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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Mar 29. 2024

노천극장 열세 번째 나무 밑

쟁반짜장 하나에 소주 한병이요

"쟁반짜장 하나에 소주 한 병 노천극장 열세 번째 나무 밑으로 가져다주세요.”

소주도 함께 주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편의점에서 종이컵과 함께 샀던 것 같기도 하고, 두 가지 다였을지도 모르겠다. 남의 학교 노천극장을 제 학교의 것인 것 마냥 당당하게 이용하는 모습은 다른 새의 둥지에 뻔뻔하게 알을 낳는 뻐꾸기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추켜 올려도 힘없이 스르르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겨내고 출근길 지하철 틈새에서 상투를 돌리며 학교에 왔지만 휴강을 알리는 조교의 손끝을 보며  허탈함과 동시에 신바람이 났다. 미리 알려주면 좋았겠지만 꽉꽉 채워진 바둑판같은 고등학교 시간표와 달리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테트리스 게임 같은 대학 시간표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괜찮았다. 교복을 갓 벗은 우리의 먹성은 교복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으니 틈만 나면 배고플 나이였나 보다. 학생식당을 갈 수도 있었고, 자취하는 학생들이 많아 그런지 일찍부터 문 여는 식당이 많았음에도 날이 좋은 날엔 바로 붙어있는 옆 학교 노천극장을 향하곤 했다.

왜 거기로 갔는지, 왜 하필 열세 번째 나무였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우리는 ‘열세 번째’라는 어감이 좋았나 보다. 어느 나라에서는 불길한 숫자 중 하나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저 쟁반짜장과 낮술을 함께할 수 있는 좋은 숫자였다.



학교를 산 위에 지은건지 짓다 보니 땅이 솟구쳐 오른 건지 벽돌만큼이나 무거운 전공책을 품에 안고 오르내리기에 쉬운 조건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쯤은 문제 될 것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책가방에 점심 도시락, 저녁 도시락까지 짊어지고 등하교하던 K-고등학생이 아니었던가. 다만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평지였지만 말이다.


경사진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노천극장의 모습은 원형경기장 같다. 삼삼오오 짝지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어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고, 어쩌면 누군가는 전 날 마신 술에 괴로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술집에서 당당하게 신분증을 내밀 수 있는 자신감에 취해 비워내고 채워주기를 반복했을 수도 있겠다. 종이컵에 소주를 채워 계단 위에서 나무 밑에서 내려다보는 노천극장은 대학 그 자체였다.

푸릇푸릇 설레는 연둣빛이 바닥을 힘차게 뚫고 나오는 봄날은 온통 설렘이다. 복학생과 신입생이 오묘하게 어우러져 적당히 어색하고 넘치도록 활기찼다. 종이컵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꿀떡꿀떡 소리를 내며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는 힘이 넘쳤고 터져 나오는 트림을 막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채워졌다. 건물의 위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해 길을 헤매는 이들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가방에 꽉 채워져 있는 전공책만큼 그의 설렘은 채워지다 못해 새어 나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꿈꿔왔던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지 못하고 있는 이의 얼굴에 가득 찬 회색빛 마저 벗겨낼 수 있을 만큼 넓고 평화로웠다.

새싹이 지나간 자리를 채웠던 꽃잎이 사라지는 계절에 그곳은 몹시 뜨겁다. 혹 쟁반짜장의 재료들이 상한 건 아닌가 냄새부터 맡아본다. 뜨거운 쟁반짜장의 열기를 가득 남아 씌워진 비닐 랩처럼 반복되는 과제와 시험에 힘없이 녹아버릴 것 같다가도 태양보다 먼저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라도 할 듯 불타올랐다. 편의점 냉장고 가장 깊숙한 곳에서 꺼내온 유리병은 온몸으로 냉기를 뿜어내다 따뜻하게 식어갔다. 종이컵에 옮겨진 것들의 식는 속도는 조금 더 빨랐다. 오직 나무 아래 말고는 그늘이 없는 공간의 공기는 뜨겁고 뜨거웠다. 마치 우리의 20대처럼.

훅 불어오는 바람조차 더운 계절이 지나갈 때쯤은 제법 낭만적이다. 초저녁부터 바람의 맛을 곁들여 종이컵을 채운다. 처음 불타오르던 불꽃이 공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공기조차 뜨거웠던 시간들이 조금씩 견딜만해짐을 버텨내지 못한 빈자리는 첫니 빠진 아이처럼 허전했지만 아쉽지만은 않았다. 비어버린 종이컵에 다시 병을 기울여 가득 채웠다.

초중고 시절보다 빠르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그곳은 앞이 탁 트여있어 온몸이 덜덜덜 떨렸다. 더 이상의 쟁반짜장 주문은 무리였다. 실내를 찾거나 자판기에서 따뜻한 버튼을 눌러 빈 종이컵을 대신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떠날 수 없는 공간, 그곳은 그랬다.



졸업 후에도 한 번씩 떠오를 때면 쟁반짜장을 함께 했던 동기와 매운 새우깡에 소주를 사들고 열세 번째 나무 밑을 찾아가곤 했다. 부르릉 배달 오토바이 소리에 손을 흔드는 학생들을 지켜보며 쟁반짜장 대신 새우깡을 씹었다. 바람에 실려오는 짜장면의 냄새를 맡으며 서로의 종이컵에 소주를 채웠다.

우리는 더 이상 열세 번째 나무를 찾아가지 않다. 노천극장이 아닌 가게에 앉아 주문을 했고, 편의점 냉장고 깊은 곳이 아니라 벨을 눌러 소주를 주문한다. 구글 위성지도로 돌려 본 그곳에서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열세 번째 나무도 없어졌다. 마치 한 번도 그곳에 있던 적 없었다는 듯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딸꾹질을 하듯 꼴꼴 소리를 내며 종이컵을 채웠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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