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父子2 / 일본 홋카이도 비에이
백조의 호수에서 즐기다 보니 어느덧 기차시간이 임박해 왔다. 호수가에서 열심히 사진찍기에 몰두하다 장비를 정리하고 떠나려하는 중년 신사분에게 혹 기차역 근처를 지나면 우리를 태워줄 수 있느냐 부탁하니 거침없이 차에 오르라고 하였다. 그러곤 기차 시간을 묻더니 출발 시간까지는 약간 여유가 있다며 전혀 생각지 못했던 가와유 온천 지역의 또 다른 명소인 아오잔 활화산까지 데려가 주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산을 휘감고 있는 구름인가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유황냄새가 진동하며 설산에서 흰 연기를 뿜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공간 이동을 해서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외계행성에라도 온것처럼 느껴졌다. 예상치 못했기에 그 광경이 더욱 강렬하게 코발트 빛 하늘과 함께 머리속에 각인되었다.
기차역에서 사례하려던 우리에게 극구 손사례 치며 차를 되돌리는 그 일본인을 보면서 한결같은 그들의 순수한 호의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두마리의 못된개도 다시 행각해 볼 유산이란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일본하면 갖게 되는 이미지가 부정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여행을 하면서 만나본 보통의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하고 선량한 모습들이라 우리가 갖고 있는 일본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과는 꽤 괴리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본성은 우리나 그들이나 순수하고 선량한 것일텐데 아베 총리와 같은 극우 정치인들의 잘못된 언행이 보통사람들 본성의 모습까지 왜곡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조건없이 이방인에게 선의를 베풀어준 이름도 모르는 홋카이도 세 일본인에게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홋카이도 겨울 여행을 계획하면서 다른 여행자들의 블로그를 보게되면 어김없이 등장하고 이미지 검색에도 항상 올라오는 지역이 바로 ‘비에이’였다.
한자 이름 미영(美瑛).
이름마저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홋카이도의 겨울이 비에이가 전부인것 처럼 너무도 자주 언급되어 식상한 느낌도 있고 나는 다르다는 약간의 오기도 발동하여 홋카이도 동부의 대자연을 찾게 된 것 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소문난 잔치가 어떤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도 끊임없이 머리속을 오르내렸다. 그래서 홋카이도 동부 쿠시로에서 삿포로를 경유하여 기차를 세차례나 바꿔타고 8시간을 소요한 끝에 자정이 넘어서야 비에이의 관문 '아사히카와'란 도시에 도착했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니 역시나 설국의 멋진풍경이 우리를 맞았다. 쏟아지는 폭설을 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찌뿌린 잿빛 하늘을 보니 떠나기 전날 그 소원을 이룰 것 같은 기대감이 부풀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영역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감고 기도 하는것 뿐이었다.
이미 발급한 JR 패스가 있기에 설경으로 유명한 이 지역을 기차로 이동하면서 차창 밖 풍경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들에게 더 멋진 추억을 남겨 주고 싶어 준비해간 국제면허증으로 다소의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자동차를 렌트하기로 하였다. 남쪽방향으로 조심스럽게 20여킬로를 달려 비에이의 언덕에 접어들자 구릉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설원이 드러내는 아름다움에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사만 반복하였다.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사방천지가 순백인 세상에 이르렀을땐 공간 지각 능력이 상실한 듯 눈을 뜨기조차 힘이 들었고 SF 영화속 한 장면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산악인들이 히말라야를 등정할때 생기는 스노우홀 현상이 이런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길을 따라 구릉의 정상을 오르자 저멀리 순백의 삼천미터급 장엄한 설산에 수평으로 자욱히 끼어있는 구름이 흰눈과 구별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신비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나무들의 군락들은 기이한 눈꽃들이 피어 그야말로 홋카이도가 왜 겨울 왕국인지를 말해 주는 듯 하였다.
예전에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봉우리마다 만년설을 머금고 있는 알프스의 영봉들을 바라보면서 경외심이 일곤 하였는데 그것에 못지않은 어쩌면 스위스와는 다른 색다른 맛과 매력이 있는 곳이 비에이의 겨울 풍광인 듯 하였다.
한 그루의 나무가 사람에게 이토록 감동을 안겨 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일명 ‘크리스마스트리’라 불리우는 그 나무를 만나기전 까지는 그랬다.
1970년대 마에다 신조라는 사진작가가 사계절을 담은 아름다운 구릉 사진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에이'가 더욱 유명 해졌다는데 파노라마로드, 패치로드라고 불리우는 구릉들이 계절에 따라 어떻게 변할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봄이면 연두빛이 스며드는 대지와 대비되는 저 멀리 순백의 설산도 멋질 듯 하고 여름이면 청보리밭의 푸르름을 배경으로 짙푸른 코발트빛 하늘과 보랏빛 라벤더가 펼쳐진 구릉을 상상하는것 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였다.
유명 대기업의 CF 모델로 가이드북을 장식한 아버지와 자식나무라 불리는 오야꼬나무, 켄과 메리나무, 마일드 세븐 나무등 널리 알려진 나무 군락을 가이드북에 있는 위치코드를 자동차 네비게이션에 입력하여 차례 차례 순례를 마치고 나머지 남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찾았다. 그러나 가이드북에 위치 코드가 언급이 안돼 지도를 보며 감각에 의지한채 한참을 헤메다가 포기하기 직전 드디어 그 나무를 만났다.
순백의 드넓은 언덕에 홀로 서있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이유는 무언지 모르겠지만 한장의 사진속에서 보았던 이미지를 현실에서 확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독한 혹한과 눈발을 이겨내고 독야청청 홀로 서있는 모습에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은 나 홀로라는 공감이 작용했기 때문 이었을까 !
멍하니 크리스마스트리 나무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소리도 질러봤다.
"드디어 너를 만났다."
바라보고 바라보다 눈안에 머리와 가슴에 담고 떠났다. 길고도 가혹한 홋카이도의 겨울을 이겨내면 봄날 주변 땅위에서 새 생명이 자라나 고독하고 외로웠을 크리스마스트리 나무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주기를 기도했다.
최근 두차례 쿠슈와 간사이 지역을 자동차를 렌트하여 여행 하면서 기동성과 편의성 때문에 자동차여행의 묘미에 빠졌었다. 그러나 겨울에 홋카이도를 자동차로 여행한다는 것이 쉬운 결정이 아니었기에 기차여행으로 결정했지만 2% 부족한 느낌이 들어 하루 자동차를 렌트 했는데 결론적으로 이번 여행의 신의 한수였다.
출발전 인터넷 또는 가이드북을 통해서도 홋카이도 겨울철 자동차 여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결론을 말하면 할 만 하다는 것이다.
겨울철 폭설에 대비가 잘된 홋카이도라 그런지 직접 빙판과 설빙의 도로를 몰아본 느낌은 생각보다 미끄럽지도 않고 도로 상태도 상당히 양호했다.
안전을 위해 눈의 미끄러움에 강한 스터드 타이어와 4×4를 선택 했더니 바퀴가 헛도는 일이 없었다. 제한속도와 안전거리를 유지하면 평소와 크게 다름없이 운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국의 내밀한 경치를 기차로 여행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겨울왕국의 숨겨진 비경은 기차역에서 내려 자동차로 최소 30분에서 한시간여 이동해야 볼만한 곳이 많았다. 겨울이라 대중교통이 대부분 끊겨 있기에 거점도시까지 기차로 이동후 그곳에서 자동차를 렌트해서 여행하는 것이 홋카이도 여행의 노하우로 생각되었다.
아마도 그날 용기를 내어 자동차를 렌트하지 못했다면 영하 20도의 혹한에서 눈으로 덮힌 비에이의 광할한 벌판을 다니지 못하고 설국의 순수한 모습을 눈에 담지 못하고 온천을 찾아 수염폭포라 불리는 시로가와 폭포로 가는 길의 끝없이 이어지는 환상적인 자작나무 숲길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눈이 많은 곳이라 도로 끝을 표시하는 빨간색 화살표시가 이채로왔는데 흰색만 존재하는 무채색의 세상에 다른 색깔도 있다고 시위라도 하는 듯 하였다. 설국의 밤길이 두려움으로 다가왔을때 자동차 전도등에 야광 반사가 되어 야간 운전시에는 수호천사처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