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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Jun 04. 2021

산책 디자이너의 탄생

두 번째 이야기

2011년 라니씨가 퇴직했다.
정년퇴직.
라니씨가 만 35세에 취업한 생애 두 번째 직장에서 꼬박 30년 하고도 한 학기를 보내고 퇴직을 했다.

라니씨는 영원히 마흔 언저리일 줄 알았다.
라니씨는 영원히 직장인일 줄 알았다.
그랬는데, 라니씨의 일하는 여성, 일하는 엄마의 삶이 일단락되었다.

퇴직 후 라니씨는  여고 동창생들의 산책 코스를 제안하는 ‘산책 디자이너’가 되었다.

이 글은 나밖에 모르던 딸인 내가 엄마 라니씨의 삶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며, 라니씨가 디자인한 산책 이야기, 그리고 라니씨의 엄친아(엄마 친구 아줌마들)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신나게 여고 동창회?


퇴직한 라니씨는 내 걱정과는 달리 혼자서도 잘 쉬고, 잘 놀았다.

나한테 놀아달라면 어쩌지… 하는 것은 나의 괜한 걱정이었다.


퇴직 후 약 1년을 오롯이 쉬고 회복하는데 집중했던 라니씨는 어느 날 여고 동창생들의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라니씨와 내가 서울 근교 신도시에 살던 시절 그 지역 소모임에 꽤 오래 나간 적은 있었지만 졸업기수가 모두 모이는 동창회에는 나간 적이 없었다.


나는 라니씨가 여고 동창회에 적응하지 못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여고 동창회는 기혼 여성들이 주로 모여 아이 학교 얘기, 남편 직장 얘기, 부동산 등 재산 불리는 얘기에서 나이가 들어가면 자녀의 취업, 혼인, 손자녀 이야기, 남편 승진, 퇴직 이야기, 건강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니씨는 여고 동창들과 하하 호호, 깔깔 웃으며 신나게 놀러 다녔다.


라니씨에게는 공부를 꽤나 잘하는 자녀도, 번듯한 직장에 승승장구하는 남편도 없고, 장성한 딸은 결혼할 생각도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여고 동창들과는 할 얘기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여자나 저런 여자나 매한가지…


명문 여고를 다니던 시절에는 누가 본교 출신(같은 이름의 중학교 출신)인지 아닌지, 졸업 후 20대에는 누가 좋은 대학에 진학했는지, 대졸 후에는 누가 취업을 했는지, 취집을 했는지, 어느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지, 남편은 어떤 그럴듯한 직업을 가졌는지,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 몇을 낳았는지, 그러다 마흔 중반이 넘어가면 자식들이 어느 대학에 갔는지, 유학을 갔는지, 취업은 했는지, 어느 대기업에 들어갔는지, 외국의 어느 명문 학교에서 박사를 하는지, 귀국해서 누가 교수가 되었는지, 결혼은 했는지 등등이 중요했으리라.


누군가는 자랑할 것이 없어 초라해지기도 하고, 그런 이유들로 여고 동창 모임을 멀리하게 되기도 하고 그랬을 것이다. 배우자와 일찍이 사별한 라니씨는 아마도 여고 동창들과 나눌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라니씨의 동창 모임도 그런 시기가 있었겠지.

그러다 세월이 흘러 만 예순다섯이 지나고 운 좋게도 평생직장을 다니던 여성들조차 정년퇴직을 하게 된 이때에는 많은 외부적인 조건들이 제법 평등해져 있었다.


40대에는 많이 배운 여자나 못 배운 여자나 매한가지, 50대에는 예쁜 여자나 못난 여자나 매한가지, 60대에는 자식 잘 둔 여자나 못 둔 여자나 매한가지, 70대에는 남편 있는 여자나 없는 여자나 매한가지, 80대에는 돈 있는 여자나, 없는 여자나 매한가지, 90대에는 산에 누운 여자나, 집에 누운 여자나 매한가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순 하고도 대여섯일곱이 된 여자 친구들에게 가장 즐거운 얘기는 그런 외부적인 조건들과는 상관없는 과거의 추억이었다.


라니씨, 의외로 여고동창들과 꿀케미?


여고 동창들과 어울리던 라니씨는 잔뜩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걷는 모임을 하기로 했어. 매주 목요일에 걸을 거야. 목요일은 산책. 목은산회"

라고 말했다.

"오 좋네. 어딜 갈 거야?"

"이제 정해야지."

라니씨의 얼굴은 기대감과 흥분으로 조금 들떠있었다.

나는 좀 의외였다.

응? 여고 동창생들과 이렇게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어?

나는 라니씨를 참 몰랐다. 아 그리고 여고 동창의 관계라는 것이 어떤지도 몰랐다.


그때부터 라니씨는 매주 목요일 친구들과 함께 걷는 모임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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