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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Mar 14. 2022

내 수염 이상형은 박찬호

내 기필코 정사각형 수염을 내보이리라.

자가 격리가 된 지 3일 차가 되었다. 특별히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복장부터 씻는 것까지 자유로웠다. 지난 토요일 아침, 세수를 하며 면도를 하려는데, 그냥 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차피 일주일간은 재택근무인데 이번 기회에 수염을 한번 길러 보면 어떨까.


전부터 그런 로망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회사에 매인 몸이라 시도조차 불가능했다. 더불어 가장 치명적인 이유는 수염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염뿐 아니라 다리나 팔 등에 최소한의 털만 나있었다. 그에 반면 아내는 털이 무척 많았다. 급기야 얼마 전에는 제모 기계도 사서 집에서 하는데 기계를 댈 때마다 불이 번쩍거려 깜짝 놀랐다. 털이 없는 나를 부러워하는데, 나는 반대로 털이 많은 아내가 부러웠다.


아무래도 수염에 관한 동경은 어릴 때 좋아했던 메이저리거 박찬호 선수 때문인 듯싶다. 콧수염이 턱수염과 이어져 정삭 각형의 멋들어진 형태가 완성되었다. 가끔 공을 던지고 수염을 쓰다듬는 행동은 무척 멋있었다.

지금 보아도 멋있는 찬호박 형님

주변에 친한 형 중 수염을 기르는 분이 있다. 젊은 때부터 많은 털을 주체 못 하더니 삼십 대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프리랜서라 크게 주변 의식할 일도 없어 가능했다. 털이 많아서인지 그 형도 정사각형 형태의 수염이었다. 주당이었던 그 형과 밤새 술을 마시다 보면 취해서 가끔 수염이 술잔에 닿아 촉촉해질 때 손가락으로 쓱 하고 털어냈는데, 왠지 그 모습이 멋져 보였다. 약간 도인 같기도 하고.


이번엔 나도 길러보리라 하며 일요일까지 깍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살짝 거뭇해진 것 같아 뿌듯한 마음에 아내와 아이들에게 자랑했다.


"나 다음 주까지 수염 길러보려는데 어때?"

"아빠! 이상해. 원래 이렇게 듬성듬성 나는 거야? 솔직히 더러워."

"오빠,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마. 예전에 기억 안 나. 그때도 기른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깐 눈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잖아."

"아빠. 너무 웃겨. 이게 뭐야."


둘째는 아예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웃기 시작했다. 아니 대놓고 면전에서 조롱을 하다니. 나중에 멋진 수염으로 이들에게 복수를 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거울을 통해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어제와 별 반 다르지 않았다. 수염아 너는 언제 자라는 거니. 이제 3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마음이 조급해졌다. 야한 생각을 많이 하면 머리카락이 빨리 자란다는 내용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수염에도 적용되려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속설에라도 기대고 싶었다.


오늘도 필시 아내와 아이들의 놀림이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마음 단단히 먹고, 내 기필코 거뭇한 수염을 그들에게 선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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