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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현 Dec 07. 2020

행복한 자연인,
프랑스 친구 '마법사 빠스칼'


 그날은 아침부터 강가에 안개가 끼어 있었다. 뿌옇고 습한 공기. 저 안을 헤치고 들어가면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 같은 아련함. 집 뒤에 작은 숲을 걷고 싶었다. 창만 열면 보이는 그 숲. 
숲 바로 밑에 오니 축축한 숲 냄새가 난다. 아침 냄새. 아무렇게나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오른다. 아무도 없는 곳.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의 흔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청량한 새소리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때 보이는 한 남자. 
 
 낡은 청바지에 캐주얼한 면남방, 갈색 가죽 등산화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산발한 곱슬머리. 그는 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리니 내쪽을 돌아본다. 보기 좋게 그을린 투박한 얼굴. 파란 눈. 그러나 반짝이는 눈. 그는 인사를 건네며 웃었다. 소년의 웃음. 그는 버섯을 따고 있었다. "엊그제 이사 왔죠? 이것 좀 줄까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날, 나는 빠스칼을 그렇게 만났다. 숲 속에서.
 
 며칠 후 우리는 이웃 친구네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나는 김치전을 준비해 갔다. 빠스칼은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손으로 덥석 몇 개를 집어 먹었다. 나는 그게 너무 좋았다. 김밥 하나까지 나이프와 포크로 잘라먹는 프랑스인들 이건만,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집에서 아내 대신 매일 식사를 준비하였다. 

 그리스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인 빠스칼은 일주일에 두 어 번 정도만 학교에 나가고 거의 매일 집에 있기 때문에, 일로 바쁜 아내 대신 매 끼 식사를 준비하고, 장작을 패고, 정원을 가꾸었다. 아내 생일에는 손수 손으로 만든 것들을 선물하고, 6개 국어를 구사하기에 독일인 아내와는 완벽한 독일어로 얘기를 하는 남자. 겉치레라곤 1도 없는 남자. 모든 식물과 나무의 이름들을 알고 있는 남자.


빠스칼이 늦가을 정원에서 따 준 감. 홍시를 먹을 수 있다


 낡은 청바지 몇 벌과 낡은 티셔츠 몇 개 낡은 체크무늬 남방 몇 개를 돌려가며 입는 남자. 빗질이라곤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늘 흐트러져 있는 머리칼. 바람이라도 불면 이리저리 휘날리는 부랑자 같은 형상. 그런 그의 심하게 소박한 모습은 교수라기 보단 시골 농장에서 양떼를 모는 '양치기 소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햇빛에 그을린 그의 피부는 거칠지만, 단단하게 불거져있는 손과 팔의 힘줄들은 그가 얼마나 튼튼하게 땅에 발 딛고 있는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그렇기에 그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하다. 자연의 냄새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기에.


 빠스칼 아내 엘크도 마찬가지다. 흡사 현대판 '스콧 헬렌 니어링 부부'를 보는 것 같은 이 친구들은, 오래된 집에서 극히 소박한 살림살이로, 어떤 장식도 없이 단순한 삶을 살아간다. 채식주의자인 그들은 두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채식으로 키우고 있다. 운전을 할 수 있음에도 차 없이, 대중교통 이용 없이 오로지 모든 동선을 자전거로만 이동하는 부부. 그들의 근육질로 다져진 허벅지는 얼마나 관능적이고 아름다운지. 


 
집에 냉장고가 없고, 화장실이 집 밖에 있고, 정원에 장미부터 탱자까지 온갖 꽃나무와 과일나무들을 가꾸고, 양봉까지 하며 꿀도 만들어 먹는 친구들. 생산자 직거래로 먹거리를 조달하는 친구들. 돈을 쓰는 데라곤 유일하게 유기농 먹거리 구입이 다인 친구들. 당연히 핸드폰 같은 건 없으며 집은 언제나 자유분방하게 모든 것이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다. 그럼에도 산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보다 편안하게 느껴진다. 


아이가 어릴 때 함께 놀던, 너무 예쁜 빠스칼네 숲 속 달팽이. 바닷가를 걷다 발견한 예쁜 들꽃. 나의 행복
달팽이를 너무 좋아했던 아이는, 자주 빠스칼네 숲 속에서 찾아오는 달팽이들과 놀았었다


  그들이 어떤 인위적인 것도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놓아두기 때문이다. 모든 이에게 친절한 그들의 부드러운 미소처럼. 


 특히 내가 사랑하는 건 빠스칼의 웃음소리다. 날카로운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아이처럼 웃는 빠스칼의 그 호탕한 소리. 나보다 더 큰 웃음소리를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웃기라도 하면 그때는, 그 어느 때보다 집이 쩌렁쩌렁 울리는 순간이다. 함께 신나게 웃고 나면 가슴이 그렇게 시원해질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웃음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언제나 '나만의 엉뚱 코드'를 그가 알아듣고, 매번 배꼽이 빠져라 웃어주는 순간이다. 한국의 절친들이나 알아듣던 그 코드, 프랑스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한 그것을!


 
 얼마 전부터 남편은 넓은 정원이 있는 큰 시골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나는 큰 집을 덜컥 사놓으면 그 집에 '끝까지' 붙박여 살아야 할 것을 생각만 해도 답답한 사람이다. 어느 날 빠스칼집에 초대받아 저녁을 먹으며 이 얘기가 나왔다. "시골에 큰 집을 사서 이사하고 싶어" 남편이 말했다.
"가긴 어딜 가. 그냥 우리 옆에서 살아" 빠스칼이 말했다. "그렇지? 난 그냥 여기서 살다가 나중에 아이 다 크고 나면 여기저기 다니면서 살 거야" 내가 말했다. 
나는 이어서 남편을 보며 말했다.


 "나는 저 시베리아 푸른 유목민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평생을 어느 한 곳에 붙박여 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야. 나는 티벳에서도 좀 살고 바이칼 호수에서도 좀 살고 할 거야" "나는 문명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 몽골 북부, 그 순록 타고 다니는 유목민들. 거기에 바이칼 호수의 수원지가 되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어. 나는 거기에도 갈거야. 땡땡땡 호수"


빠스칼 엘크가 내 생일날 비대면으로 전해주고 갔던 생일 선물, 정원에서 막 꺾은 너무 예쁜 꽃다발과 명이나물. 행운의 거북이 목각 인형. 빠스칼 어머님이 손뜨개로 만드신 복주머니


 남편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빠스칼과 엘크를 향해 한숨을 지어 보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철없는 아내를 어떡하면 좋으냐라는 투정이 담긴 한숨이었다. 빠스칼과 엘크가 동시에 나에게 물었다.
"그 호수 이름이 뭐라고?" 내가 대답했다. "홉스골 호수. 홉.스.골" 그 둘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허리를 90도로 꺾은 채 배꼽을 잡으며 웃었다. 푸하하하하... 나의 엉뚱함과 그 호수 이름이 너무나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듯.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그 웃음 소리였다.
 
 그날은 엘크의 생일이었다. 빠스칼은 길에서 주운 대리석 조각에 시침과 분침을 만들어 붙인 후 곱게 색을 입힌 '해시계'를 아내에게 선물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해가 잘 드는 테라스 한쪽에 걸어두었다. 그 시계는 매일 오후 4시 20분에 시침과 분침이 만나 그림자를 만든다. 4월 20일은 엘크의 생일이었다.
 
 "빠스칼, 나는 왜 너를 진작에 만나지 못했을까?" 빠스칼은 세상 따뜻한 얼굴로 다가와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리곤 바로 그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내 허리를 간질인다. 저 짓궂은 소년 같은 미소. 저 사랑스런 헝클어진 머리칼. 
 
 언제나 바람처럼 흐르고 시냇물처럼 웃는 소년. 하루를 영원처럼 사는 소년.
 
 이성이 신이 된 나라. 이 딱딱한 땅에서 너를 만나 얼마나 기뻤는지.
 






빠스칼 이야기 1편과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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