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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친절한금금 May 08. 2024

건조기에 아이 옷을 넣지 않을 거야

올해도 검은 쓰레기봉투 가득 옷을 받았다. 시누가 동서에게 동서가 나에게 여자 아이 옷을 물려준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받아 창고에 넣어두었던 옷들이 세 박스였다. 부족할 것 없이 모든 옷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유아복 코너에 발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특히 돌 전 아이 옷들은 새것처럼 깨끗하고 예뻐서 옷을 사는 것에 갑을 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가 커 갈수록 물려받는 옷 상태가 달라졌다. 우유만 먹던 아이들이 과일을 맨 손으로 집어 먹다 흘리고 짜장 소스를 묻히는 등 제 때 빨아도 지워지지 않은 얼룩들이 있었다. 자주 입어서 보폴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취향이 확실해진 아이에게 입지 않는 옷들을 들이 밀 수 상황이 다가왔다.


학교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옷을 한 두벌 사기 시작했다. 딸이 둘이라 언니 하나만 옷을 사주면 될 것 같지만 무슨 일을 하든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이념아래 옷을 사도 두 벌씩 사게 되었다. 치수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언니 것을 물려 입었으면 좋겠지만, 쇼핑 와서 빈 손으로 돌아가는 막내를 생각하니 마음이 찡해져 막내에게 어울리는 옷까지 사게 되었다.


성장 속도가 빠른 아이들이다 보니 옷을 여유롭게 샀다. 티셔츠를 사더라도 손바닥을 덮을 정도의 길이로 옷을 샀다. 이염이 될까 걱정되어 분리세탁까지 하며 신경 써서 옷을 세탁했다. 해가 화창했던 주말에 산책을 가기 위해 새로 산 옷을 꺼내 입혔다. 그런데 아이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것처럼 뛰어와 재잘거렸다.


"엄마, 나 키가 큰 것 같아! 옷이 이제 딱 맞아!"


그럴 리가 없었다. 옷을 산 지 일주일 만에 키가 5센티는 컸다는 말인가? 분명 손바닥을 덮을 만큼 길게 내려오던 옷이 손목 아래로 살포시 내려올 정도로 딱 맞아 들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건조기를 돌리면서 아이 옷이 줄어든 것이다. 물려받은 옷들은 이미 세탁 과정을 많이 거쳤기에 더 이상 줄어드는 일이 없었는데 새 옷은 건조기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훅 사이즈가 줄었던 것이다.


실수로 스웨터를 건조기에 돌려 어른 옷이 아이 옷 사이즈만큼 작아진 경험이 있었다. 건조기를 잘못 사용하면 옷이 형편없이 망가질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사용을 멈출 수는 없었다. 물려받은 옷들이기에 편하게 건조기를 애용해 왔었다. 더불어 옷에서 나는 냄새에 민감한 남편은 건조기의 장점을 이용해서 일부러 큰 치수를 사서 줄여 입기도 했다. 수건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도 건조기 덕분에 부풀어 오른 천의 보송한 느낌을 만끽하며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을 주고 산 옷을 못 입을 수 있다는 위기가 닥치니 건조기분리해서 사용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누와 동서가 건조기를 두고도 옷을 행거에 널 때 못마땅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건조기를 이용하면 되는데 굳이 힘들게 헹거에 또 널어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건조기에서 옷을 바로 꺼내지 않으면 옷은 구겨진다. 구겨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레이스는 불에 굽는 오징어처럼 안으로 말려서 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급할 때는 고대기를 이용해 치마 끝에 구겨진 레이스를 펴기도 했었다. 구겨지더라도 레이스가 좀 말려있더라도 편한 쪽을 택해 왔다. 적어도 옷이 못 입을 정도로 줄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귀찮은 수고를 할 때가 왔다. 옷은 말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제 아무리 예쁜 옷이라도 구겨져 있는 옷은 날개가 되어주지 못한다. 비록 돈 주고 산 옷이 아까워 아이 옷을 헹거에 걸어 말리기로 했지만 번거로운 수고를 제외하면 입는 이가 옷걸이에 맞춘 듯 각이 잡힌 차림새를 낼 수 있게 해 준다.


다림질을 한 것이 아니라면 옷 끝을 두 손으로 잡은 채 탁탁 털어 옷걸이에 걸기만 해도 무딘 각을 잡은 채 입을 수 있다. 왜 티브이에서 빨래하는 장면이 나오면 옷을 탁탁 터는지 알 것 같다. 방망이로 옷을 두들기던 그 옛날의 이유들도 그러하겠지. 다리미와 방망이를 들 여유는 없지만 맨 손으로 빨래를 널 의지가 생겼다.


조금은 귀찮다. 한 번에 몰아서 넣고 꺼내 개 버리면 되는 데 손이 가는 일을 한다는 건 선택적 게으르니스트에게 굉장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예쁘게 입으려고 돈을 주고 샀기에 잠깐의 수고를 하기로 했다. 구겨진 옷과 잘 펴진 옷을 입고 현관을 나갈 때의 온도차가 크다는 것을 실감하니까. 물려 입는 옷이라고 해도 잘 세탁한다면 새 옷처럼 깔끔하다. 비싼 브랜드를 사지 않는 우리 집에 있는 유일한 고가의 옷들이 물려받은 옷들이다. 이를 좀 더 구색에 맞춰 입으려면 나의 손목과 두세 번의 번건로움은 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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