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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장갑 》1화. 피아노, 꿈의 파편

겨울 나비와 시골 개구리

by 밍당

《벙어리 장갑 》

➤ 《〈벙어리장갑〉전체보기


피아노, 수천 개의 눈동자. 그리고 어떤 한 남자.

얼어붙은 손가락에 건네진 따뜻한 벙어리장갑.

치유와 회복의 겨울 단편.

감성과 일러스트로 그려낸 따뜻한 이야기.



거대한 홀.

수천 개의 눈동자.

무대에 외롭게 서 있는 피아노.

그리고 그 앞에 앉은 한 명의 피아니스트.


건반은 선율을 따라,

선율을 손길을 따라 춤을 춘다.


때로는 고독을,

때로는 낭만을,

때로는 열정을.

변화무쌍하고도 아름다운 음악이건만,

이상하게도 한 박자가 느리다.


그녀의 버릇 때문일까?

음향 시스템의 문제일까?

피아니스트는

연주하는 내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잠에서 깬다.

차가운 공기에 축축한 등이 식어버려

기분이 영 찝찝하다.

매번 상쾌한 아침을 기대하건만

닿을 수 없는 환상같이 느껴져

이내 우울해진다.


부스스하게 떠버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려다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침대 밖으로 다리를 뻗는다.

추워-

겨울은 추운 거구나.


그 당연한 걸,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기능을 멈춘 기계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깨닫게 되었다.


그렇구나.

난 이제껏 잠에서 깨지 않았던 거야.


봄꿈에서 깨지 못한 나비는

계절을 잊고 미약한 날갯짓을 하겠지만,

결국 겨울의 눈보라에 힘없이 떨어지겠지.



시골의 겨울은 유난히 춥다.

그게 농로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배기가스를 내뿜는 차도,

빼곡히 들어선 빌딩 숲에서 나오는 실외기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오래간만에 산책을 나온 사람치고는

잊지 않고 나름대로의 방한대책을 하고 거리를 나선다.


그 흔한 아스팔트길도 하나 없는 한산한 농로길.

추수가 끝난 지도 한참 지났고

이젠 들녘을 다니는 인기척조차 없다.

이 시기에 이곳에 오는 사람이라면

벌써부터 내년을 준비하는 부지런한 농부들뿐이겠지.


자박자박—

오직 내 발자국 소리만이 주변의 공기를 희미하게 떨리게 한다.


이 길이 어디까지 이어져있는지 잘은 모른다.

항상 어느 정도까지만 가면 한기를 느껴서 되돌아오곤 했으니까.


되돌아간다.

그것만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니까.


도망간다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지만

오히려 그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쓴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아.”


튀어나온 돌멩이를 밟아 넘어질 뻔했지만

용케 중심을 잡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옆에 누가 있었다면 제법 부끄러웠을 정도로

팔을 허둥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발밑에 구르고 있는 자갈을 바라본다.


돌멩이.

툭 튀어나온 돌멩이.


뭐가 모나서

너는 왜 다른 친구들처럼 얌전히 땅 속에서 자고 있지 않니?


녀석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별 것도 아닌데도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이질적인 녀석.

애처로워 손에 쥐어 보았다.


차갑다.

까끌까끌한 감촉.

흙이 닥지닥지 붙어 있다.


문득 흙을 털어보려 해 봤지만

딱딱하게 굳어서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리저리 낑낑거리다

결국 옷이 더러워지고 말았다.


게다가 맨손에 차가운 걸 잡고 있으니

손끝을 타고 온몸에 한기가 맴돈다.


하—

한숨이 나온다.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이 녀석이 대체 뭐라고.


돌멩이를 잡고 힘껏 던져보았다.


그래봤자 그리 멀리 날아가진 못하고

길가의 담벼락 역할을 하고 있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넘길 정도였다.

콩, 하고 작게 소리가 들렸다.


—아.

괜한 짓을 했구나.


날아간 돌멩이가 시선에서 사라지자

불현듯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조여 온다.


내 아무 이유 없는 행동에

원래 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

다른 곳에 살게 될 돌멩이.


후회스러웠다.


미안.

앞으로는 나 같은 실없는 사람 손에 잡히지 말고

조용하게 살아가려무나.


“읏.”


아까 차가운 걸 만져서 그런 걸까.

한기가 온몸을 덮친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아니,

도망가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발걸음을 돌리려니,



“이봐요.”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성난 남자의 목소리.


이걸 다른 곳에서 들었다면 상당히 무서웠겠지만

제법 긴 시간을 인기척 없는 농로길을 걸었다 보니

오히려 그의 목소리가 반갑기도 했다.


시선을 뒤로 돌리니

제법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자가

머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이런 걸 사람한테 던지면 혼나야 돼요, 안 혼나야 돼요?”


아마도 근처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으리라.

두툼한 겨울 야상 차림에

벙어리장갑을 메고 있는 그 사람은

눈을 찌푸리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

돌멩이에 맞았나 보다.

눈먼 돌멩이에 말이야.


이러면 안 되는데,

흘러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수확이 끝나 인적도 없는 논길에서

갑자기 날아온 돌멩이에 피격당할 확률은 과연 얼마일까.


죄송해요.

이 말을 하려다가 급하게 입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허, 웃어?”


아.

들켰다.


웃을 상황이 아닌 모양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엄청 아팠을 거야.


어떤 성인군자라도

중량감 있는 돌멩이를 머리에 느닷없이 맞는다면

엄청 화가 나겠지.



“죄송…….”


갑작스럽게 말을 하려니

말 뒷꼬리가 흐려졌다.


너무 오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보니

목이 탁 막혀버렸다.


미안해요.

하지만 정말 미안한 건 사실이에요.


그러니 너무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을 담아 사과를 한다.


저 남자가 보기엔

돌멩이로 사람을 맞춰놓곤 웃는 것처럼 보였으니,

...아니 정확하겐 정말로 웃었으니까

날 사이코패스로 봐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애꿎은 돌팔매질에 당한 불쌍한 개구리 같은 남자.

그의 반응이 무섭기도 하고 걱정도 됐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게,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미안해요.

내 머리카락이 나의 표정을 잘 가려주길 바랄 뿐이었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어디론가 흘러가길 바라며 적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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