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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Jul 30. 2019

프랑스 냉동창고 반찬 부자 된 날


 밤샘 비행에 폭염을 뚫고 자정 넘어 도착한 프랑스 집. 몸은 탈진 상태였지만 뻗기 전에 완수해야 할 미션이 있었다. 바로 짐가방 하나를 통째로 채워온 먹거리들을 냉동실에 빠짐없이 모셔놓아야 하는 것.
 
 냉장실로 가도 되는 아이들을 추려서 꺼낸 다음 방금 짐가방에서 나온 아이들을 하나씩 넣었다. 효율적인 공간 배분을 위해 중학생 시절 테트리스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본다. 휴. 다행히 다 들어갔다.  
 
 한국에 다녀오고 나면 더욱 한식이 당겨서 한동안은 여기 음식들을 쳐다보기도 싫은데, 그럴 땐 가져온 찬들을 하나씩 꺼내 먹는 것이 큰 낙이 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바리바리 싸들고 온 '소중한 나의 식량들'
 
 외할머니 된장 고추장 통깨 참기름은 물론이요 아빠의 고추조림 강된장에 엄마의 파김치 깻잎조림 오징어채 무침 그리고 아이 반찬인 잔멸치 볶음까지. 각각 작은 덩어리로 나누어 진공포장을 한 다음 이틀간 냉동실에 꽁꽁 얼려 가져오면 세상 부럽지 않은 호사를 당분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 것들을 이번엔 두 덩이씩은 족히 가져왔다. 그렇게 냉동실이 가득 채워질 때면 겨울을 앞둔 곡식창고를 다 채운 듯 그 얼마나 든든한지.
 
 남편도 좋아하는 무말랭이와 낙지젓갈 새우젓을 크게 한 덩이씩 가져온 건 '히든카드'다. 안 들어갈까 봐 끝까지 망설였던 이것들을 가져온 건 얼마나 잘한 일이었던가.
 밥이 먹고 싶은데 반찬도 없고 김치도 없을 때, 사 먹기라도 하고픈데 김밥을 파는 곳도 볶음밥을 파는 곳도 없는 곳에 살아보면 알 수 있게 된다. 이 한 덩이 한 덩이가 얼마나 눈물나게 소중한지!
 
 더구나 '떡보'인 아이와 나를 위해 엄마가 싸주신 손바닥만한 쑥개떡 절편 덩어리가 여섯 개나 있다는 건, 시루떡 인절미 호박찰떡 꿀떡까지 냉동실에 대기하고 있다는 건, 그야말로 '천국의 문'을 한 달에 한 번씩은 열어볼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 말인즉슨, 한 달에 한 번씩 아이에게 '스페셜 간식'으로 떡을 꺼내 줄 때에, 옆에서 콩고물이라도 같이 주워 먹을 수 있음을 의미했기에. 아. 겨울까지는 한동안 찌질하지 않게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
 

내겐 영원한 베스트김치 파김치 (사진: 네이버 '금별맘'님)


 그렇게 귀국 이튿날 첫 끼는, 언제나 한국서 가져온 찬들로 '잔칫상'을 차려 먹는 게 남편과 나의 오래된 즐거움이다. 물론 잔칫상의 주인공은 냉동실서 그대로 나온 찬들에 호박전 하나 정도 추가하는 게 전부지만, 한국 음식을 자주 해 먹긴 해도 각종 찬들까지 다양하게 해 먹지 못하는 형편에서 반찬 많은 게 무조건 '짱'인 것이다.

 오늘 당첨된 것은 아빠표 고추조림과 엄마표 파김치 아이는 잔멸치 볶음에 꽃김부각. 마침 한국 가기 전에 냉동실에 넣어두고 간 닭갈비가 있어 함께 데웠다.

 역시나 손이 먼저 간 것은 고추조림. 신선한 고추를 볶았을 때만 맛볼 수 있는 고추즙의 풍미에 편마늘과 양파 마른멸치가 어우러진 깊고 풍요로운 이 맛. 불과 얼마 전까지 부모님집 밥상 위에 있던 이 평범한 것이 프랑스 식탁에 오른 순간 '일품요리'가 되어버리는 신박함. 아. 맛있다.  
 
 여기는 맛있는 고추가 없어 그 좋아하는 풋고추를 맘껏 못 먹고사는 나이기에 더욱 소중한 고추 반찬. 배가 많이 고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고추조림이 마구 들어갔다. 밥을 더 펐다.
 
 그리고 간간이 상큼함을 담당해준 엄마의 파김치. 싱싱한 쪽파에 적당히 밴 양념 그리고 딱 맛있게 익은 상태. 파김치를 정말 좋아하는 나에게 엄마표 파김치는 언제 먹어도 감동 그 자체다. 그나저나 한 입 먹고 바로 후회되었다. '왜 이걸 한 덩이만 가져왔을까' 하고.
 
 "음. 이거 진짜 맛있어" 오랜만에 먹는 '오리지널 한국표 반찬'에 경이로운 눈빛을  발산하던 남편이 고추조림을 젓가락으로 가리키며 한마디 한다.  
 "울랄라. 이거도 진짜 진짜 맛있어" 아이 먹으라고 놓은 잔멸치 볶음을 혼자 다 주워 먹으며 한 말. 남편이 맛있는 걸 먹으며 기분 좋을 때 튀어나오는 한국말이다.
 
 "빠빠, 쎄 따 무와 싸" (아빠, 이건 내 거야) 하며 아이가 멸치볶음 그릇을 자기 쪽으로 당기며 웃는다. 남편의 젓가락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릇을 따라가 몇 번을 더 덥석 집는다. 연신 훌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름엔 메밀국수 (사진: carlsberg 님)


 "홀라. 이거. 홀라..." 이번에는 파김치를 가리키며 한마디. 한국 음식을 많이 먹어봤고 좋아하는 남편도 그 맛이 여기서는 맛볼 수 없는 한국만의 맛이라는 것을 알아보곤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그렇게 프랑스인 남편은 좋아하는 닭갈비에 훌륭한 한식 찬들을 먹느라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여운이 남는 밥상이었다.

 저녁은 역시나 한국서 가져온 메밀 백 프로를 자랑하는 '제주산 메밀국수'. 귀국 전 날 사온 신선한 생깻잎들을 쓱쓱 계란물 발라 깻잎전을 함께 해 먹는 건 덤. 그야말로 오늘 하루는 '한국 음식 대잔치'인 셈이다.
 
 "쎄 트헤봉, 여보"  (이거 진짜 맛있어 여보) 메밀국수 위에 간장비빔소스를 뿌려 한 입 먹더니 또 한마디 거든다. 언제나 첫 번째가 임팩트 있지 그새 두 번째 식사라고 한국말이 아닌 모국어가 튀어나온다. 그러려니 한다. 나도 한 달간 안 썼다고 불어가 버버벅 거리는데.
 
 남편은 깻잎전을 마구 집어 먹다 뜨끔했는지 한동안 젓가락을 놓고 있다가 나와 아이가 밥을 다 먹고도 하나가 남자 슬그머니 젓가락을 위에 띄운 채 말한다. "주 뿌?" (나 먹어도 돼?)
 그래, 없어서 못 먹는 깻잎 있을 때 실컷 드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새 나도 귀찮아져 짧은 대답으로 응대했다. "바, 프항!"  (먹어!)
 
 그렇게 우리의 '귀국 기념' 밥상은 아름다운 '올 클리어'로 마무리되었고 '특별 잔칫상'을 대접받은 남편은 자진해서 설거지를 하는 유종의 미를 보여주었다.   
 
 잠들기 전 냉동실을 열어보았다. 나의 소중한 식량들이 잘 있는지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는지 '확인 차'
 
 다행히 모두가 편안해 보였다. 됐다. 이제 쭉 겨울까지 연료 만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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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인사진 : 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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