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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Aug 29. 2019

'내로남불'의 과학적 이유

이 순간에도 뇌는 당신을 속이고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전방을 보라. 아이맥스로 펼쳐지는 눈앞의 전경은 검은 점 하나 없이 깔끔하다. 고개를 돌려 한 바퀴 돌아보자. 랙 한번 걸리지 않고 완벽한 3D 입체영상이 구현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카메라로 이런 식의 고화질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렌즈가 필요하다. 축구공처럼 렌즈가 여럿 달린 360도 VR 카메라로 촬영을 해도 검은 사각지대가 발생해 컴퓨터로 이를 보정해 주어야 하는데, 전면을 향하고 있는 겨우 눈 두 개로 이렇게 완벽한 영상을 구현하다니.. 

360도 카메라

인간의 뇌는 시신경을 통해 날 것으로 들어온 엄청난 양의 시각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보정하고 있다. 실제 두 눈으로 본 전방의 시각정보를 그대로 이미지화 하면 검은 색으로 표시되는 제법 많은 사각지대가 있겠지만 뇌가 실시간으로 이런 ‘구멍’들을 보정하기 때문에 인간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뇌가 가장 많이 하는 보정 프로세스 중 하나가 화이트밸런스다. 시시각각 바뀌는 주변 조명의 밝기에도 불과하고 동일하게 같은 색으로 인식할 수 있게 실제는 어두운 색이지만 밝게 만들고, 밝은 색을 어둡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벌어진 사태가 2015년 ‘파검드레스 논란’이다. 아래 사진을 보라. 흰줄 무늬의 금색 드레스로 보이는가? 파란 줄무늬의 검은 드레스로 보이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실제 이 드레스는 파랑-검정 드레스다. 하지만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원추세포의 성능과 뇌의 색 보정 프로세스 차이에 따라 완벽하게 다르게 보인다. 만약 이 드레스가 흰색-금색 드레스로 보인다면 당신의 뇌가 색을 보정한 것이다. 당신의 뇌가 판단하기에 이 드레스는 원래 흰색-금색이지만, 역광에 의해 그늘져서 파랑-검정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착오가 없도록 화이트밸런스를 조정해 흰색-금색이 더 도드라지게 만든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내 시각이 이토록 완벽하게 사기당하고 있다니. 물론 파랑-검정 드레스로 보이는 사람은 당연한 거 가지고 왜 호들갑이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전 세계의 70% 정도에게 이 드레스는 흰-금 드레스로 보인다. 즉, 당신은 소수다. -참고로 말하면 현대 사회에 소수에 속하면 위험할 수 있다.


이쯤 되면 ‘눈을 의심한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눈은 충분히 의심할 만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겐 너무 아찔한 그녀, 2004> 처럼 남들에게는 전혀 예쁘지 않은 여자가 내겐 너무 아름답게 보이거나, 고흐의 해바라기는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총총한 별은 밤하늘의 회오리처럼 그려진 것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고흐는 왜, 이렇게 그렸을까?  답, 그렇게 보였으니까.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학문적 대전제가 있다. 

인간이 지각하는 주관적 세계와,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물리적 세계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할 수 있다.

즉, 내 감각이 틀릴 수 있으니 감각을 토대로 한 인식은 더 큰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누가 누구를 때렸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어도 왜 때렸나, 는 ‘사실관계’ 파악에 들어가면 천차만별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때린 놈이 미친놈이다’부터 ‘맞을 만해서 맞았다’는..


‘관찰의 이론 적재성’ 원리에 따르면 자신의 이론에 따라 똑같은 것도 다르게 관찰될 수 있다. 아래 곰브리치의 ‘애매도형’을 주목하자. 

어떤 이는 오른쪽을 보고 있는 토끼로, 또 어떤 이는 왼쪽을 향하고 있는 오리로 관찰한다. 머릿속에 있는 선입관이 관찰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인간의 감각 기관은 부실하고, 뇌는 감각을 속이며, 자신의 이론에 따라 관찰이 달라질 수 있고, 실제 세계는 자기 인식과 다를 수 있다. 


갑자기 다 이해되지 않는가? 왜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는지. 내 잘못이 아닌데 내 잘못이라고 우기는지. 내가 맞는데 왜 자꾸 잘못 알고, 오해하는 거지?


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생각한다. 남의 눈으로 볼 수도 없는데 남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말 자체가 위선이다. 내가 보는 것과 남이 보는 것이 같은지, 다른지도 알 수 없는데 남의 생각을 이해하는 건 더욱 불가능하다. 그럼 어떡해? 영영 담쌓고 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래서 의심을 제안하고 싶다. 남을 의심하는 데에는 모두 익숙하니 이제 자신을 의심해 보자고. 

나는 너와 다르니,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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