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질문들
요즘 우리 밭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작물은 단연 배추다. 크고 넙죽한 초록 잎들이 켜켜이 쌓이는 걸 보고 있자면 배가 부르다. 남의 배추밭을 훔쳐봐도 우리 배추보다 실한 놈은 없다며 어깨가 절로 솟는다. 시월 초부터는 아침마다 젓가락을 들고 배추밭으로 내려간다. 배춧잎을 갉아먹는 작은 달팽이들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약을 쳐도 소용없어서 사람이 직접 손으로 잡아줘야 한다. 손으로 잡다가 놓친 달팽이가 데구루루 굴러 배추 밑동으로 떨어지면 젓가락으로 집어낸다. 허리를 숙이고 100포기의 배추 속 달팽이를 잡다 보면 허벅지 앞쪽 대퇴직근이 당기고 허리도 끊어질 것 같다. 그런데도 이 단순 노동을 멈출 수가 없다. 나의 소확행이랄까.
작은 일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건 얼마 없는 내 능력 중 하나이다. 예민하고 불평불만 많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상태가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건 소확행을 잡아채는 자질 덕분이 아니겠는가 생각한 적도 많다. 오히려 나는 큰 행복에는 소질이 없다. 몇 년 내로 부장까지 진급하겠다거나 일에서 괄목할만한 성취를 이루겠다는 등의 목표를 세운 적이 없었다.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러니 목표를 이룬 뒤에 얻게 될 행복감도 없다.
소확행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편의대로 소환되어 쓰이고 버려지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품을 판매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제품이야말로 적은 돈으로 작고 확실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그러니 어서 돈을 쓰라고 부추기는 데에 소확행을 소환한다. 소확행이 시시한 누군가들은 대확행을 꿈꿔야 하는 거 아니냐고, 꿈이 없어져 나라의 미래도 암담해지겠다고 말한다. 소득 격차, 불공정한 사회 구조 등의 문제를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소확행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차선책이라며 소확행의 값어치를 깎아내린다.
소확행에 대해 비판적인 분석을 할 때에는 ‘유튜브나 보고 미드나 게임에 빠져 지내는’ 것을 소확행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소확행이 과연 이런 모습이기만 한가. 하루키가 [랑겔한스 섬의 오후]라는 수필집에서 처음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소확행은 한 장의 깨끗한 면 티셔츠가 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감각적 체험을 뜻했다. 깨끗한 면 티셔츠에서 행복감을 느끼려면 적어도 휴일 중 하루에는 집을 청소하고 세탁기를 돌리는 정갈한 일상이 뒷받침되어야 할 테다. 생활은 내팽개쳐 버리고 순간의 행복감에만 치중하는 걸 뜻하는 건 아니었다.
‘내게 떡 하나와 물 한 잔을 주면 제우스 신과 행복을 다투리라.’
에피쿠로스는 떡 하나와 물 한 잔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그는 사실 금욕주의자였다. 쾌락이라는 단어 때문에 실컷 놀고 즐기자고 외친 철학자로 오해받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정원에서 제자들과 함께 금욕을 실천하며 평정을 유지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말한 쾌락은 고통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세속적 욕망을 멀리하고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를 꿈꿨다. 고통은 주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을 때 생겨나므로 작은 것에 만족하는 방식으로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고대 그리스에 에피쿠로스 학파가 있었다면 지금 한국에는 소확행이 있는 셈이다.
배춧잎 사이에 숨은 달팽이를 잡는 작은 노동에서 행복을 느끼다가도 가끔은 내가 팍팍한 현실에서 단지 도피한 건 아닐까, 어차피 이룰 수 없을 거라는 체념으로 욕망하기를 멈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돈이나 명예를 얻는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게 성공한 삶이라는, 사회가 만들어 둔 행복의 관념이 여전히 머릿속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겠지.
텃밭에서 방금 따온 상추쌈을 먹을 때, 쭈그리고 앉아 잔디밭 사이에 난 잡초를 뽑을 때, 밥 먹으러 찾아오는 고양이가 토실토실 살이 찐 걸 볼 때 행복을 느끼는 나는, 역시 사회가 정의한 삶이 딱히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히 에피쿠로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