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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17. 2020

불안도 유전이라니.

아이가 자라는 순간마다 부모도 함께 자란다.

사랑이의 빈뇨 증상이 쉽게 나아지질 않았다. 얼마간 괜찮은 듯했지만 최근 들어 다시 심해져서는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 “엄마, 쉬 마려워! 또 마렵고 또 마려워.”라며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근래 들어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조차 갑자기 화장실에 간다며 서너 번을 들락날락거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사랑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때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막막해졌다. 아이들이 잠들고 난 후 신랑과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흘러간 하루를 되짚어가며 고민을 해보아도 사랑이가 어떤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일관성을 찾을 수 없었고, 대처 방법도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답답한 마음에 친한 언니에게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언니는 자신이 아는 선생님이라며 행동 수정 전문가 한 분을 소개해주었다.      




두 아이가 잠든 늦은 저녁, 선생님과 첫 통화를 했다. 선생님은 차분하게 현재의 상황, 가장 고민이 되는 아이의 행동, 그 행동이 시작된 시기 등을 질문하셨다. 질문에 답을 하면 다시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다른 질문을 하고, 또 하고를 몇 번 반복하셨다. 내 이야기에 적당한 공감과 위로를 해주시던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하셨다.


“어머님, 어머님 얘기만 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대충 그려지네요. 아직 사랑이를 만나지 못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요.  어머님, 인간의 여러 감정들 중에서 유전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요. ‘불안, 우울’ 같은 슬픈 감정들이 그래요. 들어 보니 사랑이가 불안이 조금 높은 것 같은데, 그런 데에는 어머님과 아버님 중에 한 분 혹은 두 분 모두가 불안이 좀 높은 편이신 게  영향을 미쳤을 것 같네요.     


우리 부부 중 한 사람이, 혹은 우리 두 사람 모두가 불안이 높다니?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나는 평소 내가 아주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라 생각해왔고, 신랑 역시 매사에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 둘은 스스로를 자존감이 매우 높은 사람이라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우리가 불안이 높은 편이라니?   

하지만 선생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던 것은 다음에 이어진 질문 때문이었다.


"두 분, 아이와 밖에 나가면 절대 손을 안 놓고 꼭 잡고 다니시죠? 놀이터에서도 아이 곁에 딱 붙어 계시죠?"


우리 부부는 밖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면 가능한 한 곁에서 1미터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길을 걸을 때는 찻길이 아니어도 손을 꼭 잡고 었다. 조금만 경사가 진 길이라도 "내리막은 위험해." , 아이가 1초만 시야에서 사라져도 "사랑아!"를 외쳤다. 그러고 보면 아이의 안전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위험해! 안 돼! 기다려!"라는 말을 너무 빈번하게 했었다. 그 기저에는 '아이가 다치면, 아이가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깔려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불안인 줄 몰랐던 것뿐이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겁이 많거나, 예민한 것도 불안의 요소일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보면 나는 불안이 꽤 높은 사람이 분명했다. 나는 무서워하는 것도 아주 많고, 싫어하는 것들도 많다. 그리고 걱정도 고민도 많은 편이다.  그런 모습을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내 안의 밀실에 가둬두기 위해서, 스스로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고 무슨 일에도 다 괜찮다며 강한 척을 했다. 수시로 밀려드는 걱정과 고민을 덮기 위해 더 많은 일에 서슴없이 도전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가까운 지인들은 나에게 '외강내유형 인간'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했었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해서 나의 불안함이 흔적 없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불안을 이길 만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내가 불안이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다.      


신랑은 그런 면에서 나와 또 달랐다. 신랑은 겁도 없고 걱정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선생님께 얘기를 했더니, 남자치고 신랑만큼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려고 애쓰거나 아내의 감정을 살피는 사람도 잘 없다고 하셨다. 그만큼 섬세하고 예민한 부분이 있는 것인데 그것 역시 불안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듣는데, 집안 곳곳에 붙어 있는 모서리 보호대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에 새로운 물건이 들어오면 신랑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그 물건의 모서리마다 보호대를 붙이는 것이었다. 문틀, 창문틀, 식탁 다리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랑은 미처 모서리 보호대를 붙이지 못한 곳에 아이들이 부딪혀서 아파하면 스스로를 자책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그런 모든 것들이 신랑 내부에 움츠리고 있던 '불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불안이, 하필이면 그 불안이 유전이 된다니! 하고 많은 좋은 감정들 다 놔두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유전이 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불안이 내 아이들에게까지 전해져 아이들마저 불안지수가 높다니,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동안 멍하게 듣기만 했다. 유전적으로 전해진 불안은 우리 부부의 양육 환경을 통해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가 동생의 탄생, 코로나로 인한 외출의 제약 등의 상황에서 다른 아이들에 비해 불안을 크게 느끼고, 그것이 신체 반응으로까지 나타난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선생님과의 통화를 마무리하며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선생님이 직접 집에 오셔서 우리 가족의 생활 모습을 보며 즉각적인 행동 수정을 해보기로 했다. 사랑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부부, 나아가 둘째 봄이까지 우리 네 사람 모두가 행동 수정의 대상일 수 있다고 하셨다. 사랑이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은 역시나 우리 부부의 변화였다.  우리가 스스로의 불안을 낮추고 아이를 조금 더 여유롭게 바라보며 키울 수 있어야 아이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 그 시작을 조금이라도 앞당겨 보고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동 교육 전문가가 직접 집에 와서 즉각적인 행동 수정을 해준다니, 참 별 걸 다해 본다 싶다. 이번 기회에 사랑이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와 신랑 우리 두 사람이 자기 안의 불안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불안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아주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아이가 자라는 순간마다 부모도 함께 자란다. 미처 덜 자랐던 우리 안의 작은 ‘나’가, 우리의 책임과 맞닿아 있는 아이를 키우며 천천히, 하지만 늦지는 않게 마저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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