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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Jul 30. 2023

변화, 죽음 혹은 신의 색 '빨강'

오르한 파묵, 《내 이름은 빨강》, 민음사, 2019




수많은 책들 중에 어떤 을 읽으면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 후로 책 표지에 덧붙인 추천평을 눈여겨보았고,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문구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런 열망이 나를 이끌어준 걸까? 숭례문학당에서 독서토론리더 과정을 단계별로 밟은 후, 지난 6월 첫 개설한 모임이 '노벨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기'다.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문학아카데미에서 1901년부터 세계 문학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뛰어난 작품을 선정하여 수상해오고 있다. 2022년까지 역대 199명의 수상 작가를 배출했으니 작가와 작품을 나열해 보면 어마어마하다. 이렇게 유의미한 책들을 혼자 읽는 것에서 나아가 뜻이 같은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는 마음이 설렌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기' 1기는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으로 시작다. 1952년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오르한 파묵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국가인 튀르키예(터키) 작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후에도 매번 더 뛰어난 작품을 선보이며 문학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거머쥔 독보적인 작가다. 그의 작품 내 이름은 빨강(1998)은 현재 35개국에서 출간되었고, 프랑스 '최우수 외국 문학상'(2002), '인터내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2023) 등을 안겨 주었다. 2003년에는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을 발표했고, 2006년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내 이름은 빨강>은 현대의 가장 독특한 작가 중 하나이자 최고의 소설가 파묵의 기억할 만한 성공작이다.
- <타임스>



 내 이름은 빨강서양의 문명 간 충돌과 갈등을 심도 있게 다룬 문제작이다. 소설 속 배경인 16세기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국가인 튀르기예의 문화적 정체성을 잘 드러낸. 표면적으로 이 소설은 궁정화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예술적인 갈등과 이로 인해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추리기법으로 써 내려간 역사소설이다. 또한 시대의 변화 속에 구문화와 신문화의 충돌에서 갈등하고 번뇌하며 정체성을 찾아가는 예술가들에 관한 이야기다. 다른 한편으로는 절세미인 셰큐레와 어릴 적부터 그녀를 사랑하는 카라, 맹목적인 연정을 품은 시동생 하산, 딸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아버지 에니시테의 복잡미묘심리를 섬세하게 풀어낸 연애 소설이다. 이와 함께 생물과 무생물이 작중 화자로 말을 하는 동화적 요소로 쓰인 포스트모던 소설이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p.13)



소설 첫 장부터 흥미롭다. 이스탄불 외곽의 버려진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는 세밀화가 엘레강스가 화자로 등장해 궁금증을 유발한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궁정 화원 화가였던 자신이 나흘 전에 어떻게 살해당해 우물 바닥에 던져졌는지를 비통하게 하며 "나의 죽음은 우리의 종교와 전통 그리고 세계관을 부정하는, 섬뜩한 비밀 결시와 연루되어 있다."(p.18)암시한다. 이어 소설의 주인공 카라가 나고 자란 이스탄불로 십이 년 만에 돌아와 사랑 때문에 자신을 떠나게 했던 옛 연인 셰큐레와 재회한다. 그녀의 아버지 에니시테가 술탄의 명으로 만들고 있는 이슬람 세밀화의 전통을 이어 갈 밀서 제작을 도우며, 목숨 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살인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그렇다면 빨강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억에 의지해 말을 그리는 세밀화가가 물었다. "색의 의미는 그것이 우리 앞에 있다는 뜻이며, 그것을 우리가 본다는 것을 뜻하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빨강을 설명할 수 없네."
 (...)
 아름다운 그림의 검고 흰 부분을 나의 충만함과 힘 그리고 생동감으로 채우는 것은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붓이 나를 종이에 퍼지게 할 때는 온몸이 근질거리듯 즐거웠다. 이렇게 내가 칠해지는 것은 마치 이 세상을 향해 "되라!" 라고 하자마자 세상이 온통 나의 핏빛 색으로 물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나를 보지 않는 사람은 나를 부인하겠지만 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 《내 이름은 빨강》 1, p.363



'빨강'은 변화, 죽음 혹은 신의 색을 의미한다.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 "인생과 예술, 사랑, 그림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한다. 또한 "나의 모든 소설 중에서 가장 색채감 있고 가장 긍정적인 소설"(p.387)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 속에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튀르기예의 문화적 정체성과 동서양의 문제를 지난 역사와 일상의 삶을 토대로 밀도 있게 다룬다. 16세기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쇠퇴하고 멸망하는 가운데 느끼는 세밀화가들의 갈등과 고민은 변화하는 역사 속, 인간의 공통적인 고뇌를 투영한다.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는 노벨문학상 심사평(스웨덴 한림원)의미가 고스란이 담긴 이 책은 세계사에 한걸음 성큼 다가설 있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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