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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Aug 26. 2019

여름이 끝나는 날엔, 싱글몰트 위스키 어떠세요?

오늘처럼 여름이 끝나가던 때였다. 그날은 저녁약속이 너무 일찍 끝나버려 뭔가 어정쩡한 기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본격적인 저녁 장사에 들어간 주점들의 간판이 각양각색으로 네온사인을 밝히고 있었다. 

그 중, 2층 벽돌 외벽에 간접조명으로 단아하게 모습을 드러낸 위스키 바(Whisky bar) 하나.

Liquid Soul

술집의 이름이 '술의 영혼'이라는 것에 끌려 홀로 계단을 올랐다. 이른바 싱글몰트 위스키 바(bar)와 첫 만남이었다. 


시간은 9시쯤이었는데도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혼자 왔으니 테이블좌석을 놔두고 곧장 바에 앉았다. 화이트셔츠와 면바지, 하얀 얼굴에 호리호리한 체형, 살짝 염색한 머리,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바텐더는 멋들어진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혼자 왔느냐, 뭘 마실 거냐, 이런 상투적인 질문을 하는 대신 이렇게 물어왔다.

“오늘 하루 어떠셨나요?”

“어제와 비슷한데, 그쪽은?”

“조금 더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멋지다! 그의 이름은 J였다.      


남들은 취업을 위해 막연한 스펙 쌓기에 열중할 나이에, J는 바텐더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스무살에 조주기능사, 즉 바텐더 자격증을 땄단다. 지금은 각종 대회에 나가서 입상할 정도로 경력이 출중한 바텐더로 이곳저곳에서 영입 제의까지 받고 있다는데. 

“이런 곳은 처음인데 싱글몰트 한잔 마실 수 있어요?”


글렌 피딕, 맥켈란, 글렌 모린지 등 싱글몰트 위스키라면 제법 마셔봤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초보’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길 바라며 물었다.

“그럼요. 찾으시는 거 있습니까?”

J의 뒤에 있는 나무 선반에는 수백 병은 될 듯한 위스키 병이 진열돼 있었다. ‘이렇게 위스키의 종류가 많다니’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하나 추천해 주면 좋겠는데.”

“피트향이 강해도 괜찮겠습니까?”

“그건 왜?”

“어제와 비슷하시다니 조금은 자극적이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J의 목소리는 감미롭게 나의 청각을 자극했다. 벌써 기분이 나아지고 있었다. 


바텐더로서의 서비스는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라고 한다. 그는 비즈니스 가방을 들고 터벅터벅 들어와 말없이 자리 잡는 내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고, 얼굴색과 행동으로 저녁식사는 했는지, 술은 얼마나 마시고 왔는지를 추측했다. 유달리 쳐져있었던 내 어깨까지 보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탈리스커 10년산입니다. 스코틀랜드 스카이섬에 증류소가 있는데 처음 드신다면 강렬한 만남이 되실 겁니다. 향이 강해서 기침이 조금 나올 수 있습니다.”

30미리 정도의 노란색 위스키 원액을 채운 테이스팅 잔이 내 앞에 놓여졌다. 그는 독이 든 잔을 건네주고 내가 마시길 기다리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셨다. 화장품 녹인 물? 아니다. 피트향이 강한 거야. 그리고 이거 후추맛이야? 게다가 짜다. 결국 기침이 나와 볼썽 사납게 캑캑 거리고 말았다. 이게 뭐냐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친절한 사전설명이 있었고 품위를 잃지 않고 싶었다. 무엇보다 저렇게 웃는 얼굴에 어떻게 화를 내?


“탈리스커가 무슨 뜻이에요?”

“단단한 돌로 된 땅을 뜻하는데요, 처음 마실 때는 입안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강렬함 때문에 대부분이 기침을 조금 합니다. 그런데 맛은 어떠셨어요?”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강렬함’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니 내가 마셨던 위스키의 느낌이 그대로 이해됐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스코틀랜드의 푸른 바다를 대면한 돌로 된 섬을 떠올리며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강렬하지만, 기분 좋게 매콤한 향기가 머리를 상쾌하게 했다. 

어제와 다른 맛은 이런 것이구나.

J와 친해진 나는 일주일에 한번은 바에 들러 술을 마시며 그에게 위스키를 배웠다. 그가 설명하는 술에 대한 풍성한 스토리를 듣고 있자면 일상의 뻔한 고민들은 사라졌고, 사람을 만나기 위한 술이 아닌 술 자체, 오직 위스키와 대면하며 술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위스키의 재료로 쓰이는 몰트(맥아, 엿기름)의 종류를 한 가지만 사용해 단일 증류소에서 만들었다는 뜻으로 100% 보리만 사용한다. 다시 말해 단일 품종의 보리를 사용해 특정 증류소에서 만든 순수한 위스키인데, 다른 위스키 원액과 섞지 않고 개성과 품질을 일정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증류소의 숫자만큼 다양한 싱글 몰트가 있고, 숙성 방법과 햇수에 따라 천차만별의 풍미를 가진 싱글몰트 위스키가 생산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 나온다. 


싱글몰트 위스키가 더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도 J에게 들은 말이지만 세상에 제일 비싼 위스키는 있어도 제일 좋은 위스키는 없다. 글렌 피딕 12년산보다 18년이 비싸고 30년은 훨씬 더 비싸지만 어느 게 더 좋은 위스키인지는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위스키는 숙성 기간이 길면 오크통 안의 알코올과 수분이 증발돼 양이 줄어든다. -이것을 엔젤스 쉐어(angel’s share)라 부른다. 양이 줄어드니 희소성 때문에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지만 그게 절대적인 맛의 기준은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싱글몰트 위스키가 더 좋다는 생각은 편견에 불과하다. 발렌타인 위스키의 경우 수십 가지의 싱글몰트 원액을 사용해 입맛에 맞게 블랜딩한 제품인데, 17년산의 경우 원액 중 가장 숙성이 덜된 원액이 17년이라는 뜻으로 실제 그 안에는 20년 30년짜리 고급 싱글몰트가 다양하게 섞여있다. 


“우리나라에 너무 흔해서 그렇지 발렌타인 17년이 얼마나 좋은 위스키인데요. 부드러운 바디감, 캐러멜향, 오렌지 껍질향기, 밀크초콜릿맛, 이 정도 가격에 베스트라고 할 만해요.”

J의 말에 그동안 발렌타인 17년으로 아무 생각없이 폭탄주를 만들어 먹었던 과거가 부끄러워졌다. 


두 번째 질문, 그럼 왜 싱글몰트를 마시나?

싱글몰트만의 매력 때문이다.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맛있는 음식만 먹다보면 재료 하나 하나의 맛이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양념을 최소한으로 넣고, 튀기거나 볶지 않고, 순수한 식재료의 맛이 그립다고 할까? 

더 적절한 비유는 슬로푸드(slowfood) 일지 모른다. 발렌타인, 조니워커, 로열설루트 등 세계적으로 표준화된 블랜디드 위스키 맛에서 잠시 일탈해 나라별, 지역별 개성이 풍부한 싱글몰트의 풍미를 즐기는 것이다.      


늦여름 비가 내리는 날, 가을은 오지 않고 여름은 아닌 날. 퇴근은 했지만 그냥 집에 가기는 망설여진다. 친구에게 연락해 볼까, 하다가 그것마저도 포기했다. 

조금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바에 들어간다. 귀에 익숙한 재즈 보컬의 리듬앤블루스가 흘러나오고 바텐더는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오늘은 어떠셨나요?”

“그저 그랬어.”

“식사 안 하셨네요?”

“그전에 한 잔 하려고.”

J의 눈이 반짝인다. 주문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무슨 기쁨을 바라 이곳에 왔는가? 맥없이 하루를 보내고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 속에 묻히는 느낌.


“비싸지 않으면서 순수하고 오리지널한 거 없어?”

언제나처럼 J는 내 의도를 알아챘다. 절대로 지금의 나는 모를 맛, 알았어도 잊었던 원초적 기분을 일깨워줄 위스키 한 모금. 이래서 위스키란 말의 어원은 ‘생명의 물’을 뜻하는 라틴어 아쿠아 비타(Aquae vitae)에 유래했나보다. 


“맥켈란 10년산, 캐스크스트랭스(cask strength)입니다. 오크통에서 숙성된 원액을 희석하지 않고 병입했기 때문에 도수가 높지만 순수하고 오리지널한 맛이 납니다.”

셰리오크통에서 우러난 마호가니 레드 컬러, 도수가 높은 대신 달짝지근한 위스키맛이 혀끝을 자극한다. 원액이 식도에 이르기도 전에 맥켈란 특유의 과일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래, 오늘은 너 하나면 충분해. 이 시간만큼은 누구의 친구도, 누구의 연인도, 누구의 동료도 아닌 나 하나로 있을래.

심리적 공간이 응축되고 위스키와 나, 둘만이 마주한 시간, 그런 시간에는 조니워커 블루 같이 누구나 아는 고급 스카치 위스키 한 병보다 나를 위해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싱글몰트 한잔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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