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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Aug 24. 2017

애매함과 모호함

철학의 안과 밖에서

I

애매한 것과 모호한 것은 어떻게 다를까?

표준국어대사전을 봐도 별 도움은 안 되는 것 같다.

애매하다
[형용사] 희미하여 분명하지 아니하다.

모호하다
[형용사] 말이나 태도가 흐리터분하여 분명하지 않다.

좀 다른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정확히 어떻게 다른 것인지는 희미하고 흐리터분하여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 차이를 파악하려고 기를 쓸 필요도 없다. 몰라도 지장 없으니까. 이미 일상에서 별문제 없이 사용하는 말들이지 않은가?


II

둘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도록 사전을 고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어차피 언어가 사전을 좇는 일은 없으니까. 사전에 무슨 짓을 하든 일상에서 "애매하다"와 "모호하다"는 말이 쓰이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전이 개정되면 사람들이 말버릇을 바꾸던가?


게다가 사전을 갑작스레 바꾸는 건 너무나 많은 말들을 틀린 것으로 몰아버리는 일이 된다. 평소처럼 "애매하다"와 "모호하다"는 말을 썼을 뿐인데 사전에 의거해(!) 말 똑바로 안 한다며 구박을 듣게 되는 것이다.


사전은 언어를 바꿀 수도 없고, 바꾸어서도 안 된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언어생활의 변화가 사전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실제로도 그렇고.


III

하지만 철에서는 둘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애매하ambiguous" "모호하vague"엄밀하게 구분되는 용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의 영역 안에서 "애매하다" "모호하다"는 서양어의 번역이다. 저 땅의 언어를 이 땅으로 가져온 것.

그러니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경우는 드물다. 저 땅에서 이 말들이 어떻게 쓰이는 지를 배우는 게 도움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면 양자는 어떻게 다를까?


애매하다

애매한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이다. 둘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는 표현.

곧 애매성은 다의성이다.


"밤"은 밤[夜]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밤[栗]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애매하다.


같은 표현이 항상 똑같이 애매한 것은 아니다. 가령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었다"거나 "나무에서 떨어진 밤은 가져가도 된다"는 문장 속에서 "밤"은 애매하지 않다.


문장도 애매해질 수 있다.

"모두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라는 문장이 그렇다. 이건 (1)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떤 슈퍼스타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2) 누구나 최소 한 명쯤에게는 사랑을 베풀고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애매하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는 슈퍼스타가 있다?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모호하다

모호한 말은 적용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분명하지 않은 말이다.

가령 "대머리다" 말이 모호하다. 대체 머리카락이 몇 가닥 미만이어야 이 말을 할 수 있는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1,999 가닥쯤 있으면 대머리인가? 2,000가닥은?


돈이 얼마야 많아야 부자일까?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부자다" 역시 모호하다.
"현명하다"와 "멋있다"도 마찬가지다.

"명절 인사 문자를 받으면 답장을 보내야 한다"는 규범적 술어의 적용 기준을 정해주는 모(!)정남


IV

이처럼 "애매하다" "모호하다"는 말은 철학의 안과 밖에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당연하다. 철학의 안팎에서 이들 표현을 달리 사용하니까.
이들 표현이 상당수 철학 용어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으되, 그 내용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것과 다른 까닭이다.


애매함과 모호함이 어떻게 다르냐고? 그것은 당신이 어느 땅을 밟고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

그곳은 철학의 안과 밖,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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