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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Sep 03. 2019

자유를 꿈꾸는 그대를 위해

가장 좋아하는 단어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 않고 ‘자유’라고 하겠다.

그런데 ‘자유로부터 도피’라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어떻게 얻어낸 자유인데, 그 자유로부터 도망을 간다는 걸까?


미리 말하자면 에리히 프롬의 저서, 「자유로부터 도피」를 읽어봐도 소용없다. 이 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만큼 무용하다. 아니, 책이 무용하다는 게 아니라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무용하다는 것이다. 동문서답이라고 할까?     


일찍이 인간은 자유롭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 스스로 자유롭다고 우기면 할 말 없다. 최소한 난, 감옥에 갇히지 않아도 육체적으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유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은 빼자. 대학입시가 끝나고 상쾌한 캠퍼스 공기를 마시며 처음으로 자유에 대해 생각했다. 자유가 뭐지?     


지중해와 에게해, 푸른색 바다와 하늘로 둘러싸인 크레타섬, 초록 들판 위에서 그리스인 조르바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빙빙 돌면서 외친다. 

(좌) 그리스 크레타섬    (우)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던진 '자유의 공식'은 완벽해 보였다. 원하는 것도 두려운 것도 없다면 정말 자유로운 게 아닌가?


그런데 아니었다. 원하는 건 없지만 필요한 게 있었다. 특히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했다. 참고로 육체 없이 사는 방법은 아직 모른다.      


뭘 했는지 별로 자유롭지 않았던 대학생활이 끝나고 직장에 취직하고 보니 자유의 물리적 크기는 대학 때 보다 더 위축됐다. 그때는 취직만 하면 자유로울 줄 알았것만.


하루 8시간 이상 일하고, 출퇴근에 2시간을 쓰고, 죽은 듯이 잠자는 시간 7시간, 죽지 않게 배를 채우고, 운동하고, 씻고, 기타 유지관리 하는데 3시간, 어딘지 모르게 사라져버리는  2시간 -이 안에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 허비하는 시간이 포함된다- 을 제외하고 나면 그나마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평균 2시간 정도였다.


그런데 하루에 ‘2시간’이라는 수치도 도달하기 꽤 어려운 수치였는지 꽤 많은 직장인들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다.

10분이라도 나만의 시간이 있으면 좋겠어!

그러면서 비행기 화장실 같은 작은 공간에 자신을 가두고, 그 순간 자유롭다고 느낀다. 한 평도 채 안 되는 그 좁은 공간에서 느끼는 아늑함, 그게 바로 당신 자유의 크기이다.      


강제로 자유를 강탈 당하는 군대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의지로 자유를 헌납하는 결혼-출산-육아-교육, 일련의 과정들도 자유와 대척점에 있거나 틈만 나면 자유를 괴롭히는 자유의 적들이다.      


이쯤 되면 육체적 자유를 주장하는 일은 그만 포기하고 싶다. 장시간 고문 끝에 있지도 않은 죄를 마지못해 시인하는 것처럼 이렇게 고백한다.

육체적으로 나는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해야 할 것들’, ‘필요한 것들’에 끌려 다니는 나약한 육신은 어쩔 수 없어도 나에겐 정신적 자유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문을 못 이겨 죄는 시인했지만 동지들의 이름까지 팔아먹지는 않은 것 같은 자부심이 나를 지탱한다.


그런데 정말 나는 정신적으로 자유로운가? 부리나케 내 정신의 상태를 돌아본다. 내 곳간에 자유정신이 남아 있었나?     


정신이란 게 생리적으로 육체와 밀접하게 얽혀있어서 저 혼자 자유롭기는 무척 험난하다. 요즘 여름처럼 덥기만 해도 말짱한 정신을 유지하는 게 어렵고, 몇 끼 굶기라도 하면 먹이를 찾아 헤매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온 신경이 오직 ‘먹는 것’에만 집중된다.


육체와 결부되어 정신이 자유롭지 못한 얘기는 이쯤에서 두자. 좀 비겁해 보이니까.

오직 정신 하나만을 두고, 정신에 한정지어서 묻자. 정정당당하게.

정신, 너, 자유로워? 마음대로 다 생각할 수 있어?

흔히 ‘생각은 자유’라고 말하지만 따져보면 이것도 편견이고 고정관념이다. 


‘자유’라는 이름을 가진 새(bird) 한 마리를 떠올려보자. 새가 자유롭게 아무데고 날아갈 수 있어야 자유로운 건데 이 새는 그렇지 못하다. 우선 날아가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방 200km 이내만 날아갈 수 있다.


정신도 비슷하다. 경험한 것을 토대로 사유하는 것이라서 전혀 데이터가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내가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 생각의 재료와 틀이 되는 것, 그것을 지평이라 부른다. 지평의 한계는 정신의 한계이며 지평을 넓혀야 정신의 자유도 그만큼 커진다.      


지평을 넓히는 것, 자유정신을 쟁취하기 위해 그래도 이건 쉬운 편에 속한다. 다양한 분야의 경험을 쌓고, 책 읽고, 영화 보고, 여행 하고 등등, 해결책이 명확하다.


그러나 바로 앞에 있어도 ‘자유’라는 새가 갈 수 없는 구역들이 있다. 통제구역이다. 뭔지 몰라도 들어가면 안 될 것 같고, 실제로 위험하고, 스스로 들어가기 꺼려지는 곳이다.


정신의 통제구역이란 우리에게 금기시 되는 생각들을 의미한다. 중세시대에 신을 부정하거나 모욕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죄가 됐다. 어려서부터 종교적 교육을 받다보니 신을 부정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종교적인 게 아니라도 관습에서 비롯된 ‘금지된 생각’들은 많다. 너무 섬뜩해서 감히 떠올릴 수 없는 생각, 떠올려서는 안 되는 비도덕적인 생각,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잡한 생각,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금기’들은 생각의 자유를 제한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유도 실은 생각의 자유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개인의 생각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많았나? 국가에게 충성해라, 군사부일체다, 부부유별이다, 유교사상을 비롯해 나치즘, 파시즘, 사회주의, 민주주의까지, 대부분의 이념은 다수의 생각을 획일화하고 통제하는데 효과를 발휘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한 생각의 잠금장치를 말하려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며 언어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언어 없이 생각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미지나 음악만으로도 심상(心想)은 가능하지만 연역이나 추론은 불가능하다. 생각을 곱씹으려면 반드시 언어가 필요하다.


프로그램을 코딩하려면 C언어든 Java든, php든 뭐 하나는 필요한 것처럼 인간의 사고는 기호나 형상, 수식이라 할지라도 언어를 필요로 한다. 바로 그 언어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이며 정신적 자유를 구속하는 정신세계의 한계가 된다.     

빛의 이중성(입자성, 파동성)

예를 들면,

우리는 1+1=2 라는 수학적 공리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고, 언어적 교육을 통해 나와 환경은 분리돼 있다는 사고를 주입 받았다. 우주도 하나의 공간일 것인데 우주 밖에는 뭐가 있는지 생각하다가는 미쳐버릴 것 같고, 0.00....01처럼 무한히 작아지는 게 왜 0과 같은지 이해하기 어렵다.

양자역학에서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게 뭐라는 건지, 양자의 상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첩의 상태라는 설명은 거짓말처럼 여겨진다.     


인간의 언어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 적합하게 만들어졌지만, 우주처럼 너무 크거나 양자처럼 너무 작은 세계에서는 수식의 유용성을 따라잡지 못한다.      


구구절절한 설명을 통해 생각도 무한히 자유롭지 않으며 정신적 자유도 육체적 자유와 비슷하게 상상 속에만 있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가 논리적으로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건 아니라고. 좀 자유롭게  살고, 좀 자유롭게 생각한다는 것이지 철학적으로 촘촘하게 따져서 정말 자유로운지를 알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동의한다. 좋다. 상상하자. 나는 자유롭다고 가정하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유롭다고.

일 안해도 돼, 스트레스 안 받아도 돼.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아주 좋아, 다 좋은데, 그럼 뭐하지? 나 뭐해야 해?

이게 보통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자유로우면 곧 지루해서 뭘 할지 찾는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하는 건 좋은데, 문제는 혼자 고민해서 뭘 할지 정하는 것도 한두 번이라는 것.

오전에는 책 읽고, 오후에는 밀린 드라마 보고, 저녁에는 친구랑 맥주 한잔 하고, 웹툰 보다가 자야지. 그런데 내일은? 한번 더? 그럼 모레는?


이렇다보니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참고한다. 인터넷 창에 ‘드라마 추천’ ‘맛집 추천’ 키워드를 치고 검색결과를 서핑하며 시간을 보낸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으로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며 그들이 생활을 부러워하고 흉내내기도 한다.


유사한 '참고하기'의 종류가 늘어나고,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에 집착하다 보면 스스로 자유를 구속하고 남의 생각과 결정에 종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결정장애 증후군, 스스로의 결정을 믿지 못해 차라리 남이 결정하게 놔두고 나중에 ‘남탓’하는 것을 선택한다.      


에리히 프롬 시대의 ‘자유로부터 도피’는 신의 권위에서 탈피해 얻은 자유를 ‘나치즘’에 위탁하는 형식이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사회관계망에서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뭐 어떻게 살든, 어떤 삶의 형식을 선택하든 그것 역시 자유다. 자유롭게 남의 삶을 훔쳐보고 남의 일상을 흉내내는 것,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도 문제될 것 없다.      


자유라는 단어가 가진 뜻이 너무 자유로워서 어떻게 살아야 자유롭게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 막연하게 중얼댄다.

나는 자유롭고 싶어.

그러나 허무하다. 나의 자유는 너무 허망해서 도피하고 싶다.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 신이 모든 걸 결정하고 책임질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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