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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린결말 Nov 17. 2022

세상에 원래라는 건 없어

살고 싶은 질문들


“세상에 원래라는 건 없어. 너는 늘 ‘나는 원래 그래’라는 말로 도망가더라.”


대학교 1학년 가을 즈음 친구가 내게 날린 일침이었다. 우리는 신입생 환영회 때 옆자리에 앉았다가 친구가 되었다. 서로 가치관이 비슷하거나 좋아하는 일들이 비슷해서 친구가 된 게 아니었다. 나는 너무도 내성적이고 소심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면 창피해서 몸을 베베 꼬고 땅만 쳐다보며 어떡하지만 연발하면서 몇 시간이고 서 있을 정도였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지방 소도시에서 학교 집만 왔다 갔다 하며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대학 진학 때문에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문화 충격을 받아 더 쪼그라들었다. 아이들은 자신만만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자기의 얘기를 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나는 평생 들어본 적 없는 각종 클래식이며 팝송을 꿰고 있었다. 스무 살을 살면서 내가 들었던 팝송은 아빠가 노래방에 놀러 갔다가 주워 온 머라이어 캐리의 ‘Merry Christmas’ 카세트테이프 앨범이 전부였다. 


그날은 어떤 동아리에 가입할까 얘기를 나누던 때였다. 학교 기숙사에 살았던 친구는 기숙사 동아리에 이미 가입했다. 기숙사에 살지 않았던 나는 천문회 동아리나 여행 동아리에 가입하려다 결국 실패한 때였다. 혼자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갈 용기가 없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어렵긴 하겠지만 그래도 노력해 보라는 친구의 말에, 가보려고 마음속으로 여러 번 결심했지만 너도 알잖아, 나는 원래 소심하고 내성적이잖아,라고 대답했을 때 친구의 일침을 들었다. 원래 그렇다는 말로 도망가지 말라고.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멍한 눈으로 친구를 보았다. 원래라는 말이 그렇게 나쁜 말인 줄 난생처음 알았다. 아니, 내가 원래라는 말을 달고 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인간은 다른 세상과 관계를 맺고 그곳에서 배운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자신이 됩니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다른 이유입니다. 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며 변화를 간직한 역동적 존재입니다.
안상헌, 미치게 친절한 철학


내가 숱하게 친구에게 내뱉던 ‘나는 원래 소심하잖아.’라는 말의 속뜻은 사실 이랬다. ‘나는 태생부터 소심한 사람이고, 이건 바꿀 수가 없는 문제이며, 변화는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고 어려운 일이라 여기서 한 발자국도 변할 생각이 없으니, 네가 나를 이해하고 받아줘.’ 하지만 지나고 보면 나는 태생부터 소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사람들 앞에 나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발표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한 역술가는 내가 태생이 외롭고 죽을 때까지 외로울 사주라고 말했지만, 지금 나는 고독할지언정 외롭지는 않다.


‘원래’는 틀 안에 존재를 가둔다. 갇힌 존재는 변화하지 않고 고정된 상태에 머문다. 변화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을 절대 바뀔 수 없는 자질인 양 포장한다. ‘원래’를 버리는 일은 자신이 정한 한계 밖으로 나오는 일이다. 마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일과 비슷하다. 새는 깨야 할 껍질이 일생에 하나뿐이지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껍질을 깨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철학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그런 기대를 했었다. 내가 절대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정답을 제시해 주는 철학자를 찾겠다는. 그래서 그가 말하는 삶의 방식을 그.대.로 내 삶에 딱 적용하고 싶다고.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철학에는 절대적인 정답 같은 건 적혀 있지 않을 거라고. 그저 내가 동의하고 수용하고 싶은 생각들을 이 철학자 저 철학자에게서 모아서 칵테일처럼 잘 섞어 내는 거 아닐까 하고. 각자 만들어 낸 칵테일은 저마다 다른 색 다른 맛이겠지. 


내가 계속 살펴야 하는 것은 정답이라는 틀 안에 나를 가두고 싶은 마음일 테다. 그럴 때마다 되뇌고 싶다. 세상에는 원래도 정답도 없다. 인간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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