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삽질 Nov 10. 2018

영혼을 담은 리얼리즘의 대가, 변월룡

까레이스키, 펜 바를렌


외국에 있으면 누구나 애국자가 되고 고향을 그리워하곤 한다. 평생을 러시아 땅에서 살아온 변월룡도 그랬다. 당대 사실주의 화풍의 거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그는 우리에게 까레이스키로 익숙한 이름 고려인이었다. 변월룡의 부모는 일제의 압박과 착취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서 1916년 그를 낳았다. 


변월룡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고려인 마을 신한촌에서는 재능을 꽃피울 수 없겠다고 판단한 그의 부모는 변월룡을 머나먼 우랄산맥 근처의 스베르들로프스크 미술학교에 편입시켰다. 변월룡이 떠난 후 가족들도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떠났다. 어릴적부터 고향과도 부모와도 멀리 떨어져지내온 변월룡이기에 더 가슴 아프게 민족을 사랑했으며, 한 생을 조국을 그리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홀로 떨어진 변월룡은 타고난 재능과 성실한 노력으로 레닌그라드 회화조각건축 대학(레핀 국립예술아카데미) 회화과에 입학한다. 


변월룡은 고국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지만 대학 졸업작품으로 <조선의 어부들, 1947년>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조선의 어부들>을 보면 건장한 주인공의 까무잡잡한 몸에서 민족의 힘이 느껴지며, 월척을 들고 밝게 웃는 모습에서 낙천성이, 흰 두건을 쓴 아낙과 바구니를 이고가는 모습에서 소박함도 엿보인다. 변월룡은 소련에서 내놓으라하는 수재들만 입학한다는 대학에서 졸업 작품으로 자신의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정확하게 드러냈다.


변월룡, <조선의 어부들>, 1947년, 레핀 아카데미 졸업작품


그러던 변월룡에게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 당시 소련 국적을 가진 개인이 외국에 나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한 통일신보 2016년 1월 25일 기사 <그에게는 어머니 조국이 있었다>에는 그 사연이 소개되어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다음 해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 주석은 레닌그라드 국립미술관을 참관한다. 이 때 변월룡이 김일성 주석의 통역을 맡게 된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조선말을 잘 하는데 조선 사람이요?" 라고 물었다. 변월룡은  "조선 사람 입니다"라고 대답한 후 "조국에 한 번 꼭 가고 싶습니다"고 요청했다. 김일성 주석은 지금 조국이 불타고 있으니 전쟁이 끝나면 올 수 있게 해당 기관에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한다.


김일성 주석을 만난 후 변월룡은 조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작품 <김일성장군 초상, 1951>을 소련연맹미술전람회에 출품한다.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간 변월룡


1951년 레닌그라드 대학 학술협회 결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변월룡은 35살의 나이로 레닌그라드 대학 데상과 조교수로 임용된다. 2년 뒤 한국전쟁이 끝날 즈음인 1953년 7월 변월룡은 문화교류 차원으로 조국에 첫 발을 내딛었다. 한국전쟁 뒤 폐허가 된 평양이었다. 


소련 문화성은 체류 기간을 3개월로 잡고 미술교육 재건의 임무로 그를 파견했다. 그는 1953년 7월 평양미술대학 고문 교수로 역임하며 사회주의 미술 교육에 대해 심도깊게 가르쳤다. 그는 평양에서 <판문점에서 북한 포로 송환> 등 역사화, 생활상을 담은 민족화, 문화계 인사들의 초상화 등 작품활동도 활발하게 펼쳤다.


변월룡, <판문점에서의 북한포로송환>, 1953, 51X71cm, 캔버스에 유채


변월룡은 다음해인 1954년까지 열정을 다해 8.15 해방 9주년 전람회를 준비한다. 김일성 주석은 평양미술대학에서 진행한 전람회에 다시 방문하여 변월룡을 만난다. 김주석의 권유로 8.15 이후인 9월까지 체류기간을 연장한 변월룡은 건강악화와 체류기간 마감으로 다시 소련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변월룡은 이후 북한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안타깝게도 평양에 다시 가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북한에 돌아온 후 레핀 국립 예술아카데미 정교수로 1985년까지 근무했다. 변월룡은1990년 뇌졸증으로 생을 마감하며 “내 묘비에 한글 이름을 새겨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 생을 러시아에서 살았지만 끝까지 이름을 러시아 식으로 개명하지 않고 조선식 이름 '변월룡'을 지킨 셈이다. 그는 생이 다할 즈음 항아리를 앞에 놓고 서 있는 한복을 차려입은 늙은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 1985>를 그린다. 그는 어머니 초상화 아래에 한글로 '어머니'라 써넣었다.


변월룡, <어머니>, 1985, 119.5X72cm, 캔버스에 유채


북한 통일신보는 위 기사에서 변월룡을 '해방 전에 활동했던 가장 재능있는 화가'라고 소개했다. 통일신보는 변월룡의 작품 세계에 대해 "세련되어 있으며, 미학적 이상의 높이, 탄탄한 소묘, 뚜렷한 개성, 매력있는 필치와 색체"를 가진 세계적 거장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변월룡이 조선의 전통적인 민족회화인 조선화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소묘적 기초를 튼튼히 닦았다고 평가했다. 

영혼을 담은 리얼리즘


변월룡의 작품은 한 번 보면 빠져들 정도로 흡입력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화가들 작품으로 흔치 않은 초상화 작품이 많다. '영혼을 담은 초상'이라고 평가받는 변월룡의 초상은 인물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게 살아 숨쉬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표적인 작품은 <근원 김용준 초상, 1953> ,<작가 이기영 초상, 1954>, <작가 한설야 초상, 1953>, <무용가 최승희, 1954> 등이다.


변월룡, <무용가 최승희>, 1954년, 118X84cm, 캔버스에 유채


그의 사실주의 화풍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지향하는 바가 뚜렷하다. <6.25 전쟁의 비극, 1962>, <조선 분단의 비극, 1962>, <베트남, 1968> 등은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의 참혹함을 그렸다. 또한 노동자의 모습을 그린 <사회주의 노동 영웅 어부, 1969>과 같은 작품도 있다. 


변월룡은 <재일동포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 1960년>에서 직접 한글로 “북조선은 재일동포들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한다”며 민족애를 표현했다. 또한 <남조선의 자유와 통일을 위하여,1961년>라는 작품으로 한국의 박정희 독재 정권을 비판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변월룡, <금강산 소나무>, 1987, 72X129.5cm, 캔버스에 유채


변월룡은 서양화를 그렸지만 동시에 민족적 화풍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조국을 그리며 한국화 혹은 조선화적 색체를 그의 작품 세계에서 잘 표현했다. <조선풍경, 1958> <모란봉 을밀대, 1958> <조선의 농민, 1958>, <평양의 아침, 1960> 등의 작품에 민족적 풍경이 잘 담겨있다. 그는 말년에도 <금강산 소나무, 1987>나 그의 고향 연해주 부근인 나호토카, 블라디보스톡, 사할린에서 조선 전통 화풍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소나무 에칭화를 자주 그렸다. 


한국에 온 거장 변월룡


변월룡은 국내 미술평론가 문영대에 의해 한국에 소개됐다. 문영대는 1994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을 갔다가 우연히 변월룡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그는 “그때는 펜 바를렌이 고려인인지도 몰랐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과 아이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절대 외국인이 그릴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한국 미술의 취약한 뿌리를 찾았다는 생각에 정말 기뻤다. 일본 화단을 통해 들어온 후기인상파 이후 사조의 영향을 받은 한국 미술계에 구상주의를 제대로 배우고 이를 북한에 전수한 화가가 있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라고 그때 감격을 전했다. 


문영대는 “변 화백은 한국 구상미술의 빈 페이지를 메워줄 화가입니다. 서양미술은 사실주의가 400년 가까이 전통을 이어왔는데 우리나라는 서양미술을 받아들이면서 후기인상파, 야수파 등으로 건너뛰었습니다. 변 화백의 사실적 표현은 전통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화가들이 배워야 합니다.”라며 변월룡의 사실주의 작품에 대해 평가했다.


그는 변월룡의 부인과 자녀들에게 삼고초려를 한 끝에 국내 전시를 약속 받았다. 결국 변월룡이 태어난지 딱 100년만인 2016년,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자녀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 변월룡의 자료 50여점을 기증했다. 


변월룡의 아들 세르게이씨와 딸 올가씨 ⓒ연합뉴스


현재 그의 자녀들도 모두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변월룡의 아들 펜 세르게이는 "저도 그렇고 제 동생도 그렇고 화가가 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다. 야외에 데리가 나가 스스로 그릴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다. 화가 이외의 직업은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딸 펜 올가 역시 "아버지는 사물이나 인물을 묘사할 때 그 속에 드러나는 긍정적 이미지를 포착해 그렸다"고 아버지를 회고했다.


민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한 생을 두고 표현한 화가 변월룡. 그는 남쪽에서 경계인으로 사라진 화가였다. 북쪽에서 평가도 통일신보 이외에 정확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그의 삶은 어떻게 보면 까레이스키 고려인로 사회주의 국가 소련 국적을 가진 해외동포의 안타까운 한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담긴 민족애와 조국애는 세월이 지날수록 빛나지 않을까.


<출처1. 2012년 <우리가 잃어버린 천재화가, 변월룡>(컬처그라퍼, 문영대)>

<출처2. 북한 무소속 통일신보 2016년 1월 25일 기사 <그에게는 어머니 조국이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식민지 문화정책을 거부하고 사실을 탐구한 길진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