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빌리파이, 졸로푸트, 렉사프로, 라믹탈
ADHD 약은 조울증을 악화시킬 수 있고, 조울증 치료만 해서는 주의력이 계속 결핍되니까 두 개를 같이 치료하기는 조금 성가시다. 아주 많지는 않아도 이런저런 약을 시도해본 결과를 공유하며 내 이야기를 쓴다. 1편에 등장하는 약은 웰부트린(부프로피온), 스트라테라(아토목세틴), 콘서타(메틸페니데이트), 메디키넷(메틸페니데이트)였고, 2편에는 아빌리파이(아리피프라졸), 졸로푸트(설트랄린), 렉사프로(에스시탈로프람), 라믹탈(라모트리진)이 등장한다.
주의: 저는 의학 및 약학 전문가가 아니고, 개개인의 체질이 천차만별이라 약 반응도 다 다릅니다. 이 글의 정보를 너무 신뢰하지 마시고, 참고하고 싶은 정보는 전문의나 믿을 수 있는 출처를 통해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정신과 약방의 감초, 아빌리파이. 아빌리파이는 고용량(10mg쯤)에서 조현병 치료에 쓰이고, 저용량(2mg쯤)에서 우울증, ADHD, 자폐스펙트럼의 감각 과민, 강박증, 조울증 등등등에 쓰인다. 도파민이 과하면 줄여 주고 너무 적으면 많게 해 준다고 한다. 잘 들을 때의 이야기지만.
아빌리파이Abilify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직관적인 잘난 척(?)이 확 와닿아서 좀 웃겼다. able 하게, 잘 기능하게 해 주겠다니. 이 약의 이름에 관해 논한 비마이너의 기사가 있다: "내가 너를 가능하게 하리라 - 아빌리파이의 탄생" (화학적 사이보그! 장애학이 진짜 엄청나지 않나요? 비마이너에 좋은 글이 많으니 함께 후원해 보아요)
나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인가? 웰부트린 150mg 먹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빌리파이를 추가로 처방받았다. 선생님은 '웰부트린의 작용을 도와주는 역할'이라고 한 서너 번 강조했는데, 내 생각에는 그때 내가 자꾸 소리 과민과 초조함을 호소해서 처방하신 것 같다. 인터넷 찾아보고 '비정형 항정신병약? 난 조현병이었던 건가?' 하는 서프라이즈를 방지하고자 자꾸 웰부트린을 보조한다고 강조했던 것 같기도 하고...
효과와 부작용
효과를 볼 겨를이 없이 금세 끊었다. 둘째 날에 매우 졸렸다. 엄청 졸려서 하루에 낮잠을 3번씩 잤다. 처음엔 ''지난 몇 달간 제대로 못 자던 걸 몰아 자는 걸까?' 싶다가 다음날에도 그러니까 약의 부작용이라고 판단이 됐다. 진짜 개짱 졸렸다. 깨있을 때도 뇌에 안개가 낀 기분이었다.
경험한 부작용은 아니지만, 몸의 신진대사에 영향을 끼치는 약이라는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읽고, 부작용을 일주일 간 참아볼 마음이 사라지기도 했다. 살이 찌고, 장기 복용 시 당뇨병의 위험을 높이고 어쩌고 한다고...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약이기도 하고 살이 안 찌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난 혹시라도 살이 찌면 죽고 싶을 봐 매우 두려웠다(외모 불안이 있는 편이다. 10대 때는 신체의 비대칭에 집착하는 신체이형장애의 증상이 있었다).
용량
1mg였다. 2mg짜리 약을 반으로 쪼개서 받았다. 근데 1편에서도 쓴 것처럼 웰부트린은 CYP2D6 라는 간효소의 강력한 저해제이고, 아빌리파이는 CYP2D6를 통해 대사 된다. 그래서 아빌리파이의 부작용이 더 극대화되었던 것일 가능성도 없진 않을 것 같다.
자가처방...
이때 조금 먹고 남은 아빌리파이를 실리카겔이랑 같이 밀봉해뒀다. 얼마 전 가을에 불쾌성 경조증으로 추정되는 날들이 있었다. 며칠간 미쳐버릴 것처럼 초조하고 금방이라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잠이라도 와라'하는 마음에서 아빌리파이를 한 알 먹어 봤다. 별로 잠이 오지 않았다. 의사와 상의 없이 먹은 거라 겁이 나서 하루만 먹고 관뒀기 때문일지, 웰부트린과 함께 먹지 않아서일지 모르겠다. 다음 진료에서 약물 오남용(?)을 고백했더니 의사 선생님은 "조치를 잘 취했네요. 근데 한번 먹은 걸로는 효과가 없죠?"라고 하였다. 오남용은 아니었나 보다.
이 약은 제네릭으로 받았다. 설트랄린정인지 염산염인지 그런 이름. 웰부트린을 6개월 정도 꾸준히 복용하다가 효과에 만족하지 못해서(복약기 1편 참조) 진료실에서 "약이 효과가 없는데 그냥 끊고 운동 같은 걸 해볼까요?"라고 물어봤다. 의사 쌤은 아직 약을 몇 개 먹어보지도 않았으니 바꿔 보자고 했다. 그리고 바로 설트랄린을 처방해 주셨다.
역시나 집에 와서 약에 관해 폭풍 서치를 했다. 웰부트린은 무기력에 효과가 좋을 뿐이었는데, SSRI(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약들은 우울 삽화, 불안장애, 강박장애, 월경전 불쾌장애, 신체이형장애, 폭식증 등에 모두 반응한다는 점에 마음이 좀 혹했다. 저 중 진단기준에 부합하는 병은 양극성 우울 밖에 없지만, 불안과 강박 성향도 있는 편이고 월경 전 기분 추락도 불편한 정도이기 때문이다. 세로토닌이 충분하면 탄수화물을 좀 덜 먹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효과와 부작용
얘도 효과가 나려면 4-8주 걸리는 약인데, 효과를 보지 못하고 1주일 만에 끊었다.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 졸리고, 머릿속이 흐릿했다. 아마도 연마비, 납마비라고 하는 우울증 증상이 그런 기분이지 싶다. 몸이 너무 오천만 근처럼 느껴졌다. 그냥 삽화가 와서 그랬을 수도 있고, SSRI 복용 초기라 몸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너무 졸리고 힘이 쫙 빠지니까 먹기 싫어서 안 먹었다.
용량
아마도 25mg 혹은 50mg이었을 것인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유난히 치료에 필요한 용량이 다른 약 보다 높아서 약간 신기했다.
의사 선생님은 'SSRI 중에서도 도파민 작용을 조금 더 건드리는 약이라, 율 씨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안 맞았나 보네요. 다른 걸로 먹어보면 돼요.'라고 말하였고, 그렇게 렉사프로가 처방되었다.
지금도 먹고 있는 약이다. 렉사프로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SSRI 중에 가장 세로토닌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약이라고 알고 있다. 많이 쓰는 다른 SSRI들보다는 더 최근에 개발된 편이다. (졸로푸트가 1990년, 프로작이 1986년, 렉사프로가 2002년에 출시됐다. 근데 브린텔릭스라는 더 최신 약이 있다. 얘는 2013년이다.) 그저 인터넷을 뒤져 얻은 TMI 정보일 뿐이다. 약은 복용하는 사람의 체질을 많이 탄다.
부작용
렉사프로도 복용 초기에는 심계항진, 빈맥이 있었다. ADHD약(스트라테라)과 함께 먹었을 때 빈맥이 더 심해서 두 약을 시간 차를 두고 따로 먹었다. "혹시 세로토닌 증후군이 내게도...?!" 하는 걱정이 또 들었는데(프로걱정러) 그렇지는 않았다. 두 달 정도 지나자 부작용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복용하는 약들이 다 성욕을 떨어뜨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성욕을 떨어뜨리는 약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성욕이 별로 없지만, 체감 상 전에는 평균 성욕이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였다고 치면, 항우울제를 SSRI로 바꾼 뒤 성욕은 한 100점 만점에 2 정도? 남들이 부작용이라고 하니까 부작용란에 쓰지만, 성욕이 없어서 나쁠 일은 없기 때문에 부작용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용량
초기 용량은 아마 5mg였고, 꽤 천천히 증량해서 10mg에 정착했다. 최근에 라믹탈로 갈아타려고 용량을 천천히 5mg으로 낮췄는데, 기분이 개판이 됐다. 일을 못하겠어서 병가 내고, 뭐 조금만 스쳐지나도 울었다. 다시 용량을 높여 7.5mg 복용 중이다.
효과
복용한지 한 8-9달 된 것 같다. 나는 이 약이 꽤 잘 들은 것 같다. 항상 내게는 세로토닌이 부족했구나, 하고 깨달았을 정도로. 우울감이 눈 녹듯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정도는 약해졌다. 항우울보다 더 만족했던 효과가 있는데, 덜 불안하고 더 너그러워진 것이다. 특히 반려인과 싸울 때 분노와 폭력성이 있었던 게 완전히 없어졌다. 어떤 상황을 사회적 거절로 받아들이는 민감도도 낮아졌고, 화가 나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사람들이 날 싫어하지 않을까, 내 뒤에서 나를 어떻게 이곳에서 쫓아낼지 논의하고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꽤 줄어든 것 같다.
물론 내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나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내 상처를 보듬기 위해 공부한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근데 예전에도 머리로는 반려인과 싸워도 물건을 던지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사람들이 굳이 내 뒤에서만 나를 욕할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불안감을 낮추려고 노력도 했다. 논리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았을 뿐. 아마 약이 비이성적인 감정이 날뛰는 걸 방지해 준 것 같다.
너무 쓰레기 같은 인간일까 봐 구절구절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반려인에게 폭력성을 보인 게 1년 전이고, 이제는 싸움이 났을 때 오히려 먼저 가라앉히거나 사과하기 시작했다. 반려인에게는 나랑 헤어지고 더 좋은 사람 만나라고 많이 말했는데, 그는 미안하면 고쳐야지 왜 헤어지냐며 안 헤어졌다. (진상 부려서 잡아둔 것이 아니라는 해명...) 친밀한 관계를 좀 무서워해서 조금이라도 반려인이 내 편이라는 사실에 의심이 들면, 곧장 이성을 버리고 투쟁-도피 상태로 돌입했던 것 같다. '금쪽같은 내 파트너' 같은 프로그램 있으면 내가 금쪽이로 출연했을 듯. 아무튼간 고치려고 노력(=약 먹고 상담 받고 금쪽같은 내 새끼 보기)해서 고쳤다.
아 근데 월경 전 감정의 난장판이 엄청 개선된 것 같지는 않다. 약간은 나아졌을 수도 있는데, 여전히 생리 전 기간에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필요시 약으로 웰부트린을 조금 받아뒀다. 그걸 먹을 정신도 없지만... 아무튼 렉사프로가 월경 전 증후군에는 만족할 만한 효과는 없었다.
종합하자면, 내가 먹어본 모든 약 중에 제일 좋다.
경조 / 혼재 증상
단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바로 감정 기복을 더 빠르게 한다는 것.... "항우울제는 양극성 환자에게 급속 순환이나 혼재성 삽화를 유발할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는 류의 경고 문구가 존재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 같다. 나는 사실 복약을 시작하기 전에는 반복적인 우울감만을 호소했고, 초조함, 민감함, 터질 것 같은 기분, 충동적인 재산탕진 같은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근데 이제는 그런 일들이 생긴다. 이 현상에 대한 가설을 세 가지 생각해봤다.
가설 1) 복약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이 방치된 경조증이었던 걸로 미루어 보아, 이 나이가 되어서야 마침내(?) 완전체의(?) 경조증이 발현된 것일 수도 있을까? 약을 먹지 않았어도 계속해서 이런 삽화가 찾아왔을 것.
가설 2) 나의 병증은 전과 비슷한데, 약들이 나의 기분과 에너지 레벨을 전반적으로 올려놓아서 우울감과 무기력감은 완화된 대신 초조함과 과민 증상들은 더 심해진 것.
가설 3) 나는 원래 ADHD가 있어서 새로움 추구와 조심성 없음 충동적임 감정 기복 심함 등등이 많다. 우울할 때는 전반적으로 그런 성향이 동면했다가, 우울감이 완화되어서 나의 ADHD 중 충동적이고 활동적인 부분이 활개 치는 것.
가설 4) 약이 내 기분 변화를 더 극단적으로 만들고 있다.
어느 쪽인지 난 잘 모르겠고, 실험할 방법도 없고, 어찌 됐든 상관없다. 개인적으로는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렉사프로를 먹는 것이 낫다. 재산 탕진이고 뭐고(아직 빚은 안 냈으니) 우울한 건 질색이기 때문이다. 다른 약을 끊고 렉사프로만 먹은 기간도 꽤 된다. 간헐적으로 메디키넷을 넣었다 뺐다 하기도 했다.
렉사프로의 감정 기복에 불만을 느낀 내가 또 실험 정신이 들어서, 조울증 약을 먹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전에 아빌리파이가 그렇게 졸리지만 않았으면, 아빌리파이가, 내가 살찌는 게 싫다고 강력 주장하지 않았으면 리튬이 저용량으로 처방됐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약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부작용도 모르겠고, 효과도 잘 모르겠다.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다. 혹시 모를 뇌전증이 예방되고 있으려나... 간수치가 올라가고 있으려나... 라믹탈을 증량하면서 렉사프로를 감량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위에 썼다시피 렉사프로를 줄이면서 기분이 난장판이 됐다. 라믹탈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효과
모르겠음
용량
125mg에서 멈췄다. 매우매우매우매우 천천히 증량했다. 가장 작은 약인 25mg를 반으로 쪼갠 12.5mg부터 처언처언히이 증량했다. 피부 발진 부작용이 잘못 나면 바로 중환자실 가게 된다며, 의사쌤이 매번 부작용을 체크하면서 증량하셨다.
부작용
의사 선생님의 걱정이 무색하게, 내가 먹어본 모든 정신과 약 중에 가장 부작용이 없는 약이었다. 맨 처음 복용 시에 신경이 쓰여서 그랬을지, 실제 그랬을지 약간 피부 가려움은 있었다. 그 후에는 정말 아무 느낌이 없었다. 약을 까먹고 1주일 안 먹다가 갑자기 먹으면 발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의받았는데, 나는 약 하나만큼은 정말 꼬박꼬박 잘 먹어서 걱정하지 않는다.
추가) 사무직의 일상생활을 할 때는 잘 몰랐는데, 요즘 손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려고 하다 보니 손이 떨리고, 갑작스러운 근육 꿈틀! 하는 기분이 종종 있어서 연필 선 다루기가 쉽지 않다. 미세한 근육 움직임에 약간 손상이 생긴 것 같다. 약 때문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라믹탈 복용 전에는 없던 문제이다.
여기까지 내가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 1년 6개월간 먹어봤던 조울2형 & ADHD 약들에 대한 리뷰(?)였다. 다시 강조하지만, 약은 개개인의 체질을 아주아주 많이 탄다. 내가 좋다고 했던 약이 누군가에게는 부작용 투성이고, 누군가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는 약이 내게는 효과가 좋기도 하다. 아직 안 먹어 본 약에 대한 반응은 알 수가 없는 법인 것 같다. 게다가 내가 받고 있는 처방은 조울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처방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프로걱정러라, 꾸준히 복용하는 약이 생겼으니 정기적으로 심혈관 건강 검사와 간수치 검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딱 맞는 약을 찾아서 치료하고, 마음공부도 많이 하다가 수년 이내에는 약을 더 이상 먹지 않아도 건강한 상태가 되면 좋겠다. 영원히 먹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솔직한 심정.
댓글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이 글에 관해서는 같이 경험담을 나누는 댓글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 있으실 때 하나씩 부탁드려요!
생각이 많아서 인생 살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글이라도 많이 쓰려고요. 누구나 생각에 시간을 쏟아붓지는 않기 때문에, 저의 결과물들이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깨달음이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의 생각을 흥미롭게 보셨다면 구독하고 종종 읽어 주세요.
선율 / 트위터, sunyoo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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