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돌의 책 글 여행 Dec 28. 2022

문학에 대한 사랑 없이는 비평도 없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나의 인생 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폴란드 사람입니까, 독일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니면?"이라는 말은 제3의 출신지를 암시하는 것이리라.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절반은 폴란드인, 절반은 독일인, 그리고 온전한 유대인입니다." 그라스는 놀라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내 대답에 만족한 것 같았다. 아니 감탄한 게 분명했다. "그만, 됐습니다. 더 말씀하셨다가는 명답만 망가지겠어요." (p.11-12)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독일 문학단체 '47그룹' 총회에서 자신의 정체를 묻는 한 작가의 질문에 재치 있는 답변을 한다. 그는 절반의 독일인이자 폴란드인이며 온전한 유대인이다. 1920년 폴란드계 유대인 아버지와 독일계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홉 살 되던 해 베를린으로 가족 모두 이주한다. 학창 시절 베를린에서 독일 문학과 음악에 심취해 방대한 양의 문학작품을 읽고 연극에 빠져든다. 문학평론가를  꾸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에 입학 신청을 하지만 거부당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로 추방당한다. 그는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참혹한 현장에서 견뎌내며 기적처럼 살아남는다. 어렵사리 독일로 망명해 끝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문학비평가의 꿈을 이룬다. '문학의 교황'으로 불리어지기까지 '유례없는' 자신의 삶에 관한 기록 남기고 떠난다.




<나의 인생, 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문학동네, 2014)은 오직 '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극한의 고통을 넘어 생의 한가운데를 관통해온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자서전이다. 나아가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범죄의 실상을 기록한 회고록이자 20세기의 역사서다. 이 책은 시대별로 총 5부로 구성했다. 전반부(1~2부)는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역사'에 비중을 두었고, 후반부(3~5부) '문학' 평론가로 치열하게 살아가며 성공을 거두는 삶의 여정을 다뤘다. 시종일관 문학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던 그는 종전 후, 1960년부터 2000년까지 40년 동안 무려 8만 권이 넘는 책을 비평했다. 미국, 스웨덴, 독일 등 유수의 대학에서 독일문학을 강의했고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하이네 메달, 토마스 만 상, 괴테 상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



그러나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요소도 내가 평론가로서 거둔 성공에 기여했을지 모른다. 주제넘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여기에서 내 신념을 밝히고 싶다. 문학은 내 삶의 기쁨이다. 여러 작가와 작품에 대한 내 견해, 그리고 잘못되고 빗나간 것까지 포함하여 내가 내린 모든 평가들 속에 그 신념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엔 문학에 대한 사랑, 때론 섬뜩할 정도의 이 열정이 평론가인 나로 하여금 비평 활동을 하게 하고 내 직분을 다하게 만들었다. 이따금 다른 이들이 나 개인을 봐줄 만한 사람으로 여기고 예외적인 경우에는 호감이 가는 사람으로까지 생각하는 것도 이 사랑 덕분일지 모른다. 아무리 되풀이해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 그것은 바로 문학에 대한 사랑 없이는 비평도 없다는 말이다.(p.393)



문학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그를 독일의 독보적인 문학비평가로 우뚝 서게 한다. 하지만 때때로 섬뜩할 정도의 열정과 신념이 그를 잔인한 평론가로 낙인찍히게 한다. 수많은 작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친구보다 적이 많았지만 작가와 비평가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부정적인 평론들을 골라 <혹평 일색>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고 이에 견줄 만한 반대 색깔의 책 <호평 일색>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책에 대한 혹평도 감수한다. 문학비평의 역사가 혹평을 많이 한 평론가는 특히 자주 공격당하고 그 자신도 혹평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 모든 것들을 감수하며 그가 여러 작가와 작품에 대한 견해를 명쾌하게 거침없이 비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문학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이 책은 자서전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독자들의 관심을 받으며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독일에서 120만 부가 팔리고 15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번역 출간됐다. 생생하게 써 내려간 '유대인 대학살'의 잔혹한 실상과 '문학'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던 그의 삶이 대서사를 이끌어가며 강렬한 전율과 감동을 다. 특히 20세기  역사적 비극을 뛰어난 필력으로 완성도 높게 써 내려간 점과 독일 문학에 대한 폭넓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다양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인용과 비평, 부연설명이 많아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있는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역사적인 회고와 문학에 대한 사랑에 매료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의미한 책이다. 서평과 비평에 관심이 있거나 세계사와 문학에 관심 있는 분들, 특히 독일문학을 애정하는 독자들에게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혼이 죽은 자로 하여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