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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Oct 19. 2022

날개 잃은 추락

<뜻대로 하세요>, 단편소설, 4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지만 점점 나락으로 떨어졌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을 꾼 것이 욕심이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잘도 비켜 가는 욕망의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나였을까!' 억울하다고 해도 소용없었. 이미 벌어진 상황에 대한 책임을 져야 다. 하지만 나는 상황 탓을 하며 일 년 남짓한 시간을 갉아먹었다. 그러는 사이 날개를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1월 첫째 주에 C사의 한국 본사로부터 초청 문자를 받았다. ‘팀 및 개인 실적 목표 달성자’를 축하하는 자리였다. 영국 본사에서도 팀 목표 달성 축하 메시지와 '5박 6일 본사 초청장'을 메일로 보내왔다. 에이스팀은 나를 제외한 네 명 모두, 팀 목표와 개인 실적 우수자에 해당되었다. 나만 빼고 모두  축제 분위기였다. 덩달아 축하 인사를 받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반품이 들어와서 본사에 접수해야 한다는 말을 선배에게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팀 목표로 마감된 매출이라 언급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기한 내에 접수하지 않으면 결국 내가 떠안아야 했다.


1월 7일 월요일이었다. 에이스팀 모두 본사가 주관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행사가 끝나고 S호텔 일식집 VIP룸에서 우리끼리 점심식사를 했다. 영국 본사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 어떤 옷을 입고 갈지 의견이 오고 갔다. 나는 여행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고객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먼저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화장품 파우치를 놓고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시 일식집으로 돌아갔다. VIP룸의 미닫이 문 너머에서 내 이름이 들렸다.

'미선 씨가 여행은 가고 싶은가 보네요. 작년에 두 달이나 넋 놓고 있었잖아요. 그때 다들 마음고생한 거 생각하면, 지금도 짜증 나요. 이번에 미선 씨가 영국 여행 가는 거는 완전히 무임승차하는 거잖아요."

한 달 먼저 에이스팀에 합류한 현주 씨의 목소리였다. 만날 때마다 "우리 같이 힘내요."라며 응원해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 티 내지 마. 이제 팀 프로모션도 끝났으니까, 다시 뭉칠 일은 없을 거야. 결혼 전에 직장 다닐 때만 해도 미선이가 이러지 않았는데. 나도 실망이야..."

이어지는 선배의 목소리에 얼굴이 후끈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견디며 후다닥 뛰쳐나왔다. S호텔에서 최대한 멀어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공원 벤치에 이르러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을 소리 죽여 울었다.


그 후로 지점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영국 본사 여행은 참석하지 않았다. 차려놓은 밥상도 못 찾아먹는다고 수군거렸다. 지점에서 겉돌았지만 당장 일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온전히 노력으로 만들어온 고객들과의 유대관계를 놓을 수 없었다. 나를 환대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일 년을 힘겹게 버티는 사이 빚은 늘어났다. 세 개의 카드 한도를 다 쓰고 카드론, 은행 대출 돌려 막으며 급기야 신용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결국 남편이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찍 퇴근해서 우편물을 들고 기다렸다. 앞에 카드 연체 독촉장을 던지며 큰소리를 냈다.

"이게 다 뭐야. 그동안 뭐하고 다닌 거야?"

"나도 잘해보려고 한 건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돼 버렸어."

미안한과 속상함이 뒤섞인 감정에 복받쳐 울먹였다. 그동안의 상황을 전해 들은 남편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식탁 위의 비타민 통을 집어던졌다. 비디오를 보다 잠이 들었던 아이가 다투는 소리에 놀라 깼다.

"엄마한테 화내지 마. 아빠 왜 그래. 아빠 미워."

소리치는 아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아이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훈아, 엄마랑 생각이 달라서 잠깐 목소리가 커진 거야. 아빠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

남편은 아이를 잠시 달래주고는 겉옷과 차 키를 챙겨 집을 나갔다.


전히 나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어떻게 꺼야 할지 답을 찾지 못했다. '은따'의 시간을 그저 버티고 견뎌냈다. 카드사에서 독촉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진동음에 화들짝 놀랐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삶의 무게가 가슴을 옥죄어 왔다. 때때로 이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고객을 만나고 돌아오는 늦은 오후였다. 시속 120킬로의 속도로 자유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오른쪽으로 북한강 줄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한없이 평온하고 고즈넉해 보였다.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고 핸들을 한 바퀴 돌리면, 불확실해 보이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내가 처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찰나적인 생각을 깨트리며 아이의 해맑은 얼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정신이 명료해졌다.


'이제 더 이상 추락하지 않을 거야.'

지금껏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방관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명의 장난에 휘말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여전히 불확실하고 두려웠지만, 더이상 사람들과 빚으로부터 밀려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살아났다.



● 단편소설 1화 어쩌다 사장
● 단편소설 2화 사장의 옷을 입어야지
● 단편소설 3화 욕망의 덫에 빠지다
● 단편소설 4화 날개 잃은 추락
● 단편소설 5화 선택
● 단편소설 6화 물러섬
● 단편소설 7화 용기
● 단편소설 8화 여백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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