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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전공자세요?

심리학 전문가에 대한 '오해'

  대학원을 마치고 이제 막 사회로 나왔을 무렵, 내게는 편협한 습관 한 가지가 있었다. 사회로 나와보니 이미 '심리학'이라는 명칭을 걸고 그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계시는 분들이 무척 많았는데, 나도 모르게 그분들의 학력부터 찾게 되고, 심리학 학위부터 찾곤 했던 것이다. '심리학 전문가', '심리학자'라는 타이틀이 눈에 띄었다면, 나는 먼저 그분 프로필 상에 심리학 학위 취득 여부가 기재되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러던 중 만약 심리학 학위 취득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면, 나는 미련 없이 눈을 돌렸다. 이는 아마도 제도권 교육의 수혜자가 아니라면 심리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내가 큰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제도권 교육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섭다고, 그렇게 '남 탓'을 해보고도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양심적으로 나의 편협함을 탓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열등감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당시 아직 사회초년생의 신분이었고 이뤄놓은 것은 전혀 없었다. 강사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달아봤지만, 노하우 가득한 강연 컨텐츠도 딱히 없었고 인지도는 바닥을 기다시피 했다. 그때는 강연을 의뢰해주는 곳도 없었고, 저서도, 이렇다 할 경력도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힘겹게 얻은 심리학 학사, 석사 학위, 단지 그것뿐이었다. 상황이 그러하니 나는 내가 유일하게 가진 것으로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화려한 경력들 앞에서 애써 눈을 감고는, 난 그래도 괜찮은 곳에서의 괜찮은 학위가 있으니 괜찮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오로지 심리학 학위만 가지고 '심리학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내 편협한 오해는 보다 더 일찍부터 깨졌어야 했다. 학위는 잣대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동안 일관되게 맹목적인 학벌만능주의를 환멸해 왔는데, 그리고 스스로 거리를 두어 올 수 있었다고 자부했는데 그것이 내 생각처럼 되지 않았었나 보다. 딱히 내세울 것이 없어지자, 어느새 나는 내가 유일하게 가진 학위에만 숨으려 했다. 현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으면서 어느새 '정신 승리'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학위가 최고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나보다 더 길고 화려한 학위를 가진 분들도 많았다. 오로지 '학위'만으로 누군가를 재단한다 할 것이었다면, 우선 나부터 그 '재단'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박사의 강연을 들으면 들었지, 왜 '석사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 내 강연을 사람들이 들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심리학 학위부터 먼저 확인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열등감의 발로였음을, 그리고 편협한 사고방식의 하나였음을 깨닫고는 그것을 버리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심리학 학위가 없더라도, 심리학을 이야기하고, 심리학을 주장하고, 심리학을 논할 '기회' 자체는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제도권 교육이 미처 다 다루지 못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심리학들이 '재야'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사이비심리학'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권 교육 속에서 나름 '무엇이 보다 더 나은 심리학인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내 입장에서는 과학적인 근거 없이 선동과 날조로 무장된, 단지 심리학이라는 외피만을 두른 채 대중을 현혹하는 그런 류의 이야기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다만 제도권 내에 포섭되지 못한 심리학 담론들을 무조건적으로 외면할 것이 아니라, 일단은 편견 없이 접할 수 있어야 함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단 이야기는 들어 봐야 한다. 그래야 알 수 있다. 심리학 전공자가 아니라 해서 심리학을 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가 심리학에 대해 얼마나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타당한 근거에 입각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지 등을 본 뒤에 나름의 판단을 내려도 충분하다. 한편, 편협한 습관에 대한 반성은 제도권 교육 내에만 얽매여 있는 것이 나 개인의 시야를 좁게 하고, 생각을 줄이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새삼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세상 밖으로 나와보니 정말 가지각색으로, 심리학을 활용해 가치를 만들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때로는 근거 없는 내용으로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없진 않았지만, 대개는 심리학을 나름 가치 있는 방식으로 대중에 소개하고 전달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모두가 울타리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그곳에 왜 들어가야 하는지조차 의문스럽던 시절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하나 둘, 대중을 휘어잡고, 사회적 흐름을 휘어잡았던 생각들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울타리에 들어온 생각들은 수십 가지, 그리고 공고해진 울타리 바깥에서 서성이고 있는 나머지 수백, 수천만 가지의 생각들이 남겨져 있었다. 



  무엇이 '정통(正統)'인가. '정통'은 때로 사회적으로 규정된다. 스스로의 활동 범위를 묶고, 갈라파고스 섬에라도 틀어박힐 것이 아니라면 학문은 끊임없이 사회와, 대중과 소통하고 모종의 '접점'을 찾아내야 한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정부 관계자들의 관심을 먹고, 기업인들의 관심을 먹고, 기타 사회 구성원들의 관심을 먹으면서 학문은 질적, 양적으로 커간다. 그러다 보면 '정통'이 흔들릴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연구적인 노력도 물론 중요하다.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정통'에 대한 규정은 때로 신중해져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아무나 '정통'이 될 수는 없으며, 절대로 그래서도 안 된다. 그래서 '정통'이 되기 위한 길은 매우 엄격하고 고단해야 한다. 하지만 제도권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정통'으로 가는 길 자체는 반드시 열려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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