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돌의 책 글 여행 Nov 16. 2022

여백

<뜻대로 하세요>, 단편소설, 8화



3개월 대기 기간을 보내고 회사와 신규 계약을 맺었다. 분당지점 소속으로 개인사업자 코드를 부여받았다. 일주일에 두 번 분당지점 미팅에 참석했다. 지점장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함께 식사하고 차 마시는 자리를 종종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이나 설렘 따윈 생기지 않았다. 오리려 주눅이 들고 움츠러들었다. 복잡한 마음을 털어내기 위해 기계적으로 스케줄을 소화했다. 고객 약속에 우선적으로 집중했다.


6개월째에 접어들자 매출이 늘었다. 고객들 중에 나와 함께 사업을 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소규모 팀 리더가 되어 팀원의 성장을 돕는 일을 병행했다. 사람들 속에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실적 우수자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지점장은 매달 전월 실적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작은 성취까지도 관심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품 스터디는 개개인이 지닌 장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골고루 기회를 배분했다. 20년 영업 경력으로 만들어낸 그녀만의 내공이었다.


12월 초였. 지점장이 나를 따로 불렀다. 사무실 옆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말을 꺼냈다.

"미선 씨 우리 지점에 온 지 벌써 6개월 차네? 잘 적응해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표정도 진짜 많이 밝아진 거 알아?"

"제 표정이요?"

"그럼. 지점 사람들이 요즘 미선 씨 얘기 많이 물어보잖아. 표정도 밝아지고 일도 너무 잘한다고."

"어머 그래요?"

"보통은, 다른 지점에서 상처받고 지점을 옮겨오면 위축되고 힘들어하거든. 그러다가 그만두는 경우도 있고."

"지점장님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덕분이에요."

지점장의 칭찬에 나는 활짝 웃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그녀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시더니 잠시 뜸을 들였다.

"미선 씨, 오늘 내가 따로 보자고 한 거는..."

"말씀하세요, 지점장님."

"미선 씨도 이제 6개월 차로 접어들었고, 팀원도 늘었잖아. 지금까지는 혼자만 매출을 올리면 되니까. 일하는 게 비교적 단순했을 텐데, 이제는 팀원들한테 리더십도 발휘해야 하고 신경 쓸 일이  많아질 거야. 

"예상은 하고 있어요."

"그동안은 조용히 일만 하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기다려 준 거고. 이달부터는 지점 미팅이랑 제품 스터디에서 강의라던가, 발표 기회가 주어지적극적으로 나서 줬음 해."

지점장은 말을 마치고 예리하지만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커피가 반쯤 담긴 머그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노력해 볼게요, "

"그래, 고마워. 마음먹은 김에, 지점 사람들하고도 조금만 더 마음을 열고 다가갔으면 좋겠어. 사람에 대한 상처가 있는 거는 알지만, 너무 곁을 안주는  오히려 안쓰러워 보여. 일을 하다 보면 별의별 사람들도 많지만, 래도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 더 많잖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을 통해 배우면서 단단해지고 성장해나가는 거 아닐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어요."


나는 곧바로 지점에서 진행하는 제품 강의를 맡았다. 스터디 미팅에서도 실적 우수자로 고객 상담 사례를 공유했다. 돈을 버는 일로 팀원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성장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고 시샘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잘 될 때도 안 될 때도 매한가지였다. 매출에 연동해 오르락내리락하는 수입의 변동폭에 마음이 시소를 탔다.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의 자리를 새로운 사람이 채웠다. 그 시간을 버티며 남아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꾸준히 고객 관리와 제품 공부를 하면서 사소한 일들을 매일 반복하는 사람들은 연봉 4천만 원 이상벌었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수입이 늘자 빚이 줄어들었다. 아파트 전세에서 인근 빌라 전세로 옮긴 것도 지출을 줄이는데 한몫했다. 여전히 마이너스 대출을 쓰고 은행 대출을 갚느라 빠듯했지만, 그 와중에도 적금을 부었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열심히 살았다.


표면적으로는 평온했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불편한 감정이 일었다. 허탈했다. 3년 반 동안 억눌려왔던 시간들이 되살아나며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마음의 무게를 더했다. 과거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기억들을 밀어내기 위해 애썼다. 그 기억들은 아주 느리게 흐려지며 둔감해졌다. 그 시간들을 지나, 돌이킬 수 없는 일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날에 이르렀다. 그제야,  나도 꿈을 꾸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과거의 쓸모 있는 기억들만 건져 올려 오늘을 사는 데 힘을 보태보자고 마음먹었다.





                           ※ 글을 마치며 ※


나는 지금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여백 사이에 있다. 내 삶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지점을 걷고 있다. 불완전했던 3년 반의 시간 동안 열연했배역을 마치고, 새로운 무대 위에 올랐다. 모든 삶이 뜻대로 되지 않겠지만, 그럼에나는 자의든 타의든 뜻대로 나아갈 것이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일 뿐이다. 그들은 등장했다가 퇴장한다. 어떤 이는 일생 동안 7막에 걸쳐 여러 역을 연기한다."  
- 셰익스피어, 《뜻대로 하세요》




단편소설 1화 어쩌다 사장 
단편소설 2화 사장의 옷을 입어야지
단편소설 3화 욕망의 덫에 빠지다
단편소설 4화 날개 잃은 추락
단편소설 5화 선택
단편소설 6화 물러섬
단편소설 7화 용기
● 단편소설 8화 여백 (마지막 회)

※ 내년에 시즌2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8.끝과 시작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