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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Oct 23. 2022

결핍은 사랑을 싣고~

<사랑을 사유하다> 4화

모두가 힘들었던 IMF 시절, 방송사에서도 제작비 절감을 위해 지나간 드라마의 재방송을 정규방송으로 편성하기도 했다. 나의 무의식은 그 중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를 좋아했다. 주인공, 대발이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 중 누구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분노를 참지 못한다.


남동생이 스트리트 파이터에 미쳐 함흥차사가 되는 날이면, 나는 온 동네 오락실을 뒤져 아버지 앞에 동생을 모셔와야 했다. 엄마와 나는 무릎을 꿇고 아버지에게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잘못을 빌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시달리는 날이면 엄마는 무속인이라도 된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아버지한테 벗어나는 길은 결혼밖에 없어”


예언이 적중한 걸까. 24살, 결혼 적령기라고 하기엔 좀 이른 때에 혼담이 오가게 되었다. 편입도 하고 싶고, 직장도 더 다니고 싶었지만, 그때는 그 사람이 그렇게나 좋아 보였다. 게다가 그의 부모님은 아홉수가 사납다며 하루빨리 혼사를 치르자고 독촉했다. 그러나 결혼 준비가 그다지 흐뭇하지만은 않았다.


"새아가, 박도사가 그러는데, 여행운이 좋지 않데. 비행기도 배도 안 된다니, 알아서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자기야, 예단 말인데. 요즘 신부 쪽에서 3백을 준비하고, 신랑 쪽에서 백을 돌려주는 걸로 많이 한대… 우리는 자기가 5백을 주면 내가 3백을 돌려주는 걸로 할까? 어차피, 같은 2백인데 말이야. 남들 보기에도 좋잖아"


현모양처를 꿈꾸던 나는 시댁에 예단비용으로 5백만원을 드리고, 답례로 백만원을 돌려받았다. 신혼여행지는 부산으로 정했다. 1+1이 아쉬웠던 건지, 신혼집은 친구도, 지인도, 가로등도 없는 강원도의 어느 읍소재지 아파트로 구했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뭐가 그리 급했니? 애 밴 것도 아닌데…” 20년 전의 나는 ‘사랑의 결실’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사랑을 사유하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자동완성 기능을 꺼야 한다. 답을 찾기 위해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렇게 나는 흥신소 직원이라도 된 듯 뒷조사를 해서, 내 안의 ‘결핍-원망-핑계’의 순환 노선을 찾아냈다.


아버지는 자기애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나를 강하게 통제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나를 감싸주지 못했다. 나는 울면서 싹싹 빌던 두 손을, 도망치느라 뛰어다닌 맨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처음에는 작았던 내 안의 구멍이 점점 커지면서 그 구멍을 무엇인가로 채우고 싶어졌다. 그 구멍의 이름은 아마도 사르트르가 말하는 결핍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나를 무언가에 투사해야 한다. 어디에 투사했을까.


뒷조사에 따르면, 나는 어릴 때부터 피해자 코스프레하며,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한다. 에너지를 원망에 쏟아부으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교회에 가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가 만들어졌다. 그 면죄부를 핑계로, 모든 것이 용서되었고, 아버지 외에 누구도 무어라고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는 온실에서 살게 되었다. 그렇게 달콤한 맛 핑계에 중독되어 ‘결핍-원망-핑계’의 논스탑 순환시스템이 구성되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의 기력이 약해지자 그 순환열차가 가끔 멈추는 일이 생겼다. 어른이 된 나는 편입할 영어 실력도 없었고, 직장에 다니는 것도 귀찮았다. 슬슬 새로운 순환시스템의 필요성을 느꼈다. 결핍투성이인 나의 무의식은 열심히 탐색해서 아버지를 대신할 남편을 찾아냈다. 빈곤의 여성신 페니아가 풍요의 남성신 포로스를 만나 사랑의 신 에로스를 낳았듯이, 나의 결핍이 남편을 만나 사랑을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일찍 결혼하게 된 것이 아닐까.


 나는 효율적인 그 순환노선을 폐기하기로 했다. 달콤한 맛 3종 셑트(결핍-핑계-원망)를 먹지 못해 아쉽지만, 괜히 폐기된 그 도시락을 먹고 탈 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동안 순환노선에서 편안하게 쉬던 나의 무의식이 다시 일할 때가 왔다. 아버지를 찾아내고, 남편을 사랑을 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아깝지만, 그 맛난 남편 찬스는 이제 버려야 한다. 이렇게 결핍을 채우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나를 나의 실존이라고 부르고 싶다.


애당초 아버지의 딸, 남편의 아내, 아이의 엄마라는 본질 보다는 실존이 먼저인 것 같다. 사르트르가 말했던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가족에게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나는 나의 실존을 만끽할 것이다. 지금은 달콤한 맛이 아니라서 시작부터 지치고 버겁지만, 무언가로 채워질 나의 결핍이 기대되고 설렌다. 뭐가 되었든 두고 볼 것이다.




다음 주 일요일 오전 11시

<사랑을 사유하다> 4화로 이어집니다.



총 8화로 구성예정인 <사랑을 사유하다>시리즈는 처음부터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사랑을 사유하다> 1화-지적 사기 전과 1범이 되다

https://brunch.co.kr/@youyeons/26

<사랑을 사유하다> 2화- 사랑의 시작, 나를 아는 것부터~

https://brunch.co.kr/@youyeons/28

<사랑을 사유하다> 3화- 술잔에 비친 나를 사랑한다

https://brunch.co.kr/@youyeons/29


1991년 방영, 사랑이뭐길래 드라마의 유튜브 영상을 첨부합니다.

https://youtu.be/_GbF9911N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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