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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Nov 03. 2021

하루키의 굴튀김처럼 '대봉'으로 진정한 나를 만나볼게요

<잡문집>, 무라카미 하루키, 비채, 2011


나는 글쓰기를 거의 음악에서 배웠다. 역설적이지만, 만약 그토록 음악에 빠져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소설가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설가가 된 지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여전히 소설 창작의 많은 방법론을 뛰어난 음악에서 배우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음악을 통해 영감을 얻는다. 하루키는 어릴 때부터 많은 책을 읽고 소설에 푹 빠져 지냈지만 동경하는 작가만큼 잘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책 읽기는 취미로 내려놓았다. 음악을 향유하는 하루키는 음악을 직업으로 삼았다. 조그만 재즈 클럽을 열어, 아침부터 밤까지 좋아하는 재즈를 들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며 영감을 얻는다. 이십 대에 소설에 푹 빠져 지내던 시절이 있었지만 작가가 될 만큼 실력을 향상할 자신이 없어서 글 쓰는 일을 일찌감치 내려놓았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마케팅하는 일을 해오며  다름을 배웠다. 누군가를 만나고 알아가는 일이 여전히 설레고 즐겁다.


<잡문집>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미발표 에세이부터 미수록 단편소설까지 69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잡문집>에서 소설가인 자신세계를 보여준다. 하루키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자기란 무엇인가
혹은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
'진정한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진정한 나란 무엇일까? 굴튀김에 관해 (원고지 4매 이내로) 얘기해보자. 아래의 글은 이야기의 본래 줄거리와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굴튀김이라는 것을 잘 풀어서, 나 자신을 얘기하고 싶다. 데카르트나 파스칼이 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나에게는 '굴튀김에 관해 이야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그리고 그 막막한 길을 헤쳐나가다 보면, 분명 어딘가에서 나 나름의 계속성이나 도의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까지 든다.  (31쪽)


젓가락으로 그 튀김옷을 둘로 툭 자르면, 그 안에 굴이 여전히 굴로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겉보기에도  굴이고, 굴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빛깔도 굴이요, 형태도 굴이다. 그것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깊은 바닷속에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꼼짝도 않고, 밤낮도 없이 단단한 껍데기 속에서 굴다운 것을 (아마도) 생각하며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접시 위에 있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굴이 아니고 소설가라는 사실이 기쁘다. (32쪽)



하루키는 <잡문집>에서 '진정한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읽는 이의 생각을 끌어낸다. 굴튀김 이야기는 하루키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추운 겨울날의 해 질 녘에 단골 레스토랑에 가서 맥주(삿포르 중간 병)와 굴튀김을 맞이하는 하루키, 읽는 이에게 자신만의 굴튀김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유다. 나도 따라 써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가을에 딱 맞는 대봉 이야기를  내려간다.  





대봉 이야기


우리 집 대봉이 몇 개 남지 않았다. 한 박스 들여놓은 대봉이 줄어들며 가을익어간다. 하나 둘 셋, 박스 안에 남은 대봉을 손가락으로 센다. 남은 대봉 중에 한 개를 집어 든다. 반쯤 익은 대봉을 주물럭거리며 덜 익은 반쪽을 빨리 익게 한다. 꼭지를 칼로 조심스레 잘라내고 접시에 올려놓는다. 달달내음에 침이 고인다. 중간 크기 티스푼으로 대봉 테두리 안쪽에서부터 한 스푼 가득 떠서 입 안 가득 품는다. 혀끝을 감도는 맛이 말랑하고 달달하다. 한번, 두 번, 세 번 듬뿍 떠 입안 가득 품는다. 마침내 텅 빈 항아리 모양이 된다. 항아리 모양의 테두리 안쪽으로 조심스레 살살 긁어모은다. 마지막 한 입이 입안으로 들어간다. 꿀꺽, 입안에서도 텅 비어진다.





가을에 만나는 대봉, 단감, 연시, 홍시, 곶감은 나에게 결핍의 열매다. 감이 주렁주렁 달린 집을 지나갈 때면 발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본다. 어린 시절 감나무가 많은 시골 마을에 살았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그 흔한 감나무가 없었다. 집에 감나무가 있었는데 우리 집 아래채 지붕 위로 무성한 가지가 내려앉았다. 가을날 탐스럽게 열린 감을 따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가슴이 콩닥거리는데도 감나무 사이로 망을 보며 조심스럽게 감을 땄다.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은 횡재한 날이었다. 골목에 우수수 떨어진 감을 욕심껏 주워올 있었으니까. 가을이 오면 감나무에 얽힌 어린 시절 추억과 함께 대봉을 한 박스 들여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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