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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Apr 05. 2024

당신의 귀갓길은 안녕하십니까

그날 우리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새까맣게 어두운 밤이었다. 걸어온 길로 되돌아가면 번화가였고 한 블록 반 정도만 더 걸어가면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이 있었다. 왕복 8차선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뻗어있는 빌라와 아파트에는 불이 켜진 집보다 꺼진 집이 더 많았다. 오고 가는 사람도 없는 만큼 넓은 도로에 움직이고 있는 차도 없었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졸음이 쏟아졌다.


“오빠, ㅇㅇ역 사거리에서 음주 단속 하고 있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천천히 달리던 자동차는 멈춰 섰다. 스터디가 끝나고 뒤풀이를 한 스터디원들을 태우고 달리던 자동차였다. 유쾌하게 시끄러웠던 차 안은 끔찍한 소식을 전해 들은 듯 순간 조용해졌다. 운전자는 이미 맥주 한 모금을 마신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한 모금이든 한병이든 술을 마시고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되는 거였다. 시간이 늦어서, 차가 끊길 시간이라서,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서 따위의 핑계는 결코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없었다. 가장 집이 멀었던 나를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사람들을 내려주고 집에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다급하게 차를 돌려야 했다. 잘못 탄 버스에서 다급하게 내리듯 그렇게 엉뚱한 곳에서 내려야만 했다.

살짝 비틀거렸던 것도 같다. 새까만 하늘이 벌린 입에 잡아먹힐 것 같아 안간힘을 쓰며 한 걸음씩 발을 뗐다. 그러고 보니 술도 제법 마셨다. 주량을 넘은 만큼이었을까 혹은 그 경계쯤이었을까.



‘빵’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까만 자동차가 가까이에 멈춰 서 있었다. 다시 차를 돌린 스터디 사람들이 돌아왔나 싶었지만 더듬거려 살펴본 기억 속에 떠나버린 그의 차는 흰색이었다.

“저기요, 잠깐만요.”

길을 물어보려나 싶었다.

“술 마셨어요? 무슨 고등학생이 술을 마시고 돌아다녀요?”

차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건넸고, 거기에 대고 대답을 지껄이고 말았다.

“대학생인데요.”

“밤이 늦었는데 혼자 걸어 다니면 위험해요. 여기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여자 혼자 다니기 위험해. 내 동생 같아서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타요. 태워다 줄게.”

조수석 의자를 살짝 두들기며 말하는 목소리에 알콜에 적셔있던 뇌가 순식간에 헹궈져 탈수까지 마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범생 같은 말끔한 외모에 친절한 말투였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본능이 경고를 하는 것 같았다. 한걸음 뒤로 물러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쩌다 자동차 한 대씩 빠르게 지나갈 뿐이었고 사람은커녕 개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저 여기 아파트 살아요. 괜찮아요.”

“그럼 아파트 입구까지 태워 줄게요. 타요.”

물론 거짓말이었고 상대방도 알았을 것이다.

“입구는 어느 쪽으로 가면 되는데요?”

기분 나쁘게 미소를 띠었던 것도 같다. 아파트를 끼고 가다 보면 입구가 나올 텐데도 묻는 건 내가 여기 사는 게 아닐 거라는 확신에서 온 것이었겠지. 대답할 필요도 없이 뛰어 도망치면 될 노릇이었지만 100m를 20초 넘게 걸려 뛰는 속도에 이미 술까지 마셨으니 제대로 도망치기 어려웠다. 길뻗어진 아파트 담장까지 가지도 못한 채 머리채를 잡힐 것 같았다.

번쩍이는 불빛을 비추며 자동차 한 대가 또 지나갔다. 그 끝에 아파트 담벼락 사이로 작은 쪽문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주먹을 꽉 쥐었다.

“저기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면 돼요. 갈게요.”

등 뒤에 눈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쪽문을 향해 걷던 뒤로 천천히 바퀴를 굴리는 그의 차가 느껴졌다. 그 안에 앉아있을 그의 시선도 느껴졌다.



20년쯤 전 일이다. 까만 자동차에 있던 그 사람은 정말 호의를 베푼 것일 수도 있다. 토끼 같은 그의 마음을 하이에나의 눈빛인 것 마냥 음침하게 오해했는지 어떤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지금도 한 번씩 술을 마시고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떠오르는 찝찝한 기억이다. 그 후 술을 마시고 난 후에 택시를 탈 일이 생기면 번호를 먼저 확인하고 함께 마신 이들에게 택시 번호를 찍은 메시지를 보냈다. 다른 이들이 타고 가는 택시 번호도 찍어 저장해 뒀다. 지금이야 카카오택시가 있어 공유가 쉬웠지만 혹시나 불쾌하게 여기는 기사님이 있을까 빠르게 스캔하고 조심스레 전송해야만 했다.

그럼 술을 마시지 않으면 되지 않냐 혹은 일찍 들어가면 되지 않냐 라는 질타를 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것들이 일조할 수는 있겠지만 비단 옷의 노출 수위나 외모의 문제만은 아니듯 늦은 귀가나 술의 탓 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누구라도 안심하고 귀가할 수 있어야 함이 우선 아닐까.


늦은 시간 교복을 입고 학원차에서 내릴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 회식이 늦어져 택시를 타고 오고 있는 아내를 기다리고 있을 남편, 동창 모임에서 취해 돌아오고 있는 남편을 기다리는 그의 아내. 우리가 모두 안전하게 돌아왔으면 한다.

오늘도 늦어질 당신의 귀갓길도 안녕하길 바라본다.



(이미지 출처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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