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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한엄마 Oct 24. 2022

#5. 권리에 대하여

40대 철학으로 ‘변’해 다시 ‘태’어나는 아줌마 이야기

들어가며


나이 마흔. 인생의 중반에 다다른 나이. 내 인생을 돌아보며 ‘나는 도대체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물음에서 시작된 서양 철학사 공부는 철학자의 평생 주장한 사상을 내 삶에 비춰보는 여행으로까지 발전했다.

이번에는 정, 반, 합을 통한 절대적 지식을 추구한 헤겔,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 명확한 것들만을 인정한다고 주장한 콩트, 마지막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통한 자유를 주장한 벤담과 밀의 사상을 내 삶에 비추어 적용해 보고자 한다.

이들은 근대 서양 철학자들이다. 이들은 현대에 들어서기 직전 인물들로 국가적 차원 이전에 개인의 사상과 생각 정립에 중점을 두었다. 국가의 일원으로서 내가 어떤 생각을 품고 권리를 행사했는지에 대해 이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려 한다.


1.

3월 선배 언니의 죽음과 월드컵의 열기로 정신없던 2002년. 그해 겨울에 나는 처음으로 대통령을 내 손으로 선택했다. 기이하고 정신없는 한 해였다. 대부분 또래는 노무현 후보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딱 한 선배만 판례를 읽고 팬이 되었다며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국가의 운명을 선택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이때 내 선택 기준은 헤겔의 생각에 가까웠다. 국회의원은 보수정당이 다수이니 최고 통수권자는 반대인 진보당인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투표를 했고 노무현 대통령이 탄생했다.


2.

그 이후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몇 년 후 탄핵이 진행됐다. 몇 명의 진보정당 사람과 대다수의 보수정당 국회의원들이 기어코 그렇게 만들었다. 국가 수장으로 있는 시간은 단 5년. 그 시간 안에 또 자신의 위치까지 위협받는 자리라니. 나는 화가 났다. 나는 이 모든 상황에 불만을 제기하고 비판했다. 쇼펜하우어의 인생과 그의 철학을 읽는 순간, 나는 이 시절 내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난 그와 달리 행동하지 않고 방관만 했다.

보수적 색채가 강한 대구 출신 선배가 같이 탄핵 반대 시위에 가자고 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거기 가서 달라지는 게 뭐냐고 했던가?’ 스스로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보수적이던가? 아니면 무기력에 익숙해진 것인가.


3.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길 위  사람들의 염원대로 탄핵을 피할 수 있었다. 임기 후에 논두렁 시계로 빈정거리는 언론들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신문 지상에 실렸다. 결국 그렇게 끝났다. 대통령들이 끊임없이 감옥에 가고 웃음거리가 되고 놀림감이 되는 걸 보았다. 이 사건들을 겪으며 나는 콩트 같은 실증 주의자가 되었다. 실제로 보이고 증명되는 것 외에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팩트’라고 한다.


4.

몇 년이 지나 가정을 이룬 후 딸 둘을 낳은 2015년 어느 날 일이다. 대학 익명 게시판으로 동문과 육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때 후배들은 대학 본부와 어떤 사안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우리 시절 대학교에서 학교와 학생들 갈등은 보통 등록금 인상에 관한 일이었다. 학생회는 등록금 인상에 대한 분노를 단식과 삭발로 표현하였다.  벤담은 행복의 양이 많을수록 좋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마치 등록금이 오른 것에 대한 불행을 그런 행동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이번엔 달랐다. 학교로서 배움의 질이 떨어질 수도 있음에 위기를 느꼈다. 그들은 저항했다.  당시 나는 제 3자였다. 그 이후 날 변화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5.

무장경찰이 대학교 캠퍼스에 침투했다. 최루탄이 난무한 시위가 있던 1980년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선을 넘었다. 나는 1980년대 바로 그 학교 언덕 위 대학생 하숙집에 살고 있었다. 지금은 아현 럭키 아파트가 된 곳이다. 그때도 무서운 경찰차가 대학 앞에 진을 치고 사복경찰이 캠퍼스 안을 활보해도 감히 전투경찰이 상아탑에 들어오진 않았다. 어린 시절 그런 철저함을 봤던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젊은이들이 성스러운 꿈을 키우는 배움터에 쳐들어오는 공권력은 충격이었다.

여론에 따라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여론에 반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더 나쁘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어떤 한 사람이 자신과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로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허용될 수 없다. 《자유론》 2장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서

이 후배가 후에 내 자녀가 될 수 있었다. 내 나라의 미래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 권력을 행사했다. 내 장녀와 후배들이 점거한 본관에 가 힘을 실었다. 정작 내가 학교에 다닐 때 본관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나가며


과거를 돌아보며 내가 어떤 선택했어야 후회가 없었을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역사의 흐름 속에 내게 권리를 줬을 때 나는 항상 선택에 있어 머뭇거리거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감정을 숨긴 채 거부하기도 하고 말없이 참여하기도 했다. 그 메커니즘 속에 분명히 서양 철학자들의 생각들이 속속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철학 공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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