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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Oct 17. 2022

술잔에 비친 나를 사랑한다

<사랑을 사유하다> 3화

축 처진 어깨를 겨우 끌어올리며, ‘오늘도 지옥이겠군’ 하고 나 자신에게 저주를 건다. 그러나 지옥에도 지원군은 있다. 사무실 문을 열면 반가운 얼굴들이 먼저 보인다. 올해 3월부터 같이 근무하는 90년대생 주무관이 웃으면서 음악을 튼다. 그녀의 미소 뒤로 커피 향과 함께 풍기는 젊은 감성이 나를 저주에서 풀어준다. 오늘은 이런 노래가 나온다.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 널 잃고 이렇게 내가 힘들 줄이야. 이젠 남이야, 정말 남이야...”


칵테일 파티 효과다. 의미 있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더 잘 들린다는… ‘술’ 이란 단어에 귀가 솔깃한 건, 술이 나에게 의미 있는 정보란 말이다. 


“나도 술이야.. 맨날 술이야. 원래 사는 게 힘든 거~야. 원래 남이야. 그게 자유야”


그 어떤 의미를 담아서 비판이론가라도 된 듯 노래 가사에 대꾸해 본다. 가사에 시비 거는 걸 보니, ‘내가 참 술을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술 없는 내 인생, 술 없는 오늘 밤은 상상도 하기 싫다. 바보같이 그런 걸 왜 상상해야만 하는가. 그냥 마시면 좋은 걸.


술을 마시면 최초의 나르시시스트인 나르키소스가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 죽음에 이르는 나르키소스처럼 나도 내 모습에 취한다. 그러나 증명해야 할 것이다. 술에 취한 것인지, 술잔에 비친 내 모습에 취한 것인지…그것이 나르시시즘이 아닐까? 그래서인가, 술을 마시면 나는 철학 앞에 내던져진 존재가 된다. 나 자신에게 자꾸만 묻게 된다. 없는 질문을 만들고, 없어도 되는 답을 만들고 싶어진다.




작년에 잘 팔린 철학책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 질문을 살아내라는 말이 나온다.


"질문을 살아요?"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어크로스(2021), p69


그래 질문을 살라고 하니, 술김에 한 번 물어보자. “술은 언제 끊을 거냐” 술 마시면서 술은 언제 끊을 거냐라니…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묻는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나를 걱정하며 물어본 거다. 


그런데 질문에 꼭 정답을 찾아야 하나? 라고 다시 질문해 본다. 


물 마시는 나는 힘들지 않은 것을 굳이 힘들게 받아들인다. 별것 아닌 것을 괴롭게 확대하며 소설을 쓴다. 나는 나를 질질 끌고 다니는 끄달림의 노예다. 나약함을 감추려고 타자를 향해  뒷목 잡고 눈에 쌍심지를 올린다. 술 마시는 나는 술의 언어로 말한다. 따지지 말자며 선명했던 선을 지운다. 뭉뚱그려 퉁친다. 취한 그 순간은 내가 주인이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웃으며 술술 넘어간다.


나를 주인으로 만들어주는 이 술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내 술을 남과 나눠 가질 수 없으니 오롯이 혼자 즐길 수밖에… 이 조용한 혼술생활을 아무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내 피가 나를 배신하고 의사에게 고자질했다. 얼마 전 이름도 기분 나쁘게 생긴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을 받았다. 검사결과도 의사도 “매일, 마시지는 마세요”라고 말했다. 아마 술을 사랑하는 나의 진심을 보았다면, “그렇게 좋으면 계속 드세요” 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의사도 하지 않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니 머릿속에 열이 나면서 귀까지 빨개진다. 질문하고, 생각하고, 답하는 내 안에 다시 질문하는 내가 있다.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술잔에 비친 내 안의 모습에 취한다. 질문하고 사유하는 불콰한 나에게 반한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고 답하니, 의사의 넙데데한 무표정이 술잔 위를 스쳐 지나간다. 그래, 끊을 수도 끊지 않을 수도 있다. 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짠하고 나타나 나를 위로해 줄 수도 있으니까…


언젠가, 술과 헤어지고 혼자서 벌떡 일어서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술 없이도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외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그냥 쉽게 술로 술술 넘기는 꼼수를 쓰련다.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나에게 주인님이라고 불러주는 그곳에서 한 잔 더 하련다.


“내 인생의 주인님, 주인 노릇 하느라, 참 고생 많으시네요. 오늘 밤 사케를 마시면서 뒷목 잡게 했던 일, 죽이고 싶게 싫은 그 사람. 잊으세요. 사랑합니다. 당신을” 



글을 읽기 힘든 분을 위한 오디오 북을 첨부합니다.


다음 주 일요일 오전 11시

<사랑을 사유하다> 4화로 이어집니다.



총 8화로 구성예정인 <사랑을 사유하다>시리즈는 처음부터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사랑을 사유하다> 1화

https://brunch.co.kr/@youyeons/26

<사랑을 사유하다> 2화

https://brunch.co.kr/@youyeons/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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