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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18. 2020

노력으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

너무 애쓰지 말자. 나는 충분히 좋은 엄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수시로는 근처에도 가기 어렵던 국립대에 수능이 대박 나서 단박에 합격했다. 다들 평소 모의고사 성적보다 20~30점 이상은 떨어진 수능 성적표를 받을 때, 나는 고3 일 년 내내 쳤던 어떤 모의고사보다 높은 점수의 성적표를 받았다. 가채점 결과를 들은 담임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부르셔서 제대로 채점을 한 것이 맞냐고 재차 되묻기까지 하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제 가채점 점수보다 10점이나 낮춰서 적어냈던 것인데도 말이다.


운 8, 노력 2이라고까지 말하는 임용도 재수에 합격했다. 한 번에 합격한 사람들에 비해서 내 운이 덜할지는 몰라도 치열한 경쟁률을 생각하면 두 번만에 합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운이 좋은 사람이다. 틀림없다.


하지만 사실 그 운은 내 노력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었다. 수능이나 임용이라는 큰 산을 넘을 때 정상의 바로 아래 지점까지 나를 데려다 놓은 것은 분명히 나의 노력이었다. 산 정상으로 나를 밀어 올린 마지막 힘은 운이었을지 몰라도 그 이전까지는 누구에게 말해도 부끄럽지 않은 엄청난 노력이 있었다. 자는 시간, 먹는 시간, 심지어 싸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공부를 했다. 철저한 계획을 세웠고 스스로에게 가혹하리만큼 엄격하게 공부했다. 그렇게 노력을 하면 운이라는 녀석이 슬그머니 나타나 마지막에 슬쩍 나를 정상으로 밀어 올려주는 것이었다.




삶의 기록들이 쌓이면서 언젠가부터 나는, 어떤 일이든 내가 노력하면 그 노력에 조금의 운이 더해져 최상의 결과를 얻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어떤 일 하나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지독하리만큼 부지런하게 그 일에 매달렸다. 그러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운이라는 녀석이 짜잔! 하고 나타나 노력 이상의 좋은 결과를 선물처럼 휙 던져주었다.     




서른셋에 주어진 육아라는 과제내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열심히 하고 싶었다. 내가 열심히 하면 아이는 내가 생각한 대로, 내가 그린 대로 멋지게 또 아름답게 잘 자라 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첫째가 태어나기 전부터 육아서, 인문, 육아 블로그를 참 열심히도 읽었다. 아이에게 좋다고 해서 신랑에게 매일 태교 동화를 읽어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손바느질로 아이의 배냇저고리와 애착 인형, 천 장난감까지 직접 만들었다. 아이가 태어나던 , 처음 안은 아이는 너무나 작았다.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과 꼭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휘감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그냥도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그냥 예뻐하고 사랑하기에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길었다. 24시간을 아이와 부대끼며 최선을 다해 아이를 사랑하고 싶었고,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돌까지 극도로 예민한 등센서를 장착했던 아이를 위해 아이가 낮잠을 자는 몇 시간을 아기띠에 안은 채로 버텼다. 어깨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아이가 잘 자니 괜찮았다. 분유부터도 정말 안 먹으려고 하던 입 짧은 아이라, 이유식 시기가 오자 좋다는 재료들만 사다가 일일이 손질을 해서 매 끼니 다른 이유식을 해 먹였다.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많더라도 아이 입에 내가 만든 음식이 쏙 들어갈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아이는 예민했고, 낯가림도 심했고, 고집도 세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지만, 내 말만은 들어주었다. 말을 하지 못하던 때에도 나와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만큼 나는 민감하게 아이의 반응과 몸짓 언어를 읽어냈다. 그러니 내가 나서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가 쉽게 통제되었다. 힘들었지만 뿌듯했다. 아이를 위해 살고 있는 24시간이 전혀 아깝거나 힘들지 않았다. 역시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아이가 둘이 되자 모든 것이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터울이 적은 두 아이를 한 번에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되자 노력으로 안 되는 상황들이 수시로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 손이 너무도 간절한 세 살, 한 살 두 아이를 보는 것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두 아이에겐 언제나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애를 써도, 돌아오는 것은 두 아이의 울음이었다.      


엄마, 나를 더 봐줘요.

나를 더 사랑해줘요.

나랑만 더 놀아줘요.

밥은 나만 먹여줘요.

옷은 내 옷부터 입혀줘요.     



두 아이의 울음에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가득했다. 첫째는 첫째대로 그동안 내가 해온 노력들이 있으니, 자신에게만 온전히 쏟아지지 않는 엄마의 시선이 불안했을 것이다. 둘째는 둘째대로 한참 애착을 형성하는 시기에 애착 대상인 엄마가 오빠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불안했을 것이다. 그러니 두 아이는 끊임없이 울며 엄마를 찾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다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부단히 애를 쓰고 있던 내게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다. 나를 정확히 반으로 쪼갤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러지 않는 이상 갖은 노력을 해보아도 언제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이 있구나.'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그러고 보면 아이를 키우는 일은 ‘성취’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다. 아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이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대상’ 일 때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이 ‘존재’ 일 경우에는 내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두 아이는 오늘도 수시로 엄마를 찾는다. 그 와중에 중간중간 식사 시간이 돌아오고 어질러진 집안이 보인다. 내가 노력할 수 있는 일은 식사를 신경 써서 챙기거나 집안을 수시로 정리하는 것뿐이다. 결국 주부로서 내 역할은 노력으로 채울 수 있지만, 엄마라는 자리는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자.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나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말자. 엄마는 그냥 엄마일 뿐이다. 엄마이기에 그냥 ‘좋은’ 것이지, 좋은 엄마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미 두 아이를 건강하게 세상에 내어놓았고,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하고 있다. 그럼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엄마다. 그렇게 나를 조금이나마 토닥이고 싶은, 조금은 버거웠던 하루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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