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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Oct 26. 2022

선택

<뜻대로 하세요>, 단편소설, 5화



매 순간 두려운 마음을 밀어내며 여기가 끝이라고 읊조렸다. 추락에도 끝이 있을 거라고 마음대로 단정 지어버렸다. 하지만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끝은 없었던 것일까.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제야 내 안의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시작하는 거야. 더 이상 밀려나지 마.'

나를 밀어내는 모든 것들에 오기가 생겼다. 그 마음이 나를 붙들고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다. 유치원 종일반에 등원시키고 그 시간 안에 고객 약속을 소화하려고 애썼다. 일주일에 두 번은 지점에 들러 매출에 관련된 잔무를 처리했다. 선배 하고 팀 목표 달성 후로 서서히 멀어졌다. 선배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내가 애써 다가가지 않으면 먼저 나를 찾지 않았다.  리더와 소통하지 않은 채로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투명인간이 되어가며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도 퇴색되었다.


꽃샘추위가 한창인 3월 중순이었다. 아침부터 약속이 취소되어 집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분당에 살다 재작년에 제주도로 내려간 경희였다.

"미선아 오랜만이야. 제주 생활 정리하고 올라왔어. 그동안 바빠서 연락 못해서 미안해. 오늘 혹시 분당에 올 수 있니?"

경희는 일을 시작하고 지인 소개로 만난 고객이었다. 나이가 같은 데다 대화가 잘 통해서 두 번째 만났을 때 말을 트고 친구가 됐다. 그녀는 비타민이랑 화장품을 꾸준히 주문하며 가끔 지인들을 소개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남편이 회사 일로 제주도에 발령을 받아 가족이 함께 내려갔다. 그 후로 한동안 연락이 뜸했다.


그녀의 직업은 심리상담사였다. 평소에는 여느 아줌마들처럼 수다스러웠다. 그러다가도 내담자의 전화가 걸려오면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경희는 늘 그렇듯이 호들갑스럽게 나를 맞이했다. 그녀가 커피를 내리고 다과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경희네 집은 깔끔하고 아늑했다. 거실 창문에 반쯤 걷힌 흰색 레이스 커튼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스카이 블루 색 4인용 소파가 25평 아파트 거실 우측 벽면을 채웠다. 소파 맞은편에 벽걸이 TV가 걸려 있고, 그 위로 성경 말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속엣말로 무심히 었다. 그런 나를 경희가  식탁으로 이끌었다. 드립 커피 향이 그윽했다. 그녀에게 제주살이가 어땠는지 묻자, 한참을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경희가 화장실에 간 사이, 휴대폰 메모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경희가 돌아와 나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들자 그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무슨 고민 있어? 표정이 밝지 않아. 재작년에 만났을 땐 신이 나 있었잖아."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가 봐."

밝게 보이려고 톤을 높여 대답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부자연스러웠다. 일을 계속해야 할지, 연체 중인 카드값을 어떻게 메꿔야 할지 근심 걱정이 불쑥불쑥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너, 이야기하다가 가끔 한숨 쉬는 거 알아?"

경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녀의 눈을 피하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거봐. 또 한숨 쉬잖아. 왜 그러는데?"


그녀와 나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녀는 말없이 기다렸다. 심호흡을 한 후 나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요즘 많이 힘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경희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팀 목표 때문에 선배와 갈등이 생겼고,  외톨이로 버티고 있는 데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같이 속상해하고 화를 내며 안타까워했다.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그녀가 내 옆으로 옮겨 앉아 어깨를 감싸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퍼즐 조각을 맞추듯 궁금한 것들을 되물어가며 말을 잇던 경희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 일, 그만두면 안 되는 거야? 다른 일을 알아볼 수도 있잖아."

"그만둘까 수십 번도 더 생각해봤어. 그런데 너무 억울해. 내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로 인해서 일을 그만두는 거잖아. 그게 견딜 수없이 화가 나. 이렇게 그만둬버리면 다른 어떤 일도 잘 해내지 못할 것 같아."

"..."

"그동안 인연을 맺어 온 고객들하고도 신뢰를 깨고 싶지 않아. "

"그랬구나."

경희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꼭 그곳에서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

나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언젠가 너한테 얘기했을 거야. 여기 분당지역에도 너네 회사 지점이 있다고 했잖아. 우리 센터장을 만나러 오는 사람이 여기 지점장이라고 했어. 나한테 샘플도 몇 번 주고 그랬거든. 그 사람 세련되면서도 후덕해 보이고 이미지가 괜찮더라."

"..."

"내 얘기는, 지점만 옮겨서 일을 하면 어떠냐는 거야."

“…”


경희의 제안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경희가 얘기한 분당 지역의 지점장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었다. 본사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지점 대표로 강단에 서곤 했다. 성품이 좋고 리더십이 있다고 평이 나 있었다.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게 되면 3개월의 공백을 감수해야 하는 규정이 었다. 그럼에도 지금보다 나은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괜찮은 생각이야.”

내가 흔쾌히 대답하자, 경희가 신이 나서 말했다.

"내가 그분 연락처 알아봐 줄게."


그날의 선택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었다. 어디로든 나아갈 수만 있다면 그 길 위에 올라서고 싶었다. 날, 때에 맞게 찾아온 기회를 받아들였다.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 희미한 빛을 향해 한걸음 내디뎠다. 최선의 선택이길 간절히 바라며.




단편소설 1화 어쩌다 사장 
단편소설 2화 사장의 옷을 입어야지
단편소설 3화 욕망의 덫에 빠지다
단편소설 4화 날개 잃은 추락
● 단편소설 5화 선택
단편소설 6화 물러섬
단편소설 7화 용기
단편소설 8화 여백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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