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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May 08. 2024

아빠가 아프다는 소식에 간병인 보험부터 들었다

아빠는 잔기침을 달고 산다. 오랜 세월 피워온 담배 때문이다. 흡연이 건강에 안 좋다고, 끊지 못하면 줄이기라도 하자고 가족들이 수십, 수백 번을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딱 두 번,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담배를 끊으려고 했지만 3주를 넘기지 못하셨다. 이제 아빠는 팔순을 앞두고 있고, 우리는 언젠가부터는 아빠에게 담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빠에게 드리는 선물에 '담배 좀 줄이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문구를 적은 카드를 같이 넣어 드리는, 그 정도였다.


고만고만했던 아빠의 잔기침이 심상치 않아 진 건 6개월 전 코로나를 겪고부터이다. 횟수도 늘고, 기침소리도 안 좋아졌고, 무엇보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셨다. 아빠는 코로나에 걸렸을 때 끙끙 앓으면서도 병원에 가시지 않았다. 약 먹어도 똑같이 아플 거라며 그야말로 집에서 쌩으로 코로나를 앓으셨다. 아빠 연세에 코로나는 위험할 수 있다고 협박해도 소용없었다.


“아빠 벌써 몇 달째 이렇게 기침을 하는 거예요. 제발 병원 좀 가자고요.”

“싫다. 좀 있으면 나질 텐데. “

기침을 삼키며 아빠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는 원래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세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두려우셨던 것 같다. 당신이 담배를 오래 많이 피워온 사실이, 그로 인해 폐에 관련된 병이 생겼을까 봐, 그것을 확인하게 될까 봐, 그것에 대한 치료로 말년을 고통스럽게 보내게 될까 봐. 마치 병이 있다면 그 병을 영원히 모른 채 앓다 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다.




아이라면 들쳐 업고 억지로라도 병원에 갈텐데 다 큰 성인이 한사코 고집을 부리니 방법이 없었다. 몰래 수면제라도 국에 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드디어 아빠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싶다고 하셨다. 몸이 힘든 걸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아니면 건강에 대한 갈망이 갑자기 커지셨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아빠의 인내심에 한계가 올 정도로 아프다는 것이다. 아빠는 예전에 맹장이 터졌는데도 끝까지 병원에 가지 않고 참는 바람에 복막염까지 갔던, 이해하기 힘든 경지의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다.


아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병원을 예약하려고 했는데, 의료계 파업으로 큰 병원은 예약이 되지 않았다. 3년 전에 나의 병으로 의사를 알아볼 때도 그랬지만 사돈의 팔촌까지, 지인 중에 의사 한 명 없다니. 우리는 그저 여기저기 병원에 전화를 돌릴 뿐이었다. 이왕이면 경력이 오래된 베테랑 의사에게 진료를 보고 싶었지만 찬물 더운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아빠는 나날이 쇠약해져서 식사도 겨우 하시고 기침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대체 하루가 급한 중증질환의 환자들은 어쩌고 있는 걸까. 정부도 의료계도 원망스러웠다. 며칠을 알아본 끝에 한 병원에서 진료를 해준다고 해서 겨우 5월9일 면담날짜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동생들에게 말했다.


"간병인 보험부터 들자."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 아버지 병원행에 앞서 간병인 보험부터 들다니, 효자는 아니구나 싶을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  자식 셋 중에 둘이 암환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장암 4기이고, 바로 밑 동생은 갑상선암 1기 환자이다. 동생은 본인도 암환자이면서 나를 돌보겠다고 같이 서울에서 남양주로 이사를 왔다. 막내는 회사를 다니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올케는 직장인인 데다 간병을 자청하면 모를까, 며느리라는 이유로 부담을 지울 수는 없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자청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남은 사람은 칠순이 넘은 엄마인데 연세도 연세지만 엄마아빠는 평생 금술이 좋지 않았다. 두 분이 어떻게 안 맞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너무 긴 지면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이제 와서 서로의 모든 것을 내어줘야 하는, 인간으로서 한계점을 직면하게 되는 간병이라는 무게를 견디게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다. 평생을 미워했던 사람을 간병해야 하는 엄마의 말년은 측은하다. 평생을 시달렸던 사람에게 간병을 받아야 하는 아빠의 말년은 또 다른 측은함이다.


불운은 한꺼번에 온다고, 건강하시던 외할머니까지 예전 같지 않게 기운을 못 차리시고 식사를 못해 엄마가 외할머니 반찬을 만들어 나르는 요즘.




그렇게 아빠의 간병인 보험처리를 어제 완료했다. 엄마 아빠가 아프게 될 경우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내가 치료를 받던 암병동에서였다. 고령의 노인 환자를 간호하는 고령의 배우자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면서 저 간호가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만일 우리 집에서도 저런 상황이 생간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족들의 얼굴을 순서대로 떠올려 보았다.


물론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온 가족이 최대한 돌아가며 아빠의 옆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창 치료받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어린이 한 명을 키우기 위해 온마을이 필요한 것처럼, 암환자 한 명을 케어하기 위해서 온마을이 필요하다.' 특히 엄마가 환자가 될 경우, 남자는 돈벌이를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온전히 케어에 집중하기 힘들고, 결국 환자 케어 및 환자가 하던 육아와 집안일은 다른 가족이 나눠 맡을 수밖에 없게 된다. 정말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혹자는 병원도 가기 전에 지레 겁을 먹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암을 겪으며 배운 게 있다면 세상 무슨 일이든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만은 이 세상의 불운에 예외가 될 수 있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동생은 건강검진을 하다가 갑상선 추가 검사 건의를 받았고, '설마' 했는데 갑상선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동생의 수술 석 달 뒤 내가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그때도 '설마' 나까지 암이겠냐고 했다. 우리 양가 모두 친인척 중에 암환자는 한 명도 없었기에 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조직검사결과 3기로 이미 꽤 진행된 상태였다. 수술과 항암 후 1년  검사에서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했지만, 그 누구보다 당사자인 내가 가장 그렇게 믿었지만,  좋아지기는커녕 폐로 전이가 된 사실을 알고 4기 판정을 받아 또 수술과 항암을 하느라 1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기본 치료가 끝나 겨우 한숨 돌린 지 6개월 만에 이제는 아빠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 '설마', '진짜?', '말도 안돼'의 일련의 단어들을 2년 넘게 반복했는데 또 '설마'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포르투갈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 ‘불안의 서’에서 "신들의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그들의 노예다."라고 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 일이 해프닝으로 끝나기를 기도하는 것뿐이다.


우리 가족의 고난을 멈추게 하소서. 아빠가 조금만 더 갈 수 있게 하소서. 조금 더.




*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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