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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Jul 26. 2021

세대를 잇는 사랑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한 인간으로 태어나 부모, 자식, 형제자매의 연을 맺고 희로애락(喜怒哀樂)감정을 느끼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시계추가 쉼 없이 돌아가고 하루, 한 달, 한해, 두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모두 신이 주신 각자 배역을 소화해낸. 나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종종 가슴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질문을 자문자답하고 있을 즈음, 다양한 삶의 모습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을 만났다.




정세랑 작가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책장을 열자 가계도가 한눈에 들어오며 내 상상력을 뒤받침 해주었다. 미니시리즈를 보듯 머릿속에 등장인물과 장면 장면을 생생하게 그렸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도 신선했다. 각 장마다 여성 예술가 심시선의 짧은 기고  또는 인터뷰 글로 시작 글을 다. 이어 시선으부터 뻗어 나온 자손들이 할머니와의 추억을 회고하며 각자가 지닌 현실적인 고민들을 풀어나간다.


<시선으로부터,>는 여성 예술가 심시선의 제사를 10년 만에 하와이에서 지내기 위해 한국과 미국에 사는 가족이 모두 모이게 되는 이야기. 그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 전쟁을 지나며 하와이로 이주한다. 독일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와 사는 동안 두 번의 결혼으로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결혼한 두 딸과 아들을 통해 네 명의 손녀와 한 명의 손자가 있다. 여성 예술가로서 문단과 화단의 주목을 받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심시선 그녀를 추모하는 자손들 삶을 잇는다. 세대를 잇는 이야기 속에 여성차별, 건강과 질병, 학교폭력, 환경문제 등 각자가 삶을 살아내며 부딪히는 갈등과 사회적인 이슈들버무려 깊이 있게 파고든다.


기일 저녁 여덟 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 <시선으로부터> 83page
큰딸 명혜의 제안


하와이에서  주기 기념으로 딱 한번 제사를 지낸 딸 명혜의 제안은 솔깃하고 신선하다. 여성의 입장에서 해방감과 대리만족의 감정을 느끼게 다. 어느 가정이나 제사의 형식을 바꾸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친다. 개개인의 역사가 담긴, 속 시끄러운 집안 사정과 불편한 시선을 감내하며 여성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가족들은 여성이 목소리를 내며 산다. 소설의 형식으로 작가가 여성의 입장을 속 시원하게 대변해주는, 여성을 위한 소설이다.




우리 집도 비교적 여성이 목소리를 내며 살아왔다. 우리 집 가계도는 할머니로부터 시작된다. 아흔넷에 생을 마감하신 할머니는 살아생전 존재감이 대단했다. 반면에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빈농의 딸로 태어나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빈농의 아들이었던 할아버지에게 시집와 억척스럽게 농사 일로 자수성가했다.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여장부였던 할머니는 셈이 빠르고 이재에 밝았다. 여러 자식 중에 아들 둘만 남고 위로 셋을 질병으로 잃었다. 그래서인지 열아홉이 된 아들을 서둘러 장가보냈다. 세 살 어린 아버지에게 시집온 엄마는 교육자 집안에서 9남매의 맏이로 성장했다. 그런데 여자라는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여자가 배워 무엇에 쓰냐고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한 할아버지를 지금도 미워하신다. 그런 엄마가 짠하고 안타까워 나는 얼굴 한번 뵌 적 없는 외증조할아버지를 덩달아 미워했다.


할머니와 엄마의 영향으로 나는 위로 오빠가 셋, 언니가 한 명 있었지만 아들 딸 차별 없는 분위기 속에 자랐다. 막내인 내가 할머니를 가장 닮았다는 이유로 주목을 받았다. 신기하게도 할머니와 나는 띠와 생일이 같았다. 앞짱구인 외모와  급한 성격까지 '똑 닮았다'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어릴 적엔 할머니를 닮았다는 소리가 너무 싫었다. 할머니의 기에 눌려 마음고생 하는 엄마가 안쓰럽고 속상했다. 여성스럽고 다정다감한 엄마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할머니의 기 눌림 속에서도 다행히 엄마는 아버지의 지지와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엄마는 며느리들 눈치 보인다며 모든 제사 형식을 바꿨다. 아버지를 설득해서 일 년에 한 번 산소에서 시제 지내는 걸로 매듭지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다. 할머니와 엄마가 50년 늦게 태어났더라면 어떤 삶을 살고 계실까? 부모이기에 앞서 같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니 시대를 앞서 태어난 할머니와 엄마의 삶이 아프고 아려온다.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며 배움의 기회를 제약 없이 고 살아온 내 삶을 돌아보게 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할머니와 엄마의 헌신에 감사하고 숙연해진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내신 할머니와 엄마 세대의 사랑과 소망을 품고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 나의 삶은 더이상 나만의 삶이 아닌 것이다. 다음 세대에 건강한 정신과 가치를 물려줘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세대를 잇는 사랑의 기반 위에서 나는 오늘도 성장하고 있음에 감사드린다.



※ <시선으로부터,>를 쓴 정세랑 작가는 2010년 '판타스틱'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이만큼 가까이]로 창비 장편소설상을, 2017년 [피프티 피플]로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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