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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축구 Jul 21. 2015

‘하늘색’ 맨체스터에서의 1박

영국 맨체스터, 에티하드 스타디움


멘붕에서 시작된 축구 여행


SBS 스포츠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해설을 하던 2014년 초였다. 중계 중 갑자기 강한 '멘붕'이 왔다. 위성 스크린에 어떤 장면이 비춰졌는데 그 때 내가 내뱉은 말이 그런 상황에서 매번 반복적으로 사용하던 문장이었던 탓이다. 


그동안 해설자로서 축구 중계를 거듭하며 조금씩 발전해왔다 생각했는데, 사실 내가 발전한 건 축구가 아닌 방송 스킬이었다. 스스로가 느낄 만큼 당시 나의 축구는 정체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축구 해설자로서의 삶은 분명 만족스러웠지만 동시에 나는 항상 그라운드가 그리웠다. 그렇다고 갑자기 현업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 그날 집으로 돌아와 바로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내가 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축구 여행'이었다. 


얼마 후 나는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KBS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그간 짬짬이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길 기회를 잡았다. 우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재충전을 위한 한 달의 시간을 확보했다. 그리고 곧바로 축구화와 운동복을 챙겨 유럽으로 떠났다. 확실하게 정해놓은 계획 없이 바로 출발했다. 잉글랜드, 독일, 프랑스를 돌며 축구를 보고, 듣고, 하고, 느끼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방송도 그라운드에서 할 수 있다



멘체스터 시티


나는 스타일이 뚜렷한 팀을 좋아한다. '스토크시티' 하면 바로 떠오르는 힘! 끈끈함! 그런 느낌 말이다. 스타일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더라도 관심 갖고 응원하는 팀은 오로지 PSG 뿐이다.


잉글랜드에서의 일정은 8일이었는데 세 경기를 현장에서 보고, 현지 하부리그에서 세 경기를 직접 뛰었다. 도착한 다음 날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첼시와 토트넘의 리그 경기를 봤고, 그 다음 날 차를 렌트해 FA컵 6라운드 맨시티 vs 위건 경기가 열리는 맨체스터로 이동했다. 


그 해 결국 리그 우승을 차지한 13/14시즌 맨시티의 팀 스타일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공격 루트가 매우 다양했고 포지션별 조합도 훌륭했다. 그것만으로도 굳이 렌트를 해서 맨체스터까지 이동할 충분한 이유가 됐다.


런던에서 6시간을 넘게 달려 맨체스터에 도착했다. 에티하드 스타디움은 시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경기장에 가까워 질수록 주차가 어려울 것 같아 경기장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 사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자연스레 경기장으로 걸어가는 팬 무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맨시티의 홈구장 에티하드 스타디움


사실 영국에 오기 전, 맨시티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지인에게 선수단 회복 훈련에 잠시라도 함께할 수 있을지를 급히 타진해봤다. 물론 워낙 내 일정이 갑작스러웠고 맨시티 선수단도 위건전 직후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vs 바르셀로나)를 위해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에티하드 스타디움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확답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행운이 따랐는지, 경기장 앞에서 딱 그 직원분과 맨시티 미디어 담당자인 니라(Nira Abada)를 만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역시 이메일 열 번 보다 한 번의 만남이 더 유용하다는 걸 절감했다. 니라는 내게 프레스 카드를 건내주며 경기 후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갈 매치 리뷰를 작성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맨시티 TV와 인터뷰가 가능한지도 물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지만 아쉽게도 익일 오전 다시 런던에서 일정이 있었기에, 경기 후 리뷰 기고만 가능하고 맨체스터에서 1박은 어렵다고 답했다.


하늘도, 관중석도, 경기장도 온통 하늘색



FA컵: 맨시티 vs 위건


에티하드 스타디움의 프레스석은 매우 쾌적했다. 일단 스탬포드 브릿지, 화이트 하트 레인의 프레스석보다 넓었고 무엇보다 경기를 관전하기 매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킥오프는 오후 4시 5분. 해가 아직 한창 떠 있던 시간이라 푸른 하늘과 관중석 가득한 하늘색 의상의 팬들이 대단히 조화로운 그림을 만들어냈다. 다만 큰 경기장이 벌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지리적 첫인상 때문인지 스탬포드 브릿지처럼 강하게 빠져드는 에너지를 느끼진 못했다.


경기 초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원정팀 위건 팬들의 응원이었다. 그들은 90분 내내 대단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오히려 홈팀인 맨시티 팬들이 조용하고 얌전했다. 


맨시티는 몇몇 포지션에서 로테이션을 활용했다. 그럼에도 경기를 주도하는 저력을 보였으나, 압도하진 못했다. 특히 센터백 데미첼리스는 수비 라인을 리드하며 동시에 앞선에 위치한 야야 투레-하비 가르시아의 다소 어색한 조합까지 체크해야 했다. 너무 많은 역할이 부여된 듯 보였다. 


위건의 발 빠른 공격수 포툰은 지속적인 침투 동작으로 그런 데미첼리스에게 꾸준히 부담을 줬고, 결국 전반 27분 고메즈의 페널티킥으로 위건이 선제골을 뽑았다. 위건 팬들의 응원 소리는 더 커졌고 전반 종료까지 그 볼륨이 유지됐다. 위건의 미드필더 맥어컨과 맥아더는 훌륭한 위치선정과 헌신적인 경기력으로 팀의 페이스를 잘 유지했다.


내외부 시설 모두 전반적으로 깔끔한 느낌


하프타임엔 프레스석과 연결된 프레스룸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미디어 취재진을 위한 각종 음식이 준비돼 있었다. 보통 클럽마다 제공되는 먹거리의 종류와 맛이 다른데, 아직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아스널 프레스룸의 음식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물론 다양한 파이와 고기 요리가 준비돼 있던 맨시티의 음식도 훗날 종종 기억날 정도로 매우 훌륭했다.


후반전. 맨시티는 반전을 노렸지만 2분만에 펄치에게 추가실점했다. 다급해진 펠레그리니 감독은 후반 8분 밀너, 실바, 제코를 동시 투입하며 공격을 강화했다. 나스리가 한 골을 만회하긴 했지만 결국 경기는 위건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경기는 패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공격적인 경기 운용을 보인 덕에 종료 휘슬이 울릴때까지 관중 대부분 자리를 지켰다. 맨시티 팬들이 얌전한 것인지 위건 팬들이 유난히 열정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날 에티하드 스타디움 홈 관중들의 분위기는 다소 차분했다. 


경기 후 귀가하는 선수들과 짧은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맨시티 선수들은 경기 결과에 실망한듯 했지만 나스리, 실바는 친절했다. 특히 나스리는 한국 축구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경기 후 밝게 웃어준 헤수스 나바스


나는 맨시티 사무실로 이동해 매치 리뷰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나와 동행한 후배는 멀리 주차해 놓은 차를 찾으러 갔다. 리뷰를 완성하고 맨시티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다시 런던으로 이동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리뷰를 완성한지 한 시간이 넘도록 후배는 소식이 없었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에티하드 스타디움은 다소 외딴 곳에 위치해 있다. 그제야 떠올려보니 오후에 주차를 하고 경기장까지 꽤 먼 거리를 걸어온 것이 기억났다. 맨시티 직원분이 말했다. 


"에티하드 스타디움 근처는 밤에 위험해요. 저도 예전 퇴근길에 누군가 던진 돌에 맞기도 했고 얼마 전에는 한 중국인 남자가 성추행 당했어요"


맨체스터에 불량배들이 있다면 부디 그들의 취향이 독특하지 않길 바라며 후배가 빨리 돌아오길 기도했다. 다행히 얼마 후 후배가 돌아왔지만 차 없이 홀로였다. 사설 주차장이기 때문에 일요일은 일찍 문을 닫는다고 했다. 주차장 문은 자물쇠로 잠겼고 차를 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단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맨체스터에서 예정에 없던 하룻밤을 보내게 됐다.



예정에 없던 1박


사실 다음 날 런던에서 예정된 일정이 개인적으로 중요했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예정에 없던 하룻밤을 보낸 뒤 오전 맨시티TV와 진행된 인터뷰, 그리고 스타디움 투어를 통해 불편했던 마음은 말끔히 사라졌다.

불편한 마음이 사라질 수 밖에!


대부분의 EPL 클럽은 팬과 관광객 대상의 스타디움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솔직히 얘기하면 맨시티의 스타디움 투어는 아스널 같은 깊은 맛은 없었다. 가장 최근에 기록한 리그 우승 트로피와 스토리를 최대한 부각시켰고 1군에서 결국 실패한 마이카 리차즈가 '성공한 유스 사례'로 비중있게 소개돼 있었다. 


그러나 팀을 상징하는 하늘색처럼 투어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는 분명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다. 특히 몇 차례 리모델링을 거친 현대적 시설과 장비는 무척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모든 시설에 의미와 비전을 부여하는 모습에서 마치 앞으로 한 장 한 장 담아낼 클럽의 성공 스토리를 멋진 표지로 먼저 보여주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에티하드 스타디움은 '축구종가' 잉글랜드에 걸맞는 깊은 맛은 부족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축구에서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클럽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2014년 3월. 에티하드 스타디움은 그들의 하늘색처럼 발랄했다.



글·사진 - 김태륭 (KBS 축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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