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Mar 19. 2020

코로나로 드러난 프랑스 민낯, '개인주의' 부메랑

프랑스 코로나 4편


 코로나 사태로 우리는 너무나 대조적인 한국과 프랑스의 대응 그리고 시민들의 태도를 보았다. 밤잠을 안 자고 마스크를 만드는 사람들, 내가 가진 마스크를 양도하는 사람들, 격리된 시민들에게 음식을 해주는 사람들, 그것을 배달해 주는 학생들, 너도나도 대구로 달려간 의료진들, 사재기는 생각도 안 하는 사람들. 이런 한국인들의 모습은 어떤 난관이 닥쳐도 침착하며 나만이 아닌 모두를 함께 생각하는 진정한 연대감을 보여주었다. 반면 프랑스 국민들은 어떠하였는가.
 
 정부의 긴급조치 발표 후에도 여전히 카페와 술집과 거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저 나의 현재를 즐기는 모습. 사람들은 말한다. 한국인들은 '순종적'이고 유럽인들은 '자율적'이어서라고. 그 말의 뉘앙스에는 한국인들은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어도 규율을 따르고' 유럽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당당하게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는' 사람들이라는, 은근히 한국인을 비하하는 숨은 뜻이 담겨 있다. 그러면서 현재 프랑스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낙천적 성향과 자유분방함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낙천성이란 어떠한 역경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긍정이며 자유분방함이란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열린 태도이다. 하지만 긴급조치 단 하루 만에 모든 국민들이 전국의 마트 물건들을 사재기하기 바쁜 모습. 이것이 낙천성일까? 이것은 오히려 공포심에 근간한 조급증이다. 영업 금지라는 초강수가 발표되었을 때엔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마시자'며 수백 명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그것이 자유분방함일까? 그것은 그냥 방종이다. 나 자신은 물론 타인도 개의치 않는 무책임함인 것이다.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표 이후 폐쇄된 에펠탑 앞에 나오는 안내문
'외출금지령'에 '이동증면서'까지 등장하자 텅 빈 프랑스 거리


 프랑스 국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흘려듣다가 당장 일상에 불편이 초래되니, 사재기를 하고 카페테라스에서 봄을 즐길 수 없음을 불평하고 있다. 즉 정부는 정부고 나는 나다. 너의 불편은 모르겠고 내가 불편한 건 싫다는 거다. 그렇다면 '자유와 인권의 나라'라는 시민들의 이러한 발상은 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지금 프랑스가 이 난리통인 진짜 이유를 필자는 이미 첫 번째 글에서 언급하였었다.
 
 이것은 그들의 '오래된 관성적 사고'로부터 왔는데, 너무도 견고하게 각자의 무의식에 뿌리내린 것이기에 힘이 세고 그렇기에 그와 다른 모든 생각들을 튕겨낸다. 바로 그들이 가진 '개인주의적 사고'다. 
   
 프랑스의 극단적 조치는 정부의 안일함으로 인한 초기대응 실패가 원인이기도 하지만, 말 안 듣는 국민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출발은 이 사람들의 근본적인 사고의 틀인 개인주의, 개인의 무한한 자율의 허용에 그 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개인주의는, 나의 즐거움을 우선시하는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만 즐거우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마치 낙천주의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하지만 상인들이 가게 문을 열지 못하고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못한다면, 왜 그래야만 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며 할 수 있는지, 그 의미를 먼저 헤아리는 것이 '의식 있는 시민의 자세'가 아닐까. 
코로나 시국에서 그것이 가장 성숙하게 이루어진 나라가 한국이었다. 물론 정부의 발 빠른 대응과 의료진들의 살신성인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위기가 한풀 꺾일 수 있도록 견인한 가장 커다란 원동력은 '시민들 개개인의 각성' 그 성숙한 시민 의식이었다.


이동중인 시민에게 '이동증명서'를 확인하고 있는 프랑스 경찰
'이동증명서'를 지참하지 못한 시민과 실갱이를 벌이고 있는 경찰


 밤잠 자지 않고 가족도 돌보지 않고 오직 이 난국을 헤쳐가기 위해 모두가 온 마음을 모아 자신을 헌신하는 것. 세상 어디에 이러한 시민들이 또 있을까. 없다. 한국인들은 '드라이브 스루'를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혼란 속에서도 침착하고 기민하게 감동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국민들이다.

 또 하나, 프랑스도 미국도 마스크를 구할 수 없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 거 같은가. 그 많은 인구수에 맞게 마스크 수량을 공급할 수 없어서는 아닐까? 지금 만약 국가에서 '마스크를 써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 거 같은가. 마스크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약국들은 도난당하고 박살 날 것이다. 그것이 현재 프랑스 경찰이 대비하고 있다는 폭동이다. 하지만 한국은 24시간 풀가동으로 마스크를 만들어 내고 있다.
 
 프랑스가 미국이 그런 마음으로 국민들에게 마스크를 제공할 수 있을까.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누구도 '내 시간을 쪼개서 밤 잠을 안 자고'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나라를 위해 마스크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즐거움과 행복이 우선인' 사람들에게 공동체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 '한없이 쿨해 보이는 개인주의'의 실체다.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는 것. 그렇다고 타인을 위해 나의 것을 떼어주지도 않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 나만 잘 살면 그만인 것. 철저한 '단절'


한산해진 '개선문' 앞에 마스크를 쓴 시민이 서 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는 프랑스 코로나


 '나의 일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는' 개인주의, 그 삭막하고 건조한 개인주의가 결국 스스로를 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 현재 프랑스 코로나 사태는 그것의 반영이다.
 
 이번을 계기로 전 세계인들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것은 정치적인 역량의 문제를 떠난 영역, 공동체의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각성의 수준'을 드러낸 것이다. 과연 누가 진정한 연대를 보여주었고 진정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는가.  
 
 프랑스에 살면서, 이들에게 정말로 '성숙한 시민 의식이 있는 걸까'라고 의문을 갖게 된 지점은 많은 부분에서 늘 있어 왔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겪으며 더욱 선명하게 확인하게 되었다. 이들의 차갑고 딱딱한 개인주의가 계속해서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한, 앞으로 또 다른 무엇이 닥쳐도 상황은 늘 같을 것이다. 집단주의에 순응하자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자율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큰 어려움을 겪으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바이러스가 퍼지든 말든 내 알바 아니라는 생각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무책임함이지 결코 영혼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필자의 다른 프랑스 글







필자의 다른 브런치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