 없는데 미니버스 쪽에 여행자들이 모여있는 것이 왠지 신뢰가 가서 그쪽으로 결제해버린다. 여기 멀미 굉장히 심한 구간이라는데 잘한 걸까? 뭐 조금 있으면 바로 알게 되겠지.

1시 반 출발이니 30분 정도 남았다. 후딱 밥을 먹고 와야 해서 돌아보니 식당이 여러 개 보인다. 그중 대충 아무 데나 들어가서 메뉴를 보고 고른다. 태국 온 이후에 향음식을 제대로 못 먹어서 바질이 들어간 볶음밥을 골라본다.

물 좀 달라고 부탁하니 10바트짜리를 사야 한단다. 굳이 그럴 거면 다른걸 마실까 싶어 환타 가격을 물어보니 15바트다. 주문하여 태국에서의 첫 번째 탄산음료를 얼음잔에 따르고 화장실을 물어봐서 들어간다. 화장실이 너무 어두컴컴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뭔가 둥근 통이 보이긴 하는데 여기가 볼일을 보는 곳인지 전혀 모르겠다. 고민하다 그냥 처리하는데 위에 물 트는 게 있어서 틀어보니 여기가 맞는 듯하다. 다행이다. 아침에 근심을 해결하고 온 게 다시 한번 감사한 순간이다. 만약 지금 다른 게 급하다면... 생각 안할련다.

그러고 보니 오늘 무슨 요일이지? 온지 며칠 됐다고 요일을 잊어버렸다. 생각해보면 요일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제도이지 자연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몸으로 몇 월인지는 대충 가늠할 수 있어도 무슨 요일인지는 절대 알 수가 없다. 아닌가...? 직장인들은 일요일 저녁 되면 호르몬이 변화하는 거 같기도 하고... 우리 노여사님은 일요일 5시 이후로는 말 걸 때도 조심해서 걸어야지, 자칫하면 내가 모든 불행의 원흉으로 낙인 찍힌다.

잠시 짬이 나서 키보드를 펴고 글을 쓴다. 이렇게 5분씩 쓰는 게 항상 그때 감정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여행 다니면서 글쓰기는 정말 잘한 거 같다. 혼자 있을 때 심심하지 않고, 그때 그때 감정을 담을 수 있고, 생각도 정리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이다. 쓰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간다. 10분 전까지 오라고 했으니 ㅇ;ㅈ[ 슬슬 일어나야 할 때이다.

버스를 탔는데 맨 뒤 안쪽 자리다. 근데 바로 옆에 젊은, 아니 어린 예쁘장한 처자가 앉는다. 태국 미인은 은근히 정말 예쁘다. 어, 이거 위험한거 아닐까. 요즘 한류가 극성이라는데 괜찮을런지. 아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모르려나.

그래서는 아니고, 노트를 꺼내고 한국어로 글을 좀 쓴다. 뭐 어쩌자는 건 아니고... 그냥 재미있잖아. 근데 생각해보니 내가 이기적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처녀는 옆에 왠 티벳승 같은 아저씨 앉았다고 공포에 떨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 역시 여자친구 놔두고 혼자 오는 여행은 참 재미없다. 다음에는 꼭 같이 와야겠다.

뒤늦게 화장실 갔다 온 외국인 둘이 타고 이제 출발한다. 거참 미리 좀 갔다 오시지. 근데 맨 뒷자리가 멀미가 가장 심하지 않나? 걱정이다. 흠. 이 악명 높은 길, 괜찮겠지 뭐. 며칠 잠 못 잤는데 자고 일어나면 도착해 있음 좋겠다. 근데 그러고 보니 또 창가 자리다. 아 선크림 안 발랐는데... 시꺼머스되서 돌아갈 듯 싶다.

책을 보기는 힘들듯 하고 노트 4에서 킨들을 실행하고 미리 받아놓은 '21세기 자본' 오디오북을 실행행 후 이어폰을 꼽는다. Kindle Unlimited에서 제공하는 책과 오디오북 중 제일 읽을만한 애이다. 읽어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내가 지루해서 잠들던 책을 진짜로 읽던, 둘 다 나에게는 어차피 이득이다.

'덜컹' 둔턱을 넘으면서 의자에서 몸이 점프하면서 화들짝 잠이 깬다. 아 깜박 잠들었었군. 어디까지 들었더라. 생산활동으로 축적하는 부보다 부 자체의 투자로 인한 축적이 더 클 때 부의 쏠림 현상이 심하다는 얘기를 할 때만 해도 공감하면서 들었는데, 17세기 프랑스에서 인구의 급증이 가지는 영향에서 정신이 가버린 듯 하다. 에잇. 일단 아이유 노래나 좀 들어야겠다.  

옆의 처자는 잠들었는지 꾸벅 꾸벅 졸고 있는데 살짝 보니 이목구비가 또렷한 게 우리 가족 중 가장 예쁜 사촌동생과 닮았다. 에잇, 글러먹었구먼. 자고로 나는 눈, 코, 입이 조밀하면서 조화로운 미녀가 이상형이다.

버스가 본격적으로 점프하기 시작한다. 뒷자리에서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이래서 뒷자리에 젊은 사람들을 앉히고 연세가 있는 분을 앞쪽에 배치한 듯하다. 젊은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아싸!

이 처자 내 어깨에 기대다 일어났다 하더니 이제 아예 기대서 푹 잠들었다. 허허, 참 당황스러운 시추에이션이구먼. 이런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는가. 난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중간에 잠시 휴게소에 들려서 다 같이 내린다. 내리면서 옆에 외국인 둘과 어쩌다 말을 섞게 되어 어디 사람이냐고 물어보니 싱가포르란다. 어릴 때 싱가포르 친구가 하나 있었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한 친구가 묻는다.

"And you? Local?"

하... 머리 괜히 잘랐나.


헤어라인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옆에 현지인 승려를 보니 나랑 완전히 일치하는 헤어라인을 가졌다. 내가 봐도 닮았다. 아 이발소 아저씨, 나에게 똥을 줬어!

앞에 있던 서양 남자는 내 시계를 보더니 당연히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시간을 묻는다. 영어로 답하니 놀란다. 분명히 현지인으로 안 것이 틀림없다.

하... 머리 괜히 잘랐나...

버스를 타고 다시 이동하는데 싱가포르 총각이 미안한지 멘토스를 권한다. 그래, 주는 건 먹어야지. 이왕 이리 된 거 local discount를 노려볼까? 재미교포라서 모국어는 못하는 컨셉으로?

생각보다 길은 나쁘지 않다... 고 생각하려는데 커브가 본격적으로 이어진다. 약간 멀미기가 느껴지려는데 귀신같이 길에 '토 주의'표지판이 나타난다. 여기서 토하라는 얘기인가 보다. 아니면 이제부터 멀미가 심한 길이니 조심하라는 신호인가? 음악 들으면서 눈을 좀 감고 있어야겠다.

근데 그러고 보니 이 버스에 외국인은 나 포함 3명이고 나머지 12명은 전부 현지인이다. 비수기라 그런가? 슬슬 도착해가니 론리와 태사랑 지도를 피고 오늘 숙소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첫날은 일단 메인 거리에서 지내면서 분위기를 볼까 싶다.

이제 거의 다 와가는데 하늘이 어두운 게 비가 올려나 싶다. 아 숙소 구할 때 비 오면 골치 아픈데 걱정이다. 뭐 상황에 맞춰 대처해야지.

도착해서 내리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진다. 내 어깨에 그리도 박치기를 하던 처자는 내리자마자 금세 사라졌다. 그래도 인연인데 급작스럽게 사라지니 섭섭하다. 하긴 그럴 때가 아니다. 이거 비 오기 전에 어디든 숙소를 찾아야 한다.

결국 비가 슬슬 내리기 시작한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노여사가 싸준 자그마한 3단 우산을 배낭에서 꺼낸다. 그런데 조금씩 오던 비가 갑자기 엄청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여기 있을 수는 없고... 일단 우산을 피고 걸어가 본다.

현지인들이 내 여성스러운 우산을 보며 다 웃더니 자기들이 있는 처마 밑으로 들어와서 피하라고 손짓한다. 여기 이런 소나기는 금방 그치려나? 일단 비를 피하는 사람들과 같이 합류해본다.

폭우가 오기 시작한다. 이곳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아하니 여기 사시는 분들 같은데 우산도 안 가지고 다니시는 거 보니 금방 그칠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앞에 공중전화에도 한 아저씨가 비를 피해 숨어있다.

태국의 우기란 이런 거구나. 처마 밑에 있는데 위에가 갑자기 구멍이 뚫리며 물벼락을 맞는다. 아 빠이에서의 좋은 첫인상이군. 뭐 이런 이벤트 정도는 있어줘야 오히려 기분이 좋다.

그래도 조금 지나니 비가 잦아들기 시작한다. 다행이다. 슬슬 우산을 들고 나섰다가 바람이 너무 세서 다시 접고 그냥 비를 맞으면서 걸어간다. 메인 거리를 지나면서 분위기를 좀 보는데 비수기라 그런지 얘기 들은 것처럼 중국인이 바글바글하지는 않는다. 이곳에서는 그리고 배낭을 메고 누가 봐도 숙소를 구하는  것처럼 돌아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붙잡고 호객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건 이 마을 분위기가 그런 건지 내 분위기가 엄해서 그런 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바퀴를 돌았는데 마음에 딱 드는 숙소가 없다. 조금 괜찮은데 가면 이미 'Full'이라는 표지판이 붙은 게 비수가 맞나 싶다. 방 있는 곳을 들어가면 600바트 이상을 부른다. 물가가 싸지는 않은가 보다. 어차피 오늘 하루만 이쪽에 있고 내일은 외곽으로 나갈 예정이라 그리 좋은 곳을 찾을 필요는 없고, 그냥 촉이 당기는 곳을 가고 싶다.

한 30분을 걸어갔나. 외진 곳에 배가 꽤나 나온 소녀가 누워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지나가니 살짝 인사를 걸길래 나도 인사를 한다. 무심코 지나치다가 뭔가 이끌려서 다시 돌아와서 방 있냐고 물어본다. 이런 질문을 한 사람이 워낙 오랜만인지 당황하더니 에어컨 방은 500바트, 그리고 선풍기 방은 400바트라고 더듬더듬 얘기한다. 생각보다 비싸다. 딸이 나랑 얘기하는걸 보고 실제 사장인듯한 어머니가 나오다가 멈춰서서 딸을 기특하게 쳐다본다.

하지만 생각보다 비싸서 고맙다고 하고 그냥 지나친다. 걷다가 왠지 아쉬움이 생겨서 다시 소녀에게 돌아간다. 할인해줄 수는 없냐고 슬쩍 떠보니 안된단다. 조금도 안되냐고 하니까 당황하더니 몇 명이냐고 물어서 한 명이라고 대답한다. 그럼 300바트에 주겠다고 한다. 어제 도미토리가 350바트였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듯해서 방을 보여달라고 한다.

방은... 솔직히 엉망이다. 다른 상황이고 여유가 있었으면 안 들어왔겠지만 여행 중에는 인연을 믿기에 그냥 달라고 한다. 어차피 하룻밤이기도 하거니와 좀 안 좋으면 또 어떠리. 잘 수만 있으면 되지. 대신 앞에 테라스 공간은 꽤나 멋있는 게 저녁에 여기서 맥주 한 잔 마시면 딱 좋겠다.

가서 체크인 서류를 작성하고 300바트를 주고 방으로 들어온다. 근데 불이 안 들어온다. 무슨 스위치를 눌러야 하나? 자꾸 부를때마다 호칭이 애매해서 소녀한테 가서 이름을 물어보니 '마이'란다. 마이에게 전기가 안 들어온다고 하니 지금 마을 전체가 다 정전이란다. 언제 들어오냐고 되물으니까 자기도 모른단다. 그런 거지 뭐. 아마 아까 비 때문인가 싶기도 한데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다.

테라스에 앉아서 글이나 쓸까 하고 테이블을 보니 다리가 망가져있다. 망치 빌려서 내가 고칠까? 이틀 이상 있으면 그럴 텐데 하루로는 그러기 좀 애매한데. 그런데 사실 모르는게, 내일 보고 그냥 더 있을 수도 있다. 여기 보니 어차피 방도 이거 하나고 나 말고 들어올 사람도 없을 거 같은데 봐서 내일 깎아달라고 조금 더 흥정해볼까 싶기도 하다.

조금 있으니 갑자기 와이파이가 잡힌다. 불이 들어왔나 보다. 일단 여기 모기가 엄청날 거 같아서 한국에서 물 건너 가져온 홈매트를 킨다. 이거 의외로 잘 쓰일 줄 내가 알았지. 근데 전원이 멀리 하나 있어서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 여기 진짜 음침한 게 딱 마음에 든다. 나 변태였나.

빠이의 첫인상은 그리 나쁘진 않다. 사실 뭐 아직 제대로 겪어보지 않았으니 모르겠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단, 최대한 선입견을 보지 않으려 한다. 내가 빠이라면 누군가 나에 대해 인터넷에 쓴 글만 가지고 나를 판단하는 것은 싫을 듯하다.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말 만으로 판단하는 것도 싫을 거다. 그냥 나와의 직접적인 추억만으로 나를 판단했으면 좋을거다. 그러니 나도 그리 해줘야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난 여행에도 '스포'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항상 최소한의 정보만 아는 상태에서 여행을 떠나려한다. 이건 여행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여행지의 탐구가 목적인지, 자신 내부로의 여행이 목적인지, 이게 중요하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나는 여행지를 내 자신을 찾는 수단으로써 이용할 뿐이기에 그 장소를 모두 다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내가 보고, 내가 들은 것들, 나에게 영향을 준 것들만 소중하다. 너무 거만한 생각일까.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또 오기 시작한다. 조금 있다가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 갈 수 있을까? 잠깐 누웠는데 잠들뻔했다. 7시쯤 돼도 비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안되겠다. 일단 나가서 밥을 먹고 와서 오늘은 좀 일찍 자야겠다.

나가면서 왠 남자가 리셉션에 앉아있길래 여기 숙소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니 모른단다. 뭐지? 이따 마이한테 물어봐야겠다. 나와서 숙소 바로 앞에 식당을 들어간다. 동양인 4명이 앉아있는데, 왠지 한국 사람 같다. 흠 한국말을 하는군. 아는척할까 하다 만다. 아직은 홀로 고요히 다니고 싶다. 난 그래도 전혀 한국인티가 안 나서 다행이다(?).

닭 야채 국수를 시켜먹는다. 론리에서는 빠이 음식이 별로라고 하더니 맛만 있다. 향신료도 강하게 들어있고, 양도 생각보다 많다. 꽤나 맛있게 한 그릇을 비운다.

밥을 먹는데 카오산에서 머리를 땋은 티가 팍팍 나는 동양인이 한 명 들어온다. 들어올 때부터 과하게 공손한 느낌이 딱 일본인이다. 밥 먹고 나가면서 살짝 인사를 하면서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역시 맞다. 기본적인 일본어는 조금 하기에 일어로 몇 마디 나눈다. 가게 운영할 때 손님의 반이상이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손님은 항상 먹고 나면 그릇을 포개 놓는 것부터 전반적으로 매너가 생활에 박혀있었다. 국가로서의 일본은 모르겠지만 개인으로서 일본인은 매우 호감이 간다. 반대로 중국인은 한 팀만 와도 가게가 비매너로 들썩들썩 거린다. 사실 선진국은 GDP, GNP 같은 경제 수치가 아니라 국민들의 태도로 알 수 있는 거다.

저녁을 먹고 나와서 바로 옆 바로 옮긴다. 일찍 들어가서 잘려고 했는데 뭔가 비 오는 분위기에 취해서 한 잔 먹고 가기로 했다. 여기 분위기 마음에 든다. 숙소 바로 앞에 식당, 그 바로 옆에 바가 있는 것도 마음에 들고, 바에 누워있는 세월아 네월아 하는 개도 마음에 든다. 빠이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들으며, 빗소리를 들으며 창 비어 큰 거를 90바트에 시킨다. 여유가 생긴다. 이런 곳에 있으면 평생 핀 적 없는 담배가 피고 싶어 진다. 이런 게 조금씩 심해지면 마약까지 손을 대게 된다. 인도에서 그런 경우를 많이 봐서 안다. 맥주로 만족하자. 이렇게 3일을 여기에서 3일을 보내는 것도 괜찮겠다. 해돋이, 해지는 포인트만 몇 군데 파악하면 장소가 완성될 거 같다. 그런데 스쿠터를 빌려야 할까. 면허 없어서 싫은데... 생각 좀 해봐야겠다. 보아하니 여기서는 모두가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거 같긴 하다. 내일 마이한테 이틀 더 연장하면 500에 되는지도 함 물어볼까 싶다.

오늘의 마무리는 여기서 해도 될 듯하다. 이동 거리가 많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갈수록 말이, 아니 글이 길어지는 듯하다. 이 맥주만 마시고 일찍 들어가서 씻고 책이나 좀 보다가 일찍 자야겠다. 내일 비가 안 오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해돋이나 보러 좀 가봐야겠다. 근데 일어날 수 있을까?




Day 3 : 번외 편


글을 올리고 아까 차에서 존다고 못 본 책을 보고 있는데 익숙한 남자 둘이 들어와서 바에 자리를 잡는다. 유심히 살펴보니 아까 같이 차를 타고 온 싱가포르 남자 둘이다. 나를 현지인으로 인정한 첫 번째 그 남자들이다. 그거는 상당히 괘씸하지만 그래도 반가워서 아는 척을 한다.

걔네도 막 놀래더니 합석해도 되냐고 물어본다.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사람 인연 맺는 거 싫어하고 홀로 다니는 거 좋아해도 이렇게 약속 없이 두 번이나 만나는 인연에는 관대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봐라. 같은 버스 타고 오고, 빠이의 이 많은 곳 중에서 내가 자리 잡은 바로 이 바에 올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나. 이 정도면 전생에 전 연인 정도의 인연은 될 것이다.

앉아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눈다. 나이트도 아닌데 나이 얘기부터 시작한다. 자기들 나이 맞추라길래 "너희 둘이 얘기하는 거 봐서는 동갑 같지만 얘는 20대 초반 같고 너는 30대 중반  같아"라고 하니 껄껄 웃어댄다. 소심한 복수는 성공이다. 물어보니 둘 다 22살이란다. 어린 것들이구먼.

내 나이도 물어보길래 나도 맞춰보라고 한다. "Twenty... Six?" 이놈들 아주 건실한 청년들이구먼. 흐뭇하지만 그래도 사기 치기는 좀 그래서 허허 웃으며 그것 보다는 많다고 한다. "Twenty... Eight?" 이제 슬슬 장난하나라는 생각이... 한때 동안의 화신으로 여겨졌지만 지난 일 년동안 파싹 늙은걸 나도 안다. 높이라, 높이라 그래서 결국 36까지 오는데 둘 다 놀래서 뒤집어진다. 이거 내 자랑 아니다. 진짜 있는 그대로의 가감 없는 팩트이다.

호구조사 끝났으니 대화를 좀 해야지. 난 여행 다니면서 만난 타지 사람들의 가치관에 관심이 많다. 가치관이라는 게 나고 자란 환경이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의 가치관을 듣는 것만으로도 내 벽이 하나 깨지는 느낌을 받는다. 최근 이슈인 '리콴유'에 대해 조금 돌려서 물어본다.

관심 없단다. 아, 얘네 22살이었지. 리콴유가 최근에 별세하는 바람에 이슈가 되긴 했지만 권좌에서 물러난지는 오래되서 관심 없단다. "지금 리콴유 아들이 총리  아니야?"라고 물으니 맞다면서 젊은 사람들은 그냥 싫어한다고만 얘기한다. 어찌 무심할 수가 있지. 역시 그 안에 있으면 모르는 건가... 싶다가 우리랑 소름 돋게 비슷한 환경에 할 말이 없어진다.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소득과 물가 얘기로 이어진다. 얘기를 들어보니 싱가포르는 나라는 작고 제조업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리고 정치적으로 독재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다소 특이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일단 법적 최저임금이 없다. 자유 경제원리를 믿는 건가? 대학교는 5개가 있는데 거의 다 웬만하면 대학교를 간다. 대졸 초임은 2500만 원 정도이다. 이건 뭐 우리나라랑 비슷하군.

진짜 경악했던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음식이 대부분 2000원이면 된단다. 페이가 같은데 물가가 이리 싸면  사기지!라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차는 제일 싼 도요타가 1억이 넘는단다. 헐... 이 괴상망측한 시스템은 뭐지? 생각해보니 나라가 작아서 차를 비싸게 파나 싶기도 하다. '차는 필요  없잖아?'라고 물으니 그래도 많이들 갖고 싶어 한단다. 여자 꼬시려고 그런 거겠지 뭐. 다 똑같군.

집 값은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와 비슷한데 신기한 게 99년 임대이고 구입은 법적으로 안된단다. 허... 진짜 독재국가라서 가능한 시스템이려니 싶다. 페이의 15%를 가져가는 대신에 은퇴하면 연금으로도 평소 생활은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단다. 음식값이 싸서 가능하다고 웃으면서 나에게 얘기해준다.

그 얘기를 듣는데 대충 뭔가 흐름이 느껴진다. 생활에 필수적인 부분은 세금을 거의 안 매기고, 사치품에 폭풍 세금을 매겨서 국가를 운영하는가 싶다. 일종의 부자관세인데 대상을 사람이 아닌 재화로 초점을 잡은 거라고 해야 할까나. 뭐 추측이고 확실한 건 나중에 찾아봐야겠지만 그래도 시스템은 똑똑하게 잘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친구들 첫 해외 여행이라 숙소도 안 잡고 다니고 거지처럼 자유롭게 다니는 내가 좋아 보였나보다. 같이 다니고 싶어 한다. 신기한 게 미얀마 일정도 겹친다. 이건 인연은 인연인데... 같이 술 먹는 거랑 같이 다니는 건 다른 문제다. 일단 얼버무리고 내일 연락해보자고 한다. 근데 연락할 방법이 없다. 왓츠앱으로 한다길래 설치하고 깔려고 했더니 문자 승인 때문에 안된다. 메일 주소 적어주고 연락 달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온다. 그래도 이번 여행 4일 만에 비록 14살이나 어리지만 첫 인연을 만들게 되어서 기분이 나쁘지 않다.

돌어오면서 마이가 보이길래 여기 숙소 이름을 다시 물어보니 'River Side'라고 알려준다. 들어와서 검색해보니 엄청 비싼 'Ban Paan River Side'만 나온다. 거기일 리는 절대로 없고, 옆에 방 하나 있는 건 마이 언니가 쓴다니 진짜 그냥 놓고 나 같은 호구가 걸리기만을 기다리면서 전혀 마케팅을 안하는 곳인가 보다.

사실 난 이곳이 은근히 마음에 들어서 폭풍 네고 후 이틀을 있을까 싶었는데, 위치가 바에 가깝다 보니 저녁에 너무 시끄럽다. 시설이나 이런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잠을 방해하는 건 다른 문제다. 오늘 밤을 잘 자나 보고 생각 좀 다시 해봐야겠다.

내일 일출 보러 나가려면 진짜 자야한다. 어디로 가지? 나침반 보고 일단 동쪽 노선이 잘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 보련다. 뭔가 적당한 장소가 나오겠지 뭐.





매거진의 이전글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