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코로나 확진자수가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일주일째 7천 명을 넘기더니 급기야 9천 명에 육박하는 숫자가 나왔다. 경악스러운 결과다.
현재 프랑스 신규 확진자가 늘어난 이유는 검진수가 대폭 늘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심한 호흡곤란 같은 중증’이 아니면 검사 자체를 받을 수 없었고 의사를 통해야만 가능했던 검사를 1주일에 100만 건 넘게 확대했다. 그러자 숨어있던 확진자들이 드러났다. 처음으로 무료 선별 진료소가 시내에 몇 군데 설치되었다. 지난주부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음이다. 3월부터 그 난리통을 겪고도 ‘이제야 처음으로’ 무료 선별 진료소가 생겨난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드라이브 스루 검사는 유럽에도 도입되지 않았냐고 할 것이다. 몇 나라의 일부 도시 특정 구역에서 시도를 했었고 4월 초 파리에서도 있었다. 하지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검사가 아닌 ‘의료진에 한정된 검사’였다. 주변 프랑스인 누구에게서도 여직껏 코로나 검사를 해봤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프랑스는 일반인의 코로나 검사 접근성이 매우 떨어져 있었다. 그 말은 프랑스 사회가 여전히 코로나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프랑스인들이 코로나에 대한 경각심 없이 ‘나의 자유만 소중히 여기는’ 모습은 분명 왜곡된 개인주의였고 자기중심성이 낳은 이기심이었다. 이러한 개인들 무의식의 합인 사회 구성원들의 함의. 중세 유럽인들의 ‘오래된 무지’에서 우리는 잘못된 함의가 가져온 치명적인 결과를 보았다. 그리고 그 무의식적 관성은 현재의 코로나 결과와 연결되어 있다. ‘무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것에 안주하려는 마음이다.
나의 안일함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그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무지. 그 무지를 고집하려는 마음이야 말로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유럽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변화에 더디고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지를 말이다. 그들은 ‘전통’이라는 말로 포장해 놓았지만 실은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이고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이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닫혀 있는 마음’이며 ‘나의 것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 결과물을 우리는 이 사회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
변화에 둔감한 이들의 성향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열쇠 문화’다. 중세 마을은 아름답고 백 년 이백 년씩 되었다는 집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선망의 마음이 생긴다. 문제는 옛 것을 지키는 것은 좋으나 불편한 것을 편리하게 바꾸려는 마음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지금도 모든 집과 건물에서 열쇠를 사용하는데 열쇠 형태는 철저히 그 집 연식을 따른다. 그 집이 백 년 된 집이면 백 년 전 열쇠를 그대로 쓴다. 그 무겁고 두껍고 불편한 것을 개선하려는 의지 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열쇠마다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지 열쇠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문 하나 여는 것이 그렇게 스트레스 일 수가 없다. 열쇠가 손에 쥐어져 있어도 문을 열지 못하고 끙끙대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열쇠 구멍만 간편하게 바꾸면 될 것을 그 간단한 걸 하지 않고 21세기에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무거운 열쇠들을 치렁치렁 달고 다니면서도 말이다.
이들이 변화를 얼마나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지는 ‘운전 형태’에도 나타난다. 프랑스는 아직도 운전자들이 ‘오토’가 아닌 ‘스틱’을 사용한다. 운전 학원에서는 모두가 수동 방식으로 운전을 배우고 출시되는 차량들도 대부분 기어 변속 차량이다. 거의 오토 면허를 가진 한국인들은 여기서 운전을 하려면 운전을 새로 배워야 한다. 오토차는 수요가 적기에 찾기도 어렵고 가격도 비싸다. 오토라는 훨씬 간편하고 편리한 방법이 있는데 왜 굳이 불편한 수동을 고수하냐 물으면 프랑스인들은 대답한다. "이게 운전이야" 오토는 진짜 운전이 아니라는 식이다. 물론 자동차세와 연비에서 수동이 더 저렴하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익숙해서'다.
개선된 편리한 방식이 있어도 자신들에게 익숙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프랑스를 잘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불편하고 비효율적이어도 익숙한 것은 좋은 것이고 낯선 것은 그렇지 않다는 인식. 이러한 인식이 과연 코로나와 상관없었을까.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 방송의 ‘더빙 문화’가 있다. 프랑스 텔레비전의 모든 외국 프로그램은 불어 더빙으로 방송된다. 미국 드라마든 다큐든 일본 만화든 모두 프랑스 성우들의 딱딱한 나래이션을 통해 송출된다. 그렇기에 어디서도 이국 말은 들을 수 없다. 오직 프랑스 말만 모든 곳에서 흘러나올 뿐이다. 또한 프랑스에 온 이민자들은 의무적으로 프랑스어 수업을 이수해야 한다. 그것이 프랑스 땅에 사는 의무기 때문이다.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 이상했던 것 중 하나도, 길거리에서 프랑스인들이 내게 말을 걸 때 모두가 프랑스어로 말을 건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이다. 말이 서툴어 영어로 하면 얼굴이 딱 굳는다. 마치 절대적인 룰을 따르지 않아 잘못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러나 외국인이 그 나라 말이 서툰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능숙한 프랑스 말을 강요하고 기대하는 자신들의 편협함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 아닐까.
자신들 사회 안에 편입되려거든 자신들의 모든 룰을 따라야 하고, 정작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 다문화 사회란 말뿐이지 실제 프랑스는 인종과 계급을 엄격히 구분하며 ‘비프랑스 문화’를 철저히 분리하고 배척한다. 프랑스인들은 타문화에 호기심이 있을 뿐 실제로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국적인 풍광이나 색다른 즐거움을 즐기고 싶을 뿐 마음으로 동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아이들 학교에서 아랍과 아프리카 학부모들 프랑스 학부모들이 안 끼워준다. 식민지 출신 이민자들은 선 밖에 있다. 프랑스인들 인식의 바운더리 안에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암묵적이지만 선명히 적용되는 룰이다.
이처럼 그 많은 이민자들과 프랑스인들은 완벽하게 따로 논다. 그저 ‘섞여 있을 뿐’ 절대로 서로가 융화되어 있지 않다.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차별과 혐오 사건들은 모두 여기로부터 비롯된다. 프랑스인들의 배척하는 마음. 자신들 기준만을 강요하는 마음. 그것이 모두를 소외감 느끼게 하고 상처주기 때문이다.
프랑스 코로나 참사는 인재다. 자신들의 무지를 알지 못하고 안주하고 고집한 마음. 극한의 자기중심성이 집단 무의식으로 나타난 오만함의 결과.
바이러스라는 낯선 존재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열려 있었다면, 프랑스의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프랑스 코로나 실태 진짜 이유
* 참고 자료 : 유럽에서 영어실력 꼴찌 프랑스, 원인은 '더빙 문화' http://asq.kr/RCRed4lqqJ0y, 강철구 교수의 '식민지와 문화적 유산' 1편 <식민주의, 왜 지금까지도 문제인가> 칼럼 http://bitly.kr/fL3fWRgAOWt, 프랑스 경찰에게 개입마개로 폭행당하는 시민 영상 http://bitly.kr/Q6XW542dxzG, 프랑스 경찰에게 폭행당한 14살 소년 인터뷰 영상 원본 http://bitly.kr/RaAAtkZl2f4, 프랑스판 ‘플로이드’ 사건 http://bitly.kr/NQBPTSPr1W8, 프랑스 경찰 흑인 성폭행 http://bitly.kr/rE956n7eOE, 프랑스의 빈민가 이주민들 차별 실태, 주민 인터뷰 https://wspaper.org/article/2611, https://wspaper.org/article/2613,
프랑스 옛날 비누 Javel 광고 이미지 출처 http://bitly.kr/SSfWxLh80M5, 프랑스의 식민지 이미지 활용한 자국민을 위한 '제국주의 선전' http://bitly.kr/5xSZh0dUtg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