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과 '김밥천국'의 만남
1990년대 초, 내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였다. 공원에 김밥을 싸서 가면, 주변 미국인들은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곤 했다. "저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맞느냐"고 노골적으로 묻는 사람도 있었다. 검은색 김은 그들에게 '태운 종이'처럼 보였고, 입에 달라붙는 식감은 불쾌감을 주었다. 한국인에게는 고소한 김 맛이 그들에겐 일종의 '비린내'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의 설움은 잊히지 않는다. 한때 푸대접받았던 김밥의 위상이 지금처럼 높아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2020년대,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냉동 김밥이 북미와 유럽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뉴욕에서는 한 줄에 2만원짜리 프리미엄 김밥이 등장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경북 김천시가 개최한 '김밥 축제'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15만 명의 인파를 끌어모아 대성공을 거두었다. 마케팅 전문가로서 이 '김밥 축제'의 성공을 단순한 우연이 아닌, '소비자 중심 브랜딩'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주목한다. 특히 김천시가 보여준 '기발한 연결고리' 수용은 고질적인 틀에 갇힌 국내 축제 기획자들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오랜 시간 동안 국내 지역 축제들을 컨설팅하면서 한계를 느껴왔다. 대부분의 기획은 '우리가 가진 것(지역 특산물)'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결국 매년 비슷한 콘텐츠와 방식으로 흘러갔다.
이런 상황에서, 김천시의 김밥 축제 아이디어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김천시는 본래 김밥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도시다. 그러나 2023년, 김천시는 MZ세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김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 '김밥'이라는 놀라운 답변을 얻었다. 이는 전국적인 프랜차이즈 '김밥천국'을 줄여 '김천'이라고 부르는 젊은 세대의 언어 습관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지자체라면 '우스갯소리'로 흘려보냈을 이 결과를, 김천시 담당자들은 "이것이 바로 아이디어다!"라고 외치며 축제로 승화시켰다. 이것은 공급자 중심의 논리를 버리고, 소비자가 만들어낸 자발적인 연상(Association)을 공식적인 브랜드 자산으로 적극 수용한 '소비자 주도 브랜딩'의 완벽한 예시이다. 수십억을 들여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하는 대신, 이미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강력한 코드를 활용한 것이다.
김밥 축제가 단순히 '재미있는 이름'을 넘어 실제 인구(13만 명)를 능가하는 15만 명의 방문객을 모은 것은 마케팅적 요인이 분명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1. 강력한 '밈(Meme)'을 통한 바이럴 프레임 구축: '김천'과 '김밥천국'의 연관성은 그 자체로 강력한 뉴스 가치를 지닌다. "이름 때문에 김밥 축제를 여는 도시"라는 스토리는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되었고, 축제 개최 전부터 대중의 호기심을 극대화했다. 굳이 많은 돈을 들여 홍보하지 않아도 소비자들이 '이야깃거리'로 삼아 자발적으로 공유하게 만든 것이다.
2. K-푸드 최전선, '글로벌 김밥 모멘텀' 활용: 김밥은 이제 한국인의 '솔 푸드(Soul Food)'를 넘어, 지구촌의 '트렌디 푸드(Trendy Food)'가 되었다. 해외에서의 냉동 김밥 대박, 영화 속 김밥 장면 화제 등 김밥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을 정확히 포착했다. 김천 김밥 축제는 단순한 지역 축제가 아닌, '글로벌 트렌드를 체험하는 장'으로서의 의미를 부여받아 펀(Fun) 요소를 넘어설 수 있었다.
3. '플랫폼 푸드'로서의 김밥의 유연성: 김밥은 '김과 밥'이라는 기본 틀 위에 참치, 치즈, 돈가스, 이색 채소 등 무궁무진한 재료를 담아낼 수 있는 '유연한 플랫폼'을 제공한다. 이 유연성은 축제 참가자들에게 끝없는 '다양성(Variety)'을 제공했으며, 이는 미식 체험을 중요시하는 젊은 방문객들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다. 김밥이라는 '핵심 컨셉'은 유지하되, 내용은 끊임없이 혁신할 수 있는 장점을 가졌다.
이번 김천 김밥 축제의 성공을 보며 실로 오랜만에 마케팅 전문가로서의 기쁨과 감사함을 느낀다. 늘 해오던 방식, 익숙한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실망감을 안겨주었던 수많은 축제 사례와 달리, 김천시는 진정한 '소비자의 언어'를 읽고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 성공은 "마케팅은 소비자의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기본적인 진리를 다시 한번 증명한다. IMF 실직자들이 생계를 위해 뛰어들었던 '김밥 프랜차이즈'의 역사가 이제는 한 도시를 살리고 K-푸드의 위상을 높이는 축제의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감동적이다.
김천 김밥 축제는 단순히 대박 난 행사를 넘어, 시대의 흐름과 소비자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고정관념을 부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마케팅 교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