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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Aug 27. 2019

불행의 다른 얼굴,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불행했던 사나이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아, 이름 길다~

불행한 위인을 꼽으라면 너무 많지만 당장은 이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을 썼으면 뭐하는가? 그 대부분이 죽고 나서 팔렸는데.. 세르반테스가 살아있을 때에도 「돈키호테」는 큰 인기를 얻었지만 당시 「돈키호테」를 읽은 대부분 사람들은 해적판으로 그 책을 읽어 세르반테스의 재테크에는 조금도 도움 되지 않았다. 하긴 인세가 쥐꼬리만해 정품버전으로 많이 팔았다 해도 출판업자만 부자가 됐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17세기에도 불법 해적판이 성행하고 배급망을 움켜쥔 중간 유통상들이 창작자들의 등골을 빼먹고 있었다니 참으로 놀랍다. 


세르반테스는 살아생전에 거의 대접 받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의 개인사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스페인에서는 세익스피어와 견줄 대문호로 칭송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스페인 정부조차 그의 유해를 찾아보려고 했을 때가 사후 400년 후이니, 2014년에 트리니타리아스 수녀원에서 찾아낸 세르반테스의 유해가 진짜일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후손이 없어 유전자 검사를 할 수도 없는데, 그냥 그는 죽어서도 스페인의 선전거리로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실제 역사보다 창작물에서 나온 이야기가 더 그럴 듯해 보인다. 어릴 때봤던 영화인데 아무리 구글링해도 영화제목을 찾을 수 없다. 주인공은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아니라 세르반테스 본인이었다. 영화에서 세르반테스는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고문을 받게 됐는데 정말 돈키호테라도 된 것처럼 ‘어떤 고문이라도 해 봐라. 내가 눈 하나 꿈쩍할 것 같으냐?’고 호기롭게 외친다. 

하지만 현명했던 적국의 지휘관, 아마 오스만제국의 장교였겠지만, 그 지휘관은 이렇게 말한다.

난 자네 같은 몽상가를 어떻게 다루는지 잘 아네. 손톱을 빼고 불로 지져도 자네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지. 하지만 눈과 귀를 멀게 하고 아무 맛과 냄새도 못 느끼게 한다면 어떨 텐가? 자네의 영혼은 육신 속에 영원히 갇히게 될 텐데. 그래도 견딜 수 있을까? 

세르반테스는 1초만에 바로 항복한다. 사실, 이건 누구라도 항복한다. 어쨌든 이 영화는 어렸던 나에게 세르반테스에 대한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그는 용맹한 동시에 고귀한 영혼을 가진 몽상가였다는 것을.

용맹한 사람과 몽상가의 공통점은 모두 불행하다는 것이다. 용맹은 보통 자기 자신을 위해 쓰이지 않고 권력자들에 이용되니 불행하고, 몽상가는 현실 적응력이 떨어지니 불행하다. 두 가지 불행함을 동시에 갖춘 세르반테스가 얼마나 불행했을지는 굳이 나무위키에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유년기에는 빚쟁이에게 전 재산을 차압당해 온 가족이 스페인 전역을 떠돌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교황청 추기경의 종자가 되어 로마에 입성, 모르긴 해도 영특함이 있었으니 발탁되었으리라. 그런데 20대의 세르반테스는 난데없이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오스만제국과 전쟁이 벌어졌는데 열병이 걸려 전쟁터에 안 나갈 수 있었지만 기어이 수병으로 전쟁에 참전해  왼손 병신이 되어 돌아왔다. 불운의 시작이었다. -다친 손이 오른손이었으면 돈키호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세르반테스는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해적에게 잡혀 5년 이상 노예생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돌아와서 식량조달원으로 취직했는데 말(馬)을 함부로 팔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투옥됐다. 자세한 사정은 미스터리. 이후 그는 세금징수원으로 일했는데 세금을 예탁해 둔 은행이 파산하고, 책임자는 도망가서 세비야 감옥에 또 갇힌다. 

감옥 속에서 「돈키호테」를 구상하게 되니 후세에게는 그의 투옥 생활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세르반테스 입장에서는 감옥에 가지 않는 게 백번은 나았을 것이 분명하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세상에 내놨을 때 나이가 대략 58세다. 왕실심의 받고, 국왕이나 신성을 모독할 우려가 있는 부분은 삭제하고, 정정 심사 받고, 만나본 적도 없는 귀족에게 헌정사까지 쓰고야 책이 출판됐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책은 성공하고 작가는 경제적으로 망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이 죽기 전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나 보다. 「돈키호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 그 세르반테스라는 친구는 오래전부터 나와 아주 절친한 사이지. 내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시 쓰는 일보다는 불행에 더 이력이 난 것 같아. 그 친구 책은 무언가 독창성이 보이긴 해. 하지만 시작만 해놓고 무엇 하나 끝내놓은 게 있어야지.

불행에 익숙한 작가는 원래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세상에 내놓고 10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돈키호테」 시즌2를 탈고했다. 나이가 70 가까이 됐으면 이제 어떻게 해야 주변에 이용만 당하지 않을지 깨달았을 텐데 이번에는 건강이 받혀주지 않는다. 그 이듬해 사망한 것이다. 「돈키호테 2」는 전편과 동급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그 영예는 또 주변인이나 출판업자들의 몫이 된다. 

인생말로가 좋지 않았던 위대한 작가는 제법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나이 80에 부부싸움을 대판 벌이고 가출을 시도했다가 기차역에서 폐렴으로 동사했다. 

톨스토이 보다 7살 많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사형선고를 받은 전과가 있고, 시베리아 중노동을 했으며, 그후에도 도박 빚에 쫓기다가, 책이 성공해 좀 살만해지니 여동생과 재산상속 문제로 한판 붙고 사흘만에 피를 토하며 죽었다. 


그러나 세르반테스처럼 인생 내내 줄기차게 불운하게 살았던 작가는 별로 없다. 죽고 나서 얻은 수많은 영예는 저리 던져두자. 죽은 다음에 다 무슨 소용인가? 


그에 대해 생각해 볼 점은 이꼴저꼴 다 보고 살았으면서,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은 인생 말년에 왜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까, 이다. 그는 뭘 위해 「돈키호테」를 썼을까? 후세 좋으라고? 


「돈키호테」를 읽어보면 그가 바라본 세상에 대한 풍자와 비아냥이 가득하다. 풍차가 악당 거인이라고 달려들고, 양떼가 적의 군대라며 마구 죽이고, 주변에서 놀려줄 목적으로 영웅이라 칭송하면 좋아서 우쭐하다가 사기당해 또 개고생하고, 평생 미쳐서 방랑한 돈키호테의 일생이 나름 지성인이라 자부하며 살면서도 엿같이 꼬여버린 세르반테스와 그리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차라리 돈키호테처럼 미쳤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꼿꼿한 그의 정신은 미치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책으로 세상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기사도를 비웃고 사랑을 비웃고 부와 명예를 비웃었다. 세상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조롱밖에 없는 것처럼. 


상당히 많은 창작자와 지식인들이 인생의 말년을 세상을 조롱하고 저주하며 살아간다. 이른바 ‘모든 것을 다 갖는’ 위너 몇몇을 빼고 나면 나머지는 ‘옆에 빠져 있어야 하는’ 루저이기 때문이다. -그룹 ABBA의 <The winner take it all> 노래를 들어보라. 


살다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기 때문에 위너일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루저일 때는 무척 잘 보이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친구가 없었던가? 내가 이렇게 나이가 들었던가? 이렇게 쫌팽이였던가?' 


그래도 이런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아직 자포자기, 구제불능의 상태는 아니다. 완전히 포기했다면 남과 비교하지 않을 테고, 비교하지 않으면 자신이 모자란지 불행한지도 알 수 없다. 때문에 세상을 비웃고 자신을 연민하는 것 모두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생기는 현상들이다. 


포기하면 편해진다고 한다. 맨정신으로 살기 지나치게 힘들고 불편하다고 느낀다면 포기하자. 깔끔하고도 완전하게. 그것도 좋은 처방인 듯 보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불편한 것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 무의식 중에 기대하는 게 있고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징조니까.  

    

알베르 까뮈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그 당시 진정한 의미에서 절망의 시기를 지내보지 못했기에 내가 한 말이 얼마나 옳은가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가 닥쳐와 내 마음속 모든 것을 파괴당하고 나서, 절망 깊숙이 숨어있는 들끓는 삶의 의욕이 맹렬히 솟구쳤을 때에야, 절망 뒤의 굶주린 열정을 진지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자살을 꿈꾸지 않으리라 中>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조롱하고, 저주하라! 

이 모든 것들이 거듭된 좌절로 인해, 내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열정을 지피는 희망의 다른 얼굴일 수 있다.


그림: 귀스타프 도레 作 <돈키호테 데 라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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