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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Oct 02. 2022

지적 사기 전과 1범이 되다

<사랑을 사유하다> 1화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라는 이상한 방법으로 누구나 들었을 법한 유명한 말을 만들어 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의 방법적 회의는 의심의 의심을 반복하는 것이다. 대륙 합리론자들의 이런 철학 스토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나도 이제 생각이란 걸 좀 해야겠다고…


철학을 배워보겠다고, 몇 달간 그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의심하고 확인해 보는 것이다. 하굣길에 까만 리무진 창문이 열리며, ‘내가 니 애비다’라고 나에게 누군가 말할 것 같은 유치한 어린 시절의 의심이 아닌, 철학적 의심과 질문 말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직 이 철학의 바다에 발가락도 넣어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주제에 정의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런 멋들어진 질문은 가당치도 않다. 알맹이 없는 내 삶, 겉멋만 잔뜩 들은 내 글솜씨로 철학적 사유를 풀어내겠다는 거 자체가 사기다.


 결국 산만한 내 정신상태로 할 수 있는 의심이라고 해봤자 고작 이런 거다. “이 남자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기는 한 건가” 또 질문은 이런 수준이다. “사랑이 아닌 것 같은데 여태, 한집에 붙어 있는 건 무슨 속내인가”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진실 하나에 울지요…’라는 노랫말처럼, ‘내 수준이 겨우 이 정도다’라는 진실에 눈물이 난다. 이제 마음을 비우자. 있어 보이게 글 쓰려는 마음도, 빈 껍데기를 가지고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도 모두 비우자. 그리고 인정하자. 내가 겨우 이 정도 질문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이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철학의 바다에 발가락을 살짝 댔다가 떼어 본다. 역시나, 바다의 온도는 아직도 차갑게만 느껴진다. 다행히, 엄지발가락 끝의 감각을 느껴보려고 애를 쓰다가, 이거 하나는 알게 되었다. 내 의심과 질문에 대한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것, 남편에게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매스를 들고 그의 가슴을 열어젖혀서 심장을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려면, 어린이가 예쁘답시고 잠자리의 날개를 뜯고 머리, 가슴, 배를 손톱으로 누르는… 그 정도는 아니다. 내가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아련한 우리의 일상을 기억해보았다. 하루하루 삶 속에서 그와 내가 어떻게 견뎌 내는지…


“주말에 영화 보러 갈 건대…”

사실, 그와 같이 영화 볼 마음은 없다. 그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우울한 독백으로 끝날 게 뻔한 이 말을 내뱉고선 밥을 물에 말아 삼킨다.


“영화 제목이 뭔데?”

그는 나와 같이 결을 하고선, 같은 박자로 밥을 꼭꼭 씹어 삼킨다.


“헤어질 결심이야, 사람들이 재미있대”

나는 혼자 보게 될 영화의 제목을 나에게 알려준다.


“미안, 오늘 공장에 가봐야 해”

그는 오늘의 스케줄을 자신에게 확인시킨다. 우리는 이런 추임새 없는 자기 말 대잔치를 대화라고 우긴다.


그렇다. 나에게 남편은, 그리고, 남편에게 나는 창문 너머의 풍경 같은 존재다. 아니, 분명히 존재는 하지만, 눈에는 띄지 않는 펜, 공책, 영양제 같은 존재다. 그렇게,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다가, 필요에 의해서는 서로에게 발견된다. 이제 답을 찾기 위해 창문을 깨부수고, 들이치는 바람을 맞듯이 그를 느껴보련다. 풍경이 아닌, 존재로서 그를 인식하며, 같이 식사하고, 대화해 보려고 시도해야겠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에 알랭 바디우의 사랑예찬을 들먹이며, 우리 부부는 시원한 따로국밥 같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알랭 바디우를, 철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가 아닌 둘이 존재하는 사랑, 절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꿈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다’라고…

나는 알랭 바디우를 지적으로 만난 척했다. 그 죗값으로 지적 사기 전과 1범이 되었다.


솔직히 이 글에서도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를 꿰맞추려다가 말았다. 전과는 하나면, 족하다. 지적 사기 전과 2범이 되지 않기 위해 앞으로 솔직해지련다. 굳이 철학자를 끌어온다면 공자님을 모셔와야겠다.


顔回 曰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孔子 曰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우리 이제 철 좀 듭시다‘ 브런치 매거진에 올릴 글을 몇십 번 고치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 부부의 사랑을 철학적으로 사유한 그 글을 배고파하는 파쇄기에게 던져주었다. 갈기갈기 갈리는 A4용지를 보며 깨달았다. 한순간에 바스러지는 저 종이처럼 나는 아주 부족하다는 것을… 그런 내가 어찌 ‘사랑이란 이런 거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 어떤 건지 모르는 나는 단 한 번도 온 마음으로 남편의 존재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안다. 사랑도 철학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그것들을 모른다는 것을…


필로소피아,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안다. 나는 지혜도, 철학도, 사랑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알았으니, 철학도 사랑도… 지금부터 시작이다.





글을 읽기 힘든 분을 위한 오디오 파일을 첨부합니다.



다음 주 일요일 오전 11시

<사랑을 사유하다> 2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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