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현 Dec 10. 2020

내 마음의 난로,
빠스칼의 숲속 사우나


 빠스칼과 엘크는 백 년도 넘은 오래된 집에서, 
전기와 수도를 제외한 어떤 '신문물'도 들여놓지 않은 채 오래된 방식으로 살고 있다. 
 
 남들 다 쓰는 전기 히터 아니 그 흔한 신식 난방 장치 하나 없이 오로지 '재래식 난로'로만 의지하여 겨울을 난다. 거실 겸 주방에 하나, 침실에 하나, 배관이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 무쇠난로가 어찌나 따뜻한지 난로가 켜져 있는 겨울 빠스칼 집에 들어가면, 난로만이 줄 수 있는 온화한 기운이 온 집안을 따스하게 감싸고돌아 그렇게 포근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난로 옆으로는 낡은 나일론 빨랫줄이 걸려있고 엘크는 거기에 빨래들을 널어놓는다. 난로 근처가 건조하기 때문이다. 빠스칼은 계속해서 난로 안에 장작들을 넣고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은 채 따뜻한 차를 내어준다. 
"무슨 차 줄까?"  "나는 늘 마시던 거!"
 
어떤 인위적인 향도 없이 조금은 낡은 집 냄새가 풍겨 나는, 전혀 정돈되지 않은 빠스칼의 소박한 주방 겸 거실. 
내가 좋아하는 잎차를 빠스칼의 그 공간에서, 빠스칼의 그 난로 앞에서 마시는 그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내일은 날이 많이 춥대. 집에서 사우나 할 거니까 준비하고 와" 빠스칼이 차를 따라주며 말한다.
 

 빠스칼의 가장 친한 친구 디미트리, 그는 불가리아에서 온 히피이다. 딸과 함께 한 빈 집에 살며 전기배관 기술로 먹고사는 '가난한 예술가'. 그는 배운 적도 없이 집을 뚝딱뚝딱 곧잘 짓기도 해서, 여기저기서 부탁을 받고 건물들을 지어주며 부수입을 벌어 산다. 몇 년 전에 빠스칼은 정원 한쪽에 작은 핀란드식 사우나를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고 디미트리는 그걸 멋지게 해냈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빠스칼 장작 패는 소리의 주인공들


 온천을 정말 사랑하는 나는 프랑스에 온 이후, 목욕탕은 커녕 온천에 갈 수 없다는 것이 매우 슬펐었는데 빠스칼 집에 사우나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뛸 듯이 기뻤었는지. 
 
 빠스칼이 드디어 사우나에 친구들을 초대한 첫날이었다. 빠스칼은 디미트리와 다른 친구 부부와 우리 부부를 초대했다. 남편은 사우나 안에 옷을 거의 벗고 들어간다는 말을 듣더니 그냥 집에서 쉰다며 오지 않았고 나만 갔다. '그래도 설마, 다 벗고 들어가겠어?' 나는 검정 슬립을 하나 챙겨 갔다. 
 
 근데 빠스칼과 엘크 둘 다 샤워가운을 입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야, 진짜 하나도 안 입고 들어가?" 내가 물었다. 빠스칼이 말없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에 정말 더워. 옷 못 입어" 엘크가 대답했다. 다른 친구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일단 셋이서 먼저 사우나에 들어갔다. 

사우나 한쪽에는 역시나 재래식 난로가 있었고, 빠스칼은 후끈 데워진 난로에 수증기를 피우기 위해 물이 담긴 주전자와 아로마 오일을 준비해놓았다. 그리고 사우나 문을 닫기 전 샤워가운을 벗고 알몸으로 들어왔다. 엘크도 마찬가지였다. 
 
 사우나 안은 두 개의 촛불만 켜놓은 채 어두컴컴했기에 실루엣 정도만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민망하였다. 아무리 속옷이라지만 어쨌든 '다 벗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가리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 창피했달까. 아무리 친구라지만 '남자 사람 앞에서' 내 알몸을 거리낌 없이 보여준다는 것에 대해 아직 준비되지 못한 내가, 굉장히 촌스럽게 느껴졌다. 은은한 아로마 오일 향이 뜨거운 수증기와 함께 코를 찌르고 온 몸으로 적셔왔다. 


숲을 경작하여 만든 빠스칼네 정원. '그림 같은' 배치와 인위성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진짜 자연

 

"아 좋다... 너무 좋다.... 나 여기서 살래...."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는 날 보며 빠스칼은 계속 그 청량한 웃음을 날렸다.


 그때 디미트리가 사우나로 들어왔다. 역시나 알몸을 한 채로. '아. 나만 촌스러운 거였어' 옷을 벗을까 말까 계속 고민이 되었다. 언제나 상투머리를 틀고 다니는 디미트리는 아예 옆으로 편하게 누워 그 철없는 소년의 미소로 웃고 있었는데, 마치 그 모습이 정말 에덴 동산? 에나 나올법한 자유인만 같아서 더더욱 '문명을 걸치고 있는' 내가 부끄럽게 여겨졌다. 땀이 비 오듯 주룩주룩 흘렀다. 아.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겨울의 행복인지.


 그로부터 한 달 후, 두 번째 사우나를 할 거라며 빠스칼한테 연락을 받았다. 그 날은 다른 이웃 친구네 부부도 온다고 했다. 다 아는 친구들이었다. 나는 마음을 먹고 갔다. 그 날은 내가 꼭! 문명을 걸치지 않은 채로 자연인 그대로 있으리라며. 여느 때처럼 우리는 따뜻한 차를 마시고 사우나로 들어갔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사우나 밖으로 던졌다. 순간 알몸이 된 나를 보며 빠스칼이 외쳤다. 

"오! 나 너무 기뻐! 드디어 네가 다 벗었어!" 그 말은, 내 벗은 몸을 봐서 좋다는 게 아니라, 


다 벗어도 아무렇지 않고, 전혀 창피하지 않은 거라는 것을 알게 된, 이건 매우 자연스러운 자연인의 모습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장막이 걷힌 내 마음'이 반갑다는 말이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할 줄 안다고!"  빠스칼은 연신 흐뭇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엘크와 친구들이 먼저 샤워를 하러 나갔고 빠스칼과 나는 둘만 사우나에 남겨졌다. 내가 물었다.


빠스칼이 장작을 패는 도끼가 널브러져 있다. 장작더미가 쌓여있는 정원과 연결되어 있는 숲길

 

 "빠스칼, 너도 엘크랑 그만 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  "당연히 있지" 빠스칼이 말했다. 
 
 "나는 있잖아, 정말 혼자 한국에 돌아가려고 했어. 몇 번이나. 나는 이 땅에서 자주 행복하지 않았거든. 근데 있잖아, 그래도 내가 여기에 남아서,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느껴져. 그것을 내가 완수하지 않으면,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는 안될 거 같다는 느낌 같은 거. 그래서 가끔 많이 외롭고 슬픈데... 그래서 또 살아가게 돼..."
 
나는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울먹거렸다. 빠스칼이 말했다.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내일 별일 없으면 함께 자전거 타고 숲에 가자" 


 다음날 나는 빠스칼과 둘이 자전거를 탄 채, 강을 따라 좀 더 멀리 있는 숲에 갔다. 그곳은 빠스칼이 가끔 바람 쐬고 싶을 때 가는 또 다른 숲이었다. 우리는 숲 속을 걸으며 숲 냄새를 맡았고 나무와 식물들을 보았고 개울을 건넜다. 빠스칼은 지나는 곳마다 식물들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버섯을 함께 땄다. 

"네가 좋아하는 버섯 여기 많지?" 빠스칼이 웃으며 말했다. 손바닥만한 야생 버섯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그렇게나 버섯이 많이, 예쁘게 피어있는 모습은 처음 봤다. 순간 울컥하였다. 
 
 "빠스칼.... 고마워"  
 
 빠스칼은 나를 향해 조용히 미소지었다.

 
 




* 메인 사진 : 빠스칼의 정원에서 온 무화과


본 글과 이어진 1편과 2편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한 자연인, 프랑스 친구 '마법사 빠스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