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P의 괴로움 - 휴직교사
선생님 빨리 오세요.
가르쳤던 제자들이 대로를 가득 메우고 서 있었다. 내 생일도 스승의 날도 아닌데 축하한다며 고맙다며 플래카드에 배너에 다들 들고서 기념사진 찍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그 규모에 입이 딱 벌어져서 놀랐으나 폰을 꺼내 동영상과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허겁지겁이었다. 그 와중에도 보고 눈에 담기보다는 찍어두어야겠다는 강박이라니. 녹화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애들 둘셋이 나를 데리러 와서 가운데에 세웠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모두 다 나를 향하고 있다니. 드넓은 대로 수많은 제자인파 속에서 내가 주인공이었다. 나는 ENFP 답게 가만히 서지 못하고 바닥에 배를 깔고 브이를 그리며 기념사진의 센터가 되었다.
일요일 늦잠을 잔 이유다. 이 꿈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꿈인가 그러면 깨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만큼 어깨가 한껏 치솟아 있었다. 인파 속에는 그동안 속 썩인 녀석들 반장인 녀석들 조용했던 말이 많던 가출을 하던, 기억할 제자들이 얼굴들이었다. 교사의 생활을 멈춘 지 5달, 학교는 잊어버리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계속 날려버린 내가, 사실 못 잊은 것이 아이들이었나. 1년에 가르치는 학생 평균 300명으로 잡았을 때 6000명이라. 6천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2004년 강사로 교단에 처음 섰고 성대결절로 출산으로 조금씩 쉰 적은 있지만 어느새 20년 세월이다.
20년은 생각보다 순식간의 시간이었다.
체질적으로 반복된 일상을 못 견디지만 학교의 반복은 변화무쌍이다. 매년 다른 아이들이 등장하고 다른 이슈로 고민하고 봄에서 시작하여 겨울의 끝을 달리는 유사한 레이싱이지만 그 주인공들인 아이들이 때마다 다르다. 가령 올해 애들이 순한데 좀 답답해요-하면 소띠들이며 와 얘네들 왜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죠 하면 원숭이띠다. 아주 기가 쎄서 초반에 잘 잡아야 합니다 했더니 용띠라나 뭐래나. 우스갯소리 같지만 중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인데 매년 그 분위기와 기가 다르다. 그 성향에 맞게 끌고 가고 키워주는 것, 쑤욱 성장했던 초등과는 학업적으로 집중하는 고등과는 다른 중학교 교사의 몫이다.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
6천 명의 제자들 이름을 다 기억한다면 그것은 거짓말, 그러나 얼굴은 안다. 너를 안다. 교실에서 나를 보던 너를 기억하고 교무실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던 네가 생각난다. 저 기억 못 하실 줄 알았는데. 길을 가다가 제자다 싶으면 안녕-하고 인사하는 나는 그걸 꼭 다 표현하고 반가워하고 싶은 ENFP다. 매년 다른 반 다른 아이들을 만나지만 매년 다 아끼고 사랑한다. 나도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다. 그러니 졸업하고 다들 가버리면 하루 이틀 떠난 사람에 대한 상실감이 맴도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애정이 넘치고 열정이 넘치고 엔프피 선생님을 종종 어떤 아이들은 부담스러워했지만 그것이 아마 나를 굴려온 방법이었나 보다.
쉽지 않았던 날들도 물론 있었다.
7월 중순 휴직하고 호주에 와서 한국의 놀라운 뉴스들을 접했다. 선생님들의 연이은 죽음은 다른 대륙에 있는 나에게도 우울함을 불러오게 했다. 나라고 그런 순간이 없었을까. 나라고 그런 억울함이 없었을까. 나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이만큼 자라고 있는 건 묵묵히 온몸을 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키는 우리나라 선생님들이 계셔서라고 믿는다. 나만 열의가 넘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교사가 아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그렇게 생활하고 계셔서 이만큼의 아이들이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시간까지, 많은 날들은 집에서도 늦게까지 수업준비에 학부모상담에 잔업무 처리에, 사람을 키우는 일이란 그 어느 일보다 쉽지가 않아서 웬만한 자세의 마음이 아니면 견디기 힘들다. 그것들을 그런 마음으로 대한민국의 수많은 교사가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교사'에 대한 애정과 헌신적 자세가 없으면 계속해나가기 힘든 직업이다. 그런 그의 자존감 혹은 교사로서의 자의식이 무너지는 것, 호주에서도 나는 그들의 마음이 헤아려져 아팠다.
꿈에 제자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시작한 이야기가 강건해지고 있다. 사실은 결혼하고 처음인 것 같은 주부생활자의 모습 속에서 나는 부단히 교단이 그리고 아이들이 그리웠나 보다. 한국 선생님들의 슬픈 뉴스는 내게도 상처가 된 몇몇 일들을 불러일으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알 수 없는 의지를 키워주었는데. 아이들을 그걸 또 알고 나를 찾아왔던가 보다. 문득 학교가 그립고 교실의 공기나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떠오른다. 1년 살이를 정하고 온 길이라 돌아는 가겠지만 나도 모르게 교직이 아닌 다른 길을 찾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교직에 대한 슬픔 교직에 대한 염증 보람이 증발되는 교직의 현장들 때문일 것이다. 방학이 없다면 다들 쓰러질 거예요-라는 말처럼 수업을 하다가 내려오자마자 업무에 숨도 안 쉬고 뛰어들고 또 종이 치면 후다닥 계단을 오르고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분노도 화도 교실에 들어가서 수업을 하고 있노라면 또한 잊히기 마련이었다. 학생들이 그런 힘이다. 그렇게 호주에서 내 제자들을 본다.