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욕에 대한 고찰 - 中
목욕 이야기 - 온천욕에 대한 고찰 上, 中, 下
① 목욕, 자주 하세요?
② 목욕의 기쁨, 우레시노
③ 목욕의 멋과 맛
벳부, 유후인, 하코네, 아리마 등의 지명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영 처음 들어보는 이름은 아닐 것이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본 온천의 첫맛을 이 네 곳에서 경험한다. 일본 온천의 대표선수들이라고 봐도 되겠다.
언급한 각 지역의 연간 방문객 수는 4,500만 명, 400만 명, 2,000만 명, 700만 명 정도다. 한마디로 많다. 사람 구경만 실컷 하다 올 것 같은가? 신기하게도 목욕만큼은 이런 대형 관광지에서조차 사적으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다녀와 본 사람이라면 필시 느꼈을 것이다. 한국식 온천 워터파크와는 사뭇 다른 그 분위기를 말이다. 이것이 일본 온천의 미덕이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내가 소개하려는 곳은 이런 일본의 간판급 온천지가 아니다. 규슈 내 온천으로 한정하고 순위를 꼽아도 다섯 손가락 안에 못 든다. 깍두기 급이라고나 할까. 철도 강국이라는 일본인데, 이 시골 마을에는 간이 기차역조차 없다. 고속버스를 타더라도 운이 좋아야 시내 버스센터까지 진입할 수 있다. 하루에 27회 운행하는 고속버스 중 단 4대만 우레시노 시내까지 진입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인근 IC에서만 정차한다. 이때 마을로 찾아갈 수단은 직접 고민해야 한다. 우레시노는 그런 곳이다.
왜 이런 이름 없는 곳을 소개하려는지 이유를 설명하기에 앞서 젠트리피케이션 얘기를 좀 해보겠다. 이건 가로수길, 경리단길, 서촌, 연남동 등 좀 뜬다 싶은 동네라면 으레 겪는 몸살이다. 도심의 임대료가 싼 지역에 독창적 사업가나 예술가들이 하나 둘 들어와 그곳 특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입소문을 타고 유동 인구가 점점 몰리면, 임대료도 훌쩍 치솟는다. 결국 동네의 이름값을 높인 세입자들은 내쫓긴다. 빈자리는 비싼 임대료를 지불할 대형 프랜차이즈 점포가 속속 메운다. 그렇게 서울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비슷비슷한 번화가 하나가 또 탄생한다. 사람 많은 대도시의 숙명처럼 말이다.
별안간 우레시노에 기차역이 없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중교통수단으로 오기 불편하다는 그 점에 역설적으로 감사한다. 감수해야 할 난관이 있으므로, 구름처럼 몰려들 사람들도 없다. 꼭 오고 싶은 사람만 부러 어려움을 감당하며 온다. 그것이 우레시노를 우레시노답게 만들었다. 이곳은 아직 고요하고 작은 마을이다.
나 역시 많은 한국 사람들이 그렇듯 유후인에서 일본의 온천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실로 오랜만에 즐겼던 목욕이었다. 앞으로 매년 겨울마다 일본을 찾겠노라고 다짐하게 만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료칸의 노천탕에 몸을 맡긴 순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목욕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났다. 세사에 찌든 몸을 씻고 자연의 정결함을 몸에 채우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유후인은 지난 50여 년간 주민이 힘을 합쳐 지금의 위상을 일구어낸 관광 도시로, 그 자체가 성공적 지방자치의 교본이나 다름없다. 이곳 최고의 히트 상품은 그래서 온천이 아니다. 문화 예술적 요소에 이익 활동까지 잘 접목시켜 만든 민예촌 거리다. 11Km나 되는 긴 거리지만 차는 진입할 수 없다. 오직 두 발로만 걸어야 하는데도 사람들은 수고를 마다 않는다. 양쪽으로 늘어선 아기자기한 미술 공방, 공예품점, 상점마다 사람들이 북적인다. 온천만 하러 가기에 유후인은 볼거리도 할 거리도 이렇게 많다.
우레시노는 어떤가. 민예촌 거리처럼 잘 꾸며놓은 번화한 상점가도 없고,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행인도 참 드물다. 휑한 느낌마저 든다. 다른 할 일이 많지 않으니 맘만 먹으면 료칸에 하루 묵는 동안 온천만 세 번 이상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렇게 목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완성되었다.
게다가 온천이 진짜배기다. 우레시노 온천은 일본 3대 미인탕이라는 명성을 예로부터 지금까지 자랑하고 있다. 피부 미용에 특히 효과가 있다는 얘기인데, 실제 온천물에 몸을 담가보면 몇 초 지나기도 전에 바로 느껴지는 발군의 매끄러움에 놀라게 된다. 국내외 10여 곳의 온천을 두루 다녀본 경험과 비교해보아도 우레시노의 수질은 월등하다. 온천수에 다량 함유된 나트륨이 마치 점액처럼 끈적거리는 느낌을 선사하며 부드럽고 윤이 나는 피부를 만들어 준다고 한다.
온천 마을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의 거리가 채 2Km도 되지 않을 만큼 작다. 그 안에 두 군데의 족탕은 물론 증기 족욕 시설까지 있어 다양한 형태의 온천욕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게 우레시노의 또 다른 장점이다. 모두 무료다.
족욕은 신체에 매우 유용하다. 심장에서 멀리 떨어진 다리에 혈류를 모아줌으로써 전신 말초까지도 피가 활발하게 퍼져 돌도록 돕기 때문이다. 수족냉증을 완화시켜주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나이가 들수록 혈액순환에 장애가 많아지는데, 그럴 때 족욕은 혈행 촉진에 큰 도움을 준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시볼트 족탕에서 발을 담그고 있노라면 근처 상점에서 우레시노 특산품인 녹차 한 잔을 건넨다. 시음해보라고 주는 것인데, 일회용 컵이 아닌 예쁜 도자기 잔에 차를 담았다. 웃으며 맛보라고 할 뿐 강매는 전혀 없다. 작은 호의로 기분 좋은 감동을 준다. 미끈한 온천물에 발을 데우며 맛 좋은 녹차 한 잔을 홀짝이고 있으면 세상만사 급할 게 없어 보인다. 마음속이 여유로 충만해진다.
발을 적시기가 꺼려지는 사람이라면 증기 족욕기를 추천한다. 앉아서 다리를 집어넣고 나무 뚜껑을 덮으면 끝이다. 훈훈한 증기가 다리를 감싸고, 족욕을 마친 후에도 수건으로 물기를 따로 닦아낼 필요가 없어 편리하다. 족욕 시설이 설치된 곳에서 무료로 wifi를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우레시노 시의 센스도 돋보인다.
우레시이(嬉しい), 기쁘다는 말이다. 우레시노라는 지명은 실제 이 기쁘다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1300년 전, 한 부상병이 이곳에서 솟는 온천수로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보고 기뻤던 진구 왕후가 외친 “아, 우레시이!”라는 말이 유래가 됐다는 것이다.
일본 온천을 처음 경험한 곳은 유후인이었지만, 내게 목욕만으로 채워진 기쁨을 일깨워준 곳은 우레시노였다. 잊었던 목욕의 참맛을 다시 만나게 한 곳, 그래서 매년 찬바람 불 때면 찾아가지 않을 수 없는 곳. 우레시노에는 진짜 목욕이 있다. 거기서 맛보는 기쁨이 있다.
Mila의 목욕 이야기 - ①
Mila의 목욕 이야기 - 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