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젊은 다중인격자의 슬픔
(상단 그림 제목: 텅빈 가슴)ㅡ유성마카,크레용,수채화물감
젊은 다중인격자의 슬픔
검사 결과지가 배부되던 날이었다. 하나씩 이름을 부르며 나눠주시던 담임선생님께서, 내 순서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잉?” 하며 결과지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시는게 아닌가. 시험 성적표도 아닌데 나는 괜스레 긴장이 올라왔다. ‘무슨일이지?’
그렇게 내 순서에서 잠시 지체된 결과지를 내게 건네시며 나즈막히 중얼거리셨던 선생님의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거참 희한한 애네….”
몇십년전인 고등학교 시절 실시된 성격유형검사(그 검사의 정확한 명칭은 생각나지 않는다. '적성검사'였을지도 모른다.)의 결과가 갑자기 생각난건, 공감을 받는 일에 대한 나의 강렬한 열망에 대해 한바탕 썰을 풀고싶어서이다. 요즘에야 MBTI네 뭐네 해서 그리 특별하달것도 없는 일반화된 개념이지만, 몇십년전인 그당시 고등학생들로서는 낯설고 흥미진진한 경험이었다.
검사결과지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도데체 나의 어떤점이 희한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친구들의 결과지를 하나씩 훓어보고나니 그제야 대충 감이 왔다. 친구들의 결과지에는 지배적 성향이란게 존재했다. 물론, 모든 사람의 기질과 성향이 첨예하게 한방향만을 가리키고 있는것만은 아닐것이다. 그래도 어느정도는 넙데데한 방향성을 가진 분포도를 그리고 있기 마련인데, 나의 검사지에는 그게 없었다. 나의 분포도는 지배적 성향이 실종된 채 이상한 가시덤불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같은반 친구들 중 아무도 그런 모양을 하고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 다중인격 인가?’
이 검사 결과가 시험성적표 만큼이나 내 인생에서 차지하게될 지분이 클리는 만무했지만, 그래도 여간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뭐야, 나만….쳇!’ 내 성격상 검사지 작성을 건성으로 한다거나 대충한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꼼꼼히 작성을 했으면 했지, 나는 이런일에 세밀하지 않았을 리 없는 인간이다. 가만히 놓아둘 리 없는 친구들은 나에게 다중이냐며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황금박쥐, 외계인, 싸이코, 다중인격자… 별소리를 다 들었다. 이것들이 정말…
처음에는 짜증스럽고 의아했던 이 상황이, 갈수록 서글픈 감정으로 변해갔다. 왠지 나의 앞으로의 인생이 순탄하게 풀리지 않을것만 같은 막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결과지의 분위기가 말해주듯 난해한 인생을 맞이하게 될까봐, 나의 미래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워졌었다.
사실 이 비슷한 일들은 그 이후에도 일어났다. 대학 졸업 무렵, 난데없이 아토피 피부염을 앓게 되었는데 피부과 치료로는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한의원을 찾게 되었다.
진맥을 하고 체질분석을 위해 여러가지 질의응답과 테스트를 거치는 과정에서, 담당 한의사가 연신 고개를 갸우뚱 하시는게 아닌가. 체질분석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분명 성심성의껏 검사에 임했건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걸까. 그리고 뒤이은 선생님의 나직한 혼잣말을 데자뷰 처럼 듣고 말았다. ‘거참 희한하네.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맙소사.
난 도대체 뭘까.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일까. 친구들 얘기처럼 진짜로 외계인은 아니겠지? 성격유형과 체질유형의 분석은 엄연히 구별된 영역이며 본질적으로 다른 분야가 아닌가. 왜 이 두 지표가 나란히 말썽인 걸까. 니네 나한테 왜이러는 건데…. 좋은건지 나쁜건지 잘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나는 분류가 안되는 인간인 모양이다.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못하는 모호한 사람. 동시에 모든 유형에 해당되기도 하는 사람. 까…깍두기?
내내 소심하다가도 위험스럽게 용감해지거나, 주욱 내성적으로 굴다가도 한번씩 인싸기질같은게 툭툭 튀어나올때가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몹쓸 박쥐성향은 일일히 다 읊을수도 없을 정도이다. 히키코모리인지 관종인지 영 헷갈리게 굴때가 있는가 하면, 내내 고리타분하다가 돌연 창의력 뿜뿜. 널을 뛴다.
일년내내 시커먼 아우라를 스물스물 피우며 정신은 저 아래 지하에 쳐박혀 있지만, 한번씩 필받으면 천정이 날아가도 모를 지경이 된다. 생각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 필히 조울증이 의심되는 대목이지만 의사가 그건 또 아니라고 한다.
지인들이 고생이다. 어느 장단에 맞춰 춤춰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단다. 남편은 더 고생이다. 거의 불쌍할 지경이지만 신통하게도 용케 적응에 성공한 케이스다. 마누라 변덕이 하늘을 찌르지만 귀엽다 치고 뭘좀 많이 내려놓은 눈치다.
미친듯이 미안하다.
나랑 살아내는 이 남자, 절이라도 해야될 판이다.
세상사 그 어떤 시련도 능히 헤쳐나갈 인재다.
나는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못하는 박쥐같은 사람인 것이다.
성향이 다중적인데에다 변덕까지 죽끓는다. 정말 안타깝지만, 이런 캐릭터로 살다보면 누구에게도 공감받기가 쉽지 않다. 드물기 때문이다. 어느쪽 어느 진영인지, 입장을 확실히 해야만 살아가기가 그나마 쉬워지는 세상이다. 입장을 확실히 하지 못하는 사람은 원천적으로 줄서는 일이 불가하므로, 이리저리 애매하게 떠밀려 다니다가 낙오될 가능성만 농후해 진다. 낙동강 오리알. 느무 위험하다.
다만 이 세상에는, 다행스럽게도 박쥐나 깍두기 같은 존재들이 엄연히 존재하며, 때로는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들은 자칫 박쥐처럼 따돌림 당하지만 혼탁한 갈등상황을 중재하는 다리가 될수도 있다. 물론 지극히 나 혼자만의 주관적인 의견이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중에서 사회적 중재자가 존재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편향적인 성격에 비해, 여러 입장을 동시에 두루 이해하기 좋은 성격이라고 기어코 박박 우겨대는 중이다. 이것은 언제나 진영이 불명확해왔던 나를 위한 변이자, 미화이며, 동시에 작은 바람 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단점인것도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는 일에 취약하다. 명확한 입장을 강요 받으면, 쉽사리 혼란에 빠져들고 식은땀을 흘린다. 아 참, 선택장애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택과 갈등의 상황에 놓이는것을 특히 곤혹스러워 하고, 갈등을 신속히 해소시키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는다. 심지어 자신의 과실이 없는 상황임에도 신속한 평화를 위해 사과로 갈등을 속히 종결시켜버리는 짓까지 한다. 신파다. 어설픈 평화주의자. 왠 오버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입장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 내면으로의 탐색을 일삼는 경향이 있다. 간혹 자기자신에 대한 이런 관심이 지독한 자기애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나는 그말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나의 경우, 자기애보다는 자기혐오나 자책의 방향으로 훨씬 더 재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같은 것 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나자신을 잘 모르고 나의 색깔이나 입장을 잘 모르다 보니 정신적 코어가 약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난히 불안해 하고 예민한 것을 보면 말이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알수 없으나 어느정도 인과관계가 있어보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기 중심이 확고한 사람들(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부류이다) 을 보면 자칫 독단적으로 보이거나 이기적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들은 중심이 확고하고 호불호가 명확한 성격이다 보니 멘탈또한 견고해 보인다.
“네가 중간에 없었더라면 난 견디지 못했을거야” . 언제부터였을까. 이런 말을 조금씩 주변으로부터 듣기 시작했던것이. 아마도 어려서부터였던것 같다. 깍두기들의 존재 가치가 이런식이라면 조금 슬프지만, 어디에도 속하기 어렵기에 ‘뜻하지 않게’ 화해의 전령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중재자? 말이좋지, 실속은 요만큼도 없다. 허당이다. 이제는 이 노릇이 고달파 욕지기가 나지만 나름의 보람도 있다. 혼탁한 상황일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이제 어느정도 나이가 들고나니 쉽사리 중재에 나서지 않는 간교함도 생겼다. 자기 중심이 견고하지 못한 상황에서 섣불리 평화의 도구?가 되고자 한다는것은 억지이자 오만이라는 생각을 슬그머니 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황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의 묵직한 무언가가 내안에 더욱 자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져간다. 변질인지 성장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더 안전한 선택이기는 한것같다. 지금보다 더 안정을 찾고 싶고 더 건강해 지고 싶다. 물론 공감받는 일에 대한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어머! 맞아 맞아~! 나두 나두~!!"
(제목: 텅빈 가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