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하는 천년고찰 108배 프로젝트 | 세 번째 108배]
"엄마 종묘 가봤어?"
책에서 봤는지 아이가 종묘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특별한 계획이 없었기에 모처럼 서울 구경에 나서기로 했다. 종묘 근처에는 덕수궁, 창덕궁, 운현궁도 있고, 이것저것 볼거리가 많아 부지런히 움직이면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을 나서는데 아이가 종묘 근처에도 천년고찰이 있느냐고 묻는다. 작년 이맘때 서울 구경 갔을 때 지나쳐온 조계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뉴스에서만 보던 안국동 집회를 궁금해하는 아이를 데리고 근처를 지났던 게 떠올랐다. 그랬더니 종묘에 가는 김에 조계사도 들르자 한다.
"혹시 오늘도 108배할 거야?"
아이에게 물었더니 해보고 싶다 한다.
평일 오전 출퇴근 시간을 피해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종로로 향한다.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해 보지 못한 아이는 버스만 타도 엄청 신나 한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부터 버스에 타고 내릴 때 교통카드를 찍는 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나 버스에 탄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 긴 버스 노선도를 훑으며 어디쯤 왔나 가늠하는 일 모두 온통 아이에겐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인가 보다.
"엄마 이제 누르면 돼?"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아이가 하차버튼을 눌러야 할지 물어봤다. 고개를 끄덕이자 버튼을 누르곤 매고 있던 안전벨트를 풀어 내릴 준비를 한다.
"감사합니다."
버스가 멈추고 아이가 뒷문으로 내리며 큰소리로 인사한다. 아이는 버스에 탈 때도 교통카드를 찍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아이들끼리나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 서로 존댓말을 쓰고 인사를 열심히 하는 문화가 있다. 덕분에 아이는 습관처럼 어디서든 인사를 한다. 아이가 인사할 때마다 기사님들이 상냥하게 화답해 주셔서 수줍음 많은 나도 버스에 타고 내릴 때 덩달아 소리 내어 인사를 한다.
아침으로 광화문 근처 오래된 해장국집에서 국밥을 먹는다. 아이는 나처럼 국밥을 좋아한다. 언제인가부터 피자나 파스타는 느끼하다며 국밥을 더 좋아하게 됐단다. 입에 맞는 국밥을 발견하면 뚝배기를 기울여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는다. 쪼끄만 게 아재 입맛이다. 그래서 여행지에 갈 때면 꼭 주변에 국밥집을 검색해 둔다.
국밥을 먹기 위해 우리는 전략적으로 아침을 거르고 나왔다. 우리가 갈 식당이 무려 90년 된 해장국집이라고 했더니 아이가 깜짝 놀란다. 한국전쟁 이전에도 있던 식당이냐며 묻길래 그보다 더 앞선 일제강점기에 시작한 듯하다 하니 분명 국밥이 엄청 맛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국밥은 국물이 깔끔해 부담 없이 술술 들어갔다. 밥이 수북하진 않아서 아이에게 좀 부족할 것 같아 내 밥에서 한 숟가락을 덜어 아이 밥그릇에 올려줬다. 콩나물을 안 먹는 아이에게 내 몫의 선지와 양을 주고 아이 국밥의 콩나물을 내 그릇으로 옮겨 먹는다. 아이는 오늘도 국밥을 싹 비웠다.
부른 배를 뚜둥기며 휴대폰으로 맵을 켜고 걸어서 조계사를 찾아간다. 나는 지독한 길치라 코엑스 안에서도 곧잘 길을 잃는다. 내비게이션 말귀도 잘 못 알아먹어 10분 거리를 한 시간 동안 간 적도 있다. 다행히 아이가 나보다 길눈이 밝아 헤맬 때마다 도움을 준다.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조계사에 가까워질수록 불경 소리가 커진다. 근처에 집회가 있나 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뭔가 했더니 오늘 입춘이라고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제야 오늘이 입춘인 걸 알았다.
경내로 들어가니 대웅전 안에는 사람들이 그득했다. 대웅전 밖에 놓인 의자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웅전 앞마당 가득 의자가 잔뜩 깔려 있었다. 마이크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소리가 들리고 간간이 사람들 웃는 소리도 들렸다. 불경이 끝나고 스님이 설법을 하시나 보다.
"오늘은 아쉽지만 108배 못 하겠다."
대웅전은 법회 중이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대웅전에 들어갈 수 없으니 하는 수 없이 108배를 건너뛰어야 하나 안도하려는 찰나 아이가 안내 표지판을 발견했다.
"엄마, 저기서 하면 돼"
아이가 대웅전 옆 법당을 해맑게 가리킨다. 눈치도 없이. 아이 손에 이끌려 '묵언'이라고 쓰인 법당에 들어간다. 새로 지어진 건물인 듯 보이는 법당 안은 난방이 들어오는지 훈훈한 공기가 돌았다. 발을 딛는데 바닥이 따뜻했다.
안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주인 없는 절방석을 찾아 구석에 하나씩 깔고 앉아 108배를 시작한다. 분명 묵언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절 터줏대감인듯한 할머니들끼리 서로 안부를 묻고 오늘 공양은 떡국이라는 고급 정보를 공유한다.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한다. 할머니들 얘기가 자꾸 들려 하마터면 숫자를 놓칠 뻔했다. 다시 정신줄을 붙잡고 집중한다. 세 번째 108배라 조금 익숙해졌는지 108배를 하는데 20분쯤 걸렸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108배를 마치고 나와 입춘 법회에 참석해 본다. 모든 재앙은 물러가고 백가지 복은 들어온다, 아무리 삼재라도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바로 세우면 괜찮을 거라는 좋은 말씀을 이것저것 해주셔서 한동안 앉아 설법을 들었다. 찾아보니 불가에서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날 한 해 동안 가족의 화목과 삼재 소멸을 위한 기도를 하는 입춘법회를 한다고 한다.
법회 중간에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빠져나간 사람들이 대웅전 뒤쪽으로 가 줄을 서자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내 줄이 길어졌다. 혹시 아까 들은 점심 공양줄인가 싶어 아이랑 나도 냉큼 대열에 합류했다.
영문도 모르고 한참 줄을 서있다가 아무래도 너무 궁금해서 아이에게 물어봐달라 했다. 아이가 긴 줄 사이사이에 관계자로 보이는 이에게 가 물어본다. 중간중간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빨간 봉투를 잔뜩 들고 줄 선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저기... 이게 뭐 하는 거예요?"
조끼를 입은 보살님이 발원문을 태우는 입춘행사라고 앞에 사람들 보고 잘 따라 하면 된다며 아이와 내 손에 빨간 봉투를 쥐어주었다. 이게 뭘까. 어떻게 하면 될까.
이번에도 눈치가 필요한 순간이다.
찾아보니 소원을 적은 발원문을 불당에 올렸다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법당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태우러 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영문도 모르고 받았던 빨간 봉투는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이 적혀있는 발원문이었다.
아이가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묻길래 엄마도 모르니 그냥 따라 하자해 본다. 다들 머리에 발원문 봉투를 얹길래 우리도 따라 해 본다. 다들 대웅전을 한 바퀴 돌아 마당 안 쪽 발원문을 수거하는 곳에 빨간 봉투를 넣길래 따라서했다. 대열에서 나와 발원문을 태우는 의식을 멀리서 지켜본다.
나오는 길 참새 방앗간에 들르듯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세 번째 108배를 한 천년고찰이니 시주 겸 기념할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 입춘이라고 기념품점 한쪽에 입춘 컬렉션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 액운을 막아준다는 액막이 명태를 샀다. 부디 삼재를 물리치고 액을 막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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