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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Dec 07. 2018

민족의 아름다운 정서를 노래한, 작곡가 안성현

부용산


목포여고 강당에 테너이자 작곡가 안성현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진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대단한 성량과 가창력이었다. 안성현의 독창에 박수갈채가 울려 퍼졌다. 


안성현은 1948년 10월 박기동 시인의 시 <부용산>에 애절한 곡을 붙였다. 목포여고 학예회 이후 이 곡은 목포는 물론 여수, 순천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같은 해 10월 여순 항쟁이 일어났다. 제주 4.3항쟁의 진압을 거부한 이들. 먼저 간 누이동생을 기리는 애절한 선율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순 항쟁으로 산으로 쫓겨 간 빨치산들은 부용산을 즐겨 불렀다.


부용산은 벌교에 있는 작은 산이다. 벌교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그리듯 혁명의 무대였다. 빨치산들의 노래는 군사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투사들 입으로 전해졌다. 


이곡은 1987년에야 비로소 해금되었다. 작자 미상의 노래로 구전으로 내려오던 <부용산>은 안치환이 1997년 ‘노스텔지어’ 음반에 실려 세상에 나왔다. 부용산 곡 설명에는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라고 적혀있었다.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어렸을 적 강변에서 고기 잡다가 발가락 사이로 반짝이는 모래를 바라볼 때 입가에 흥얼거리던 노래다. 엄마의 무릎에 누워 살랑거리던 바람을 생각나게 해줄 만큼 김소월의 시와 안성현의 음률은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안성현의 고향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 드들강 변에 가면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가 있다. 드들강변의 반짝이는 금모래와 바람이 불 때 들려오는 갈잎의 노래를 들으며 안성현은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 노래는 안성현 제2작곡집(1948)에 실렸다. 이 작곡집에는 부용산, 낙엽, 앞날의 꿈, 진달래, 내 고향 등 민족의 희망을 노래하는 23편의 작품이 담겨있다.


해방직후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엄마야 누나야’, 중학교 교과서에 ‘진달래’ 3부 합창곡, 고등학교 교과서에 ‘봄바람’이 실릴 정도로 안성현의 작품은 높이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 안기옥(安基玉)


안성현(1920∼2006)은 예술가의 혼이 살아 숨 쉬는 집안에서 자랐다. 안성현의 아버지 안기옥(安基玉)은 가야금 산조의 명인으로 독보적인 국악인이었다. 할아버지 안영길 역시 꽹과리와 피리로 명성을 떨쳤다.


안기옥은 일제 강점기 항일 음악가였다. 1919년 3.1 운동에 동참하여 감옥에 갔고, 1926년 일본 위안공연을 거부하여 구류당한 적도 있었다. 그는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엄청난 노력으로 발전시켜 민족음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온데 좌절한 안기옥은 1946년 6월 월북을 선택한다. 그 해 연말 김일성 주석 자택에서 초대된 안기옥은 가야금과 민요를 연주했다. 김일성 주석의 권유로 안기옥은 일제에 의하여 파괴된 민족음악유산을 복구정리하기 위해 민족음악연구기관인 조선고전음악연구소 소장을 맡는다. 


이후 안기옥은 공훈배우, 인민배우와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하며 북한 음악계의 큰 인물로 민족음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춘향전> <불멸의 금강><장화홍련전> 등 훌륭한 작품이 많다. 1994년 평양에서 안기옥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될 정도였다.


예술을 위해 평양으로


안성현은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나주에서 평안도 함흥으로 유랑을 하던 유년기를 보냈다. 청년이 된 안성현은 일본 도쿄 도호음악학교로 유학을 갔다. 테너 성악부를 마치고 그는 다시 태가 묻힌 고향으로 돌아왔다.


1947년 안성현은 목포의 항도여중(현 목포여고)에 부임했다. 그는 합창단을 구성하여 전국 합창대회 준우승을 하며 예술혼을 불태운다. 매년 두 차례나 작곡집을 발행하고 작품발표회를 가질 정도로 작품 활동은 열정적이었다.


안성현은 1948년 부용산의 시인 박기동 시인에게 말했다.


“부친이 평양에서 고관으로 재직하고 있는데 한 번 만나러 가고 싶다. 도쿄 유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무용가 최승희도 만나보고 싶다”


이윽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7월 24일 목포에도 조선인민군이 들어왔다. 목포시내 음악교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안성현, 김재민, 박화성 등등 예술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음악인들은 공장마다 오르간을 짊어지고 가서 노래를 가르쳤다. 노동자들은 저마다 “우리 세상이다”며 활개를 쳤다.


그러던 9월 15일 유명한 무용가 최승희의 딸 안성희가 북에서 내려와 목포에서 무용발표회를 개최했다. 안성현도 무용발표회에 참석했다. 안성현은 최승희의 남편인 문학 비평가 안막의 조카이기도 했다. 강당에는 촛불이 켜져 있고 안성희가 발표를 하며 리셉션이 진행되었다.


안성현은 무용발표회 이후 음악가 김재민 선생에게 “안성희가 음악회 일로 평양에 가자는데 그럴까 한다”며 평양행 의사를 밝혔다. 일설에는 한국 전쟁 중 최승희를 만나 “북쪽은 예술인의 천국이니 함께 가자”는 권유를 받았다고도 한다.


민족음악 발전에 기여한 공훈예술가


분단으로 가로막힌 후 안성현의 삶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해금되기 전까지 작자미상의 작곡가였다. 아직도 우리 어린 시절 신금을 울리는 그의 노래만이 전해질 뿐이다.


북한에서는 안성현을 민족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훈예술가로 평가하고 있다. 


2006년 5월 13일 북한 문학신문은 “민족음악 전문가인 공훈예술가 안성현 선생이 노환으로 4월 25일 오후 3시 86살을 일기로 애석하게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문학신문은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에서 태어난 안성현 선생은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오랜 기간 민족음악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며 그의 발자취를 소개했다.


이어 "선생은 음악예술 부문에서 지휘자, 작곡가, 연구사로 일하면서 가치 있는 음악작품을 창작하는 한편 민족음악 유산을 수많이 발굴, 정리해 민족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안성현은 북한에서 지휘자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1990년대 말까지 심청전과 춘향전을 재해석 하여 모스크바와 중국에서 수 십 차례 공연을 했다. 


러시아, 중국, 일본으로 활동범위를 넓힌 안성현은 중국에서도 그 명성이 높다. 


중국 옌지시 옌볜대 최옥화 예술대 교수는 안성현을 “중국 조선족 동포는 물론 중국인도 애창하는 국민가곡 ‘해당화’를 작곡한 분”이라며 “작곡가뿐만 아니라 지휘자와 연구자로 활동하면서 순수 우리 민족음악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작곡가 안성현 선생

2020년은 안성현 선생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전에 통일의 속도가 빨라져 <엄마야 누나야> 같이 소박하고 아름다운 민족 정서를 노래한 작곡가 안성현의 작품 세계를 만나보고 싶다.


출처) 

연합뉴스 '엄마야 누나야' 작곡가 안성현 사망 2006.5.27〈北문학신문〉

빨치산의 노래 ‘芙蓉山’시인 박기동 <신동아 2005년 4월호>

안성현, 그는 우리에게 누구인가 中 김재민 선생과의 설문과 대답<나주투데이 200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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